검색결과 리스트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 2013.02.15 1.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랑과 사랑 틈새, [줄리에게 박수를]
- 2013.02.13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➀ <베를린> : 촌스럽지 않은 액션 영화에 관한 고찰 1
- 2013.02.11 [근근한 가이드]『프랑스적인 삶』 - 장폴 뒤부아 2
- 2013.02.07 [룽의EX]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1> - 다이하드, But 다이하드, So 다이하드 1
- 2013.02.05 [무진기행] 선택으로부터의 도피 3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랑과 사랑 틈새
줄 리 에 게 박 수 를
안녕하세요, 당신. 저 빙구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벌써 2월 중순이에요. 곧 3월이 오구요. 산등성이에는 아직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당신과 저는 어느새 겨울과 봄의 틈새에 서 있어요. 바람은 아직 날카롭고 며칠 새 기온이 좀 더 내려간다지만, 봄이 온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 봄인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져요. 비록 같은 공간에 있진 않지만, 겨울이 지나가는 이 밤, 봄을 기다리는 이 밤을 함께하고 있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큼. 이런 어중간한 순간을 당신도 사랑하나요? 이를테면 계절과 계절의 사이, 사랑과 사랑의 틈새, 당신과 저의 사이같은 것 말이에요. 오늘 들고 온 당신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거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그래서 누구에게도 박수받지 못하는 어중간한 이들.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저와, 그리고...... [줄리에게 박수를].
햄릿, 그리고, 줄리엣
햄릿 : 누구요, 햄릿이요? 당신이라믄 (사이) 나요, 나? 정종복이?
오필리어 : (피식 웃는다)
햄릿 : 어, 어, 왜 웃어요.
오필리어 : 아뇨. 햄릿, 그러믄 햄릿 같잖아요 그죠? 근데 정종복이 – 이러믄 햄릿 안 같잖아요. 정종복이와 햄릿 사이엔 천만 광년만큼의 거리가 있는 거라.
그는 햄릿입니다. 가난한 연극배우 정종복이와는 천만 광년쯤 떨어져있는 햄릿이요. 이 남자 아주 지금 속이 뒤집어집니다. 아니 글쎄 어젯밤에 술에 이렇게 꼴아 갖구 한 돈짜리 순금 반지 주면서 고백까지 했는데, 이 여자는 들은 척 만 척 천만 광년이네 어쩌네 남의 이름 갖고 자지러지게 웃으며 어물쩡 넘어가려 그럽니다. 그 반지를 연극 소품으로 주섬주섬 챙겨 온 이 눈치없는 여자는, 죽은 전 애인이 준 반지를 참기름 들기름 식용유로도 못 빼고 끼고 다니는 이 여자는 바로 햄릿이 사랑하는 여자, 햄릿이 몇 발자국 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여자, 오필리어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사실 오필리어가 아닙니다. 오필리어 배역을 맡은, 마찬가지로 가난한 연극배우 김은옥이죠. 근데 사실 가만보면 또 이 여자는 김은옥도 아닙니다. 뭘 해도 어중간한 이 여자는 사실…… 줄리엣입니다. 죽은 로미오의 연인, 줄리엣. 햄릿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막을 내렸고 <햄릿>이라는 새로운 공연이 올라갈 차례인데, 오필리어는 줄리엣도 오필리어도 아닌 채로 여전히 로미오를 보낸 그 가을 속에 서 있거든요. 연극 [줄리에게 박수를]은 이런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을과 봄의 사이, 지구와 달의 사이, 햄릿과 줄리엣의 사이에 있는 이들 말입니다.
계절과 계절 사이, 햄릿과 줄리엣의 사이
로미오, 오필리어 : 이 세상에서가 아니어도 좋아 다음 세상 그 다음 세상에서라도,
첫 번에 못 만나고 두 번에 못 만나서 그렇게 백 번, 천 번, 만 번이 거듭되서 백 번 천 번 만 번의 그리움만 쌓인대도 좋아.
합창 : 그렇게 못 만나던 어느 날 당신이 밥을 먹다 이유 없이 괜히 눈물이 흐를 때 그때 꼭 그렇게 생각해 거기 못 간 내가 당신 눈을 간지럽힌 거라고 거기 못간 내가 바람이 돼서 슬쩍 당신 한 번 만진 거라고 아무래도 좋아 어떡해도 좋아 지금 여기 이렇게……
(……)
오필리어, 김밥을 꾸역꾸역 말없이 구겨 넣고 씹다가는 설핏 눈물을 흘린다.
햄릿, 무대 한쪽에 서서 오필리어를 바라본다. (……)
로미오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필리어는 아직도 그와 함께 했었던 구석진 벤치에 쪼그려 앉아 로미오를 추억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햄릿이 있죠. 햄릿의 말마따나 조금 어려운 말을 쓰자면, 이건 결국 기표와 기의의 문제입니다. 오필리어의 세상이 온통 로미오와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는 거죠. 하늘, 바다, 아이들, 하다못해 불어오는 봄바람 한 자락까지 모두, 햄릿이 독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되어 있거든요. 그녀가 여전히 줄리엣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미오가 죽은 순간부터 그녀의 세상에는 다시는 해가 뜨지 않은 채 찬바람만 불고 있으니까요. 오직 오늘만 살겠노라는 연인들의 노래를 부르던 그녀에게 봄빛 내일들은 그저 무의미할 뿐이어서, 이어지는 나날들을 아무리 꾸역꾸역 삼켜도 언제나 그녀는 소화불량입니다. 당신이 없는 오늘, 오필리어가 트는 텔레비전에는 당신과의 어제들만 계속 재방송되고 있는……그녀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목련꽃이 피는 봄도 없습니다.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고 헤매는 오필리어는 그래서, 아픕니다.
햄릿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분들 그거 해 보셨습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확 돌아서면 저는 언제나 거기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저기 저 나비같이 춤추는 저 여인이 보이십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때 보게 된 겁니까, 하필이면 왜 지금에서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리엣, 그 이름을 버려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햄릿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필리어만 바라보며 걸어 왔지만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녀와 그 사이의 몇 발자국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가 않습니다. 그가 걷는 길의 이정표는 언제나 오필리어의 그 뒷모습이었다는 걸, 그녀가 거기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표처럼 떠도는 청춘도 길을 잃어버린 사랑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한 그 어딘가의 길목에서 햄릿은 좌초해 있습니다. 그녀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햄릿도 마찬가지로, 아픕니다.
햄릿 : 오필리어가 죽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햄릿의 광증에 맞춰서 비참하게 죽어줘야죠. 그래야 비극이 되지요. 그래야 극이 끝나지요. 로미오는 없어요. 죽었어요, 줄리엣도 없어요. 죽어야 된다구요. 근데 안 죽었어…
(……)
오필리어 : 금 밟지 말아요. 내 자리로 넘어오지 말라구요.
햄릿 : (사이) 안 넘어가요. 누가 넘어가요? 내가 왜 넘어가요 거길.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목숨이 경각에 달렸소 나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요. 그것이 문제인 것만으로도 머리통이 바스라질라 그래서, 힘들어서… 나도 그 자리로 안 넘어가. 못 가.
오필리어를 향한 애틋한 햄릿의 마음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눈물겨우리만큼 무력합니다. 마음먹고 술기운을 빌려 고백도 해 보고, 때로는 제풀에 지쳐 무기력하게 무너져 봐도, 오필리어와 햄릿의 떨어진 몇 발자국은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아요.
왜, 있잖아요…… 사랑을 하다 보면, 아무리 사랑해도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실감하는 그런 순간이. 그래서 지구가 돌고, 계절이 돈다는 것마저 원망스러운 순간. 지구와 달이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의 봄과 나의 가을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는 걸 깨닫는 사이. 봄과 가을, 겨울과 여름 사이에는 천만 광년만큼의 거리가 있는 거라…… 뭐 그런 말이죠. 사랑하는 이의 과거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에 여전히 갇혀있음을 볼 때 사랑은 무척이나, 무력해집니다.
이 안쓰러운 햄릿 이야기의 끝을 살짝 보자면, 그는 끝내 오필리어를 줄리엣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합니다. 극이 끝날 때까지도 오필리어는 줄리엣과 오필리어와 김은옥 사이의 그 무엇으로 남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안타까운 햄릿의 사랑을 그저 흔한 짝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봄과 가을 사이의 천만 광년이, 햄릿이 기어코 좁히지 못하는 오필리어와의 몇 발자국이, 당신과 나를 영영 분절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건 왜일까요?
아프지 말라는 말에 아파할 줄 안다면
햄릿 : 오, 오필리어. 어제 길을 지나던 중이었소. 길가 담벼락 너머로 막 피어나던 목련꽃이 내게 말을 걸었소.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내가 아팠던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오. 다만 목련이 날 보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뿐. 햇살에 눈을 찌푸린 내가 찌푸린 얼굴로 목련을 올려다보았을 때,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목련은 막 꽃봉오리를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소. 세상에 이 세상에 꽃을 피워내려 안간힘을 쓰는 목련보다 더 아픈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근데 날더러는 아프지 마라 하더이다. 자기가 더 아프면서. 목련이 내게 주는게 그게 무엇이오. 그 아픈 목련이 내게 하는 걱정의 말이 그게 도대체 무엇이건대 내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지더냔 말이오. (사이) 오, 오필리어, 숲의 여신이여. (사이)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지구와 달이 닿지 못할 거리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달이 없어진다면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게 되고, 기후도 계절도 엉망이 된다고 하지요.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빛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 정도의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같은 역학관계로 서로의 궤도를 교차하고 있습니다. 달이 그 거리에 그 정도의 힘으로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안정적으로 자신의 궤도를 돌 수 있다는 거죠.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봄과 가을은 어떻게 해도 만날 수가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가을이 없으면 겨울도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없으면 봄도 오지 않구요. 우리는 늘 어느 계절에 서서 맞은편의 계절을 그리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햄릿의 봄이 혼자만의 봄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밥을 먹다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군가의 아픔이 바람마다 묻어있어서, 백번 천번 만번 쌓인 그리움이 당신을 만지고 있어서입니다. 나를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아플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좌표는 사실 그런 겁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면 나도 나의 좌표를 상실하고 마는. 그렇기 때문에 햄릿과 오필리어는 설사 몇 발자국의 거리가 아니라 천만 광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 말라는 그 말이 아프다고 오필리어가 느낀다면, 그건 햄릿의 아픈 그 말이 천만 광년을 건너온 그리움으로 그녀를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오필리어의 시간은 겨울의 어느 밤을 지나고 있고, 그녀는 얼어붙은 스스로의 아픔으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지 말라고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가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아차렸다면, 그래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이미 살며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요. 차갑게 얼어붙어있던 달빛에 살얼음이 부서지고, 그곳으로 슬며시 아침이 드는 그런 겨울과 봄의 사이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녀가 봄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몇 발자국 뒤의 햄릿 역시 같은 봄의 시간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햄릿의 사랑이 가엾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이유입니다. 옆에 있지 않아도,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첫번에 못 만나고 두 번에 못 만나서 백 번 천 번 만 번의 그리움만 쌓인대도 좋은 이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박수를 쳐 줍시다. 그 모든 사이에 있는 아픈 이들에게. 가을과 봄에게, 지구와 달에게, 햄릿과 줄리엣에게, 그리고 저와…… 당신에게.
'[연극] 빙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외로움에 관하여, 그 우주적 은유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0) | 2013.04.12 |
---|---|
4.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뼈 도둑] (0) | 2013.03.29 |
3. 떠내려가는 순간들, [춘천, 거기] (0) | 2013.03.15 |
2.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은 이야기, [너무 놀라지 마라] (0) | 2013.02.28 |
0. 당신의 이야기 (0) | 2013.02.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➀ <베를린> : 촌스럽지 않는 액션 영화에 관한 고찰
1 '액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소고
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액션 영화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장르이다. 액션 영화만 보는 사람, 액션 영화라면 스토리와 크게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액션 영화에 굳이 돈과 시간을 들일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다. 우리 아빠는 전자에 속하지만 나는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액션 영화가 눈요기하기에 좋다는 것은 인정한다. 화려한 스케일은 기본이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놀라운 액션과 긴박한 사운드, 땀과 상처로 범벅된 남주인공의 근육질 몸(*-. -*???)등… 그러나 액션 장르는 어떤 소재든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진부해진나머지 이제 그저 멋진 남주인공이 멋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듯한 영화도 심심찮게 보인다. 영화에서 서사와 감정을 중요시하는 편인 나에게는, 정말 최악인 영화.
영화 <베를린>은 액션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베를린>은 의심의 여지없이 ‘액션 영화’이다. 화려한 액션과 스펙타클을 자랑하는 이 영화에서 남주인공 표종성(하정우 분)는 어김없이 역경에 처하며 심지어 그의 아내 련정희(전지현 분)은 인질이 되어 하정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상황들을 극복해 간다.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요건을 모두 갖춘 이 영화!
그런데 나는, 액션 영화를 싫어하는 나는, 영화 <베를린>이 마음에 든다. 내가 하정우와 류승범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액션 영화가 재밌는 걸보니 내 일상이 그렇게 팍팍한 걸까 생각하다가 내가 <베를린>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렇지, 액션이라고 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소결 : 액션 영화에 액션이 전부는 아니다.
잠시 언급했듯, 모든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가 갖춰야할 기본 구성을 동일하게 가진다. 그렇다면 액션 영화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것은? 쉽게 떠오르는 답은 참신한 액션과 방대한 스케일일 것이다. 말 그대로 ‘액션’ 영화, 액션 빼면 시체….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주인공은 멋있고 액션은 훌륭하지만 졸작인 숱한 영화들을! 이쯤 되어 깨닫는 당연한 얘기 - 액션 영화의 품질을 결정하는 건 액션의 원인이 되는 상황 설정과 그 사건의 해결과정이다. 사건의 퍼즐 조각과 액션이 맞물려 돌아갈 것. 내가 보기에 <베를린>은 그런 영화다.
2 ‘액션’ 영화 <베를린>의 매력 포인트
감독 류승완 : 꼼꼼한, 액션, 재치.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자신의 세계를 선보이면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류승완 감독. 항상 흥행하거나 평점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나(^^;) 대표적으로 <부당거래>, <다찌마와 리>, <아라한 장풍대작전>등의 작품이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며 액션을 향한 애정을 확실히 증명해왔다. 그의 영화는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며, 꽤나 고퀄리티의 액션을 녹여내고, 깨알 같은 유머(류승완 표 유머의 총체는 단연 <다찌마와 리>!!! 단,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유머를 구사하니 주의할 것.)를 심어놓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그를 표현하는 꼼꼼, 액션, 재치의 세 키워드는 영화 <베를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오프닝 : 영화는 시작 후 5분이 전체를 좌우한다.
일단, 모든 영화는 시작 후 5분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스릴러/액션 영화는 관객을 압도(기선제압!)하고 집중을 끌어내는 것이 관건. 영화 <베를린>의 경우 오프닝에서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는 북한의 영웅 표종성이 작전 수행을 위해 멘트와 암호로 장소 및 시간을 알아내는 상황을 관찰함으로써 일명 ‘고스트’ 요원 하정우의 생활 방식과 베를린의 분위기 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약간의 노이즈를 곁들인 모노톤, 하정우 바로 뒤에 바짝 붙어 함께 가는 앵글 위치, 적당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사운드, 암호로 처리된 비밀 작전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돕는 적절한 그래픽은 분명히 영화적이고 그래서 낯선 분위기를 풍기며 결과적으로 관객은 긴장한 채로 화면에 몰입하고 이내 급박하게 들이닥친 영화 타이틀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중시선 :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모두가 연루되어있다.
영화 전체에서 꾸준히 유지되는 다중 시선은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다양한 집단이 등장하고 서로 연루되어있는 만큼 각기 최고의 기술을 사용하여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다르게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시점. 이는 영화 초반부 무기거래를 지켜보는 여러 그룹의 시선이 긴박하게 교차될 때와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 분)를 모든 세력이 추격할 때 극대화된다. 특히 리학수 추격씬에서 지하철 선로로 도피한 리학수와 그를 쫓는 표종성이 열차가 다가오자 벽에 붙어 버티는 동안, 뒤이어 쫓아온 정진수(한석규 분)가 권총을 장전한 채 지하선로 출입문을 열고 이 때 통과하고 있는 열차의 속도로 인해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연출은 세 인물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다른 시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흩어져있던 단서들의 조각이 교차하면서 하나로 맞춰지는 클라이막스에서도 이러한 다중시점의 매력은 톡톡히 효과를 본다. (하정우랑 한석규가 모은 단서, 관객은 먼저 다 맞출 수 있지롱!)
액션1 : 원칙과 일관성
액션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액션의 원칙과 일관성이다. <베를린>의 액션은 무조건적으로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에게 할당된 위치와 성격, 상황에 따라 일관성 있게 배열된다. 액션의 일관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포착되는 지점은 표종성과 동명수(류승범 분)의 기술이 일치되는 것에 있다. 오프닝에서 정진수가 표종성의 관자놀이를 권총으로 겨누는 장면은 예고편에도 소개될 만큼 임팩트 강한 장면이다. 머리에 총을 겨누다니, 이건 게임 끝! 한석규의 승리니까. 그러나 표종성의 한 마디 “남조선에서는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라고 가르치나? 고개만 돌리면 총알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어.” 이후 표종성은 보란 듯이 총알을 피하고 정진수의 총을 해체한 뒤 그의 목에 총구를 겨눈다. 이 놀라운 기술은 후반부 사건의 전말을 알아챈 아랍세력이 동명수의 관자놀이에 겨눈 총을 동명수가 고개를 돌려 피할 때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동명수의 냉정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그의 첫 등장 - 기차 안에서 볼펜으로 소매치기의 목의 혈관을 찍어 사살하는 방식은 영화 말미 표종성이 동명호를 죽일 때 똑같이 반복된다. 즉, 표종성과 동명수가동일한 훈련을 받은 북한의 전사라는 설정이 액션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더불어 완벽한 조준을 보여주던 류승범이 점차 폭주하면서 끝에 가서는 무차별 총격과 무차별 주먹질을 시전하는 것도 상황의 변화와 감정의 고조, 인물의 성격을 고려한 배치로 보인다. 북한, 남한, 아랍, 이스라엘 그룹별로 각각 미묘하게 다른 스타일의 기술과 조직적 대응을 구사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
액션2 : 장소와 소품 활용도
영화 <베를린>에는 호텔 객실, 옥상, 계단 통로 등 실내 액션신의 비중이 높다. 그 중 하정우의 계단 점프(*_*)도 인상적이지만, 표종성의 집 안에서 벌이는 사투와 탈출신의 긴박함은 최고조이다. 표종성과 동명수의 부하3은 맨손과 총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집 안의 온갖 집기를 이용해 혈투를 벌인다. 찬장과 냉장고는 기본이요, 그 안의 통조림과 유선 전화기 등을 활용하는, 이게 바로 가정집 액션! (엄청 급박하고 위기의 순간인데 통조림으로 때리는 거 보고 웃음...ㅋㅋ)
이후 창밖으로 탈출해 유리가 다 깨지면서 건물 1층의 카페로 떨어지고 전선에 휘감겨 도미노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는 장면은 과하다 싶을 만큼 계산된 연출인데, 장소를 완벽하게 활용하는 액션이라, 확실히 화려하긴 하다.
그리고, 액션 영화 <베를린>을 촌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들
➀비현실적인 영웅화의 지양
<베를린>은 흔한 영웅물이 그렇듯, 주인공 개인이 1대 100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표종성은 자신의 사전 조사와 정진수의 도움으로 획득한 단서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이를 상황을 반전시킬 무기로서 활용한다. 결국 표종성을 겨누던 북한 그룹과 아랍 그룹의 총구가 하정우가 아닌 서로(북한-아랍)를 겨누도록 판을 뒤집는 것이다. 혼자 모든 적을 무찌르는 비현실성을 과감히 버리고, 집단과 상황을 이용하는, 좀 더 현실적이고 오히려 더 쾌감적인 상황 설정. 세련된 방식의 전개다.
➁갈대밭, 련정희의 죽음
물론 주인공의 여인이 죽는 것도 진부하지만, 주인공이 적을 다 물리치고 여자를 안전하게 구출해내는 해피엔딩은 좀 더 진부하다. 하지만 핵심은 련정희가 죽었냐 살았냐가 아니라 그 장면 전체에 있다. 표종성이 숨이 끊어진 련정희 업고 뛸 때, 아무리 기를 써 봐도 다리의 총상 때문에 계속 넘어지는 모습은 어떻게든 의지로 돌파하는 영웅들과는 다르게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갈대밭 한 가운데 주저앉은 표종성, 련정희와 목적지였던 건물이 비로소 한 눈에 다 들어올 때, 그 거리는 허무할 정도로 너무 멀어서 무력감을 한껏 느끼게 한다. 사건을 해결하고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영웅의 절규는 더욱 애절하다. 어떤 결말도 진부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한없이 진부할 조각을 최대한 진부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비법이 여기에 있다. (하정우가 복수를 위해 돌아가는 엔딩은 여전히 영웅물스럽긴 하지만.)
➂균형의 시각 : 집단 간 선악구도의 폐기, 시스템과 개인의 분리
앞서 언급했듯 <베를린>은 북한, 남한(국정원/청와대), 아랍, 이스라엘 모사드, CIA 등 다양한 집단 고유의 스타일을 충실히 구현했다. 그리고 각 집단에 대한 선험적 선악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남한감독이 만들어 남한에서 개봉한 영화지만, 남한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옹호 받지도, 북한이나 아랍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비난받지도 않는 것이다.
표종성은 충성스런 ‘빨갱이’이지만 권력에 의해 부패된 북한 세력과의 비교우위를 차지할 뿐, 그 이념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당’을 끝까지 신뢰하고, 뭔가 잘못되었다며 자신의 원칙과 신념에 근거하여 문제 상황을 차근차근 확인하는 인물로써 끝내 남한으로 전향결정도 하지 않는다. 우리와 가장 친숙한 인물인 남한 국정원의 정진수도 오히려 색깔론에 치우친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춰지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그의 이념적 지향보다 인물 개인의 행동 방식과 인간적인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강한 형제애로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아랍 세력들마저 그러려니 하고 보도록 묘사된 균형 잡힌 시각. 집단이라는 시스템과 분리된 개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부함에서 한 걸음 벗어났다. 만약 하정우가 극적으로 정치적 신념을 바꾸고 남한으로 전향해서 남한 요원으로 활동하는 판에 박힌 가벼운 결말이었다면 매우 촌스러웠을 것이라 확신한다. (<솔트>나.......2012 최악의 한국 영화 <간첩>처럼......)
3 맺음말, 사족
지금까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첫 손님, <베를린>을 꼭꼭 씹어 음미해 보았다. 음미해 볼 재료가 더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액션은 하도 열심히 씹어서 단물이 쪽 빠진 것 같다. 너무 칭찬일색이었나? 등장인물과 세력, 단서가 되는 정보량과 출처가 많은 탓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도 있지만 집중하면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이고, 그 많은 정보를 빈틈없이 짜임새 있게 맞춰낸 능력을 높이 산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의 열연에 박수를 보내며- 등장인물 모두 부자연스러운 것 하나 없이 배역과 배우가 하나가 되었다. 보는 동안은 하정우가 너무 멋있고 (+전지현이 진짜 예쁘고) 하정우 편이 되지만, 돌아보면 류승범의 연기가 정말 최고였다는 생각이 남는다. 웃음기 싹 뺀 냉혈한과 기회주의자 연기를 상황 변화에 맞춰 완벽히 해냈다. 너무 멋진 거 아입네까? 하… 최고. 류승완 영화엔 류승범이 항상 나와서 좋습네다. 냠냠~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베를린OST 'BAD' 뮤직비디오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영화] 샤오롱바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 (2) | 2013.04.10 |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➃ <밀양> : 비밀의 볕, 온전히 햇볕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하다. (0) | 2013.03.27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➂ <North Country> : 여성영화, 그 상징에 대하여 (0) | 2013.03.12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➁ <복수는 나의 것> : 몽타주와 사운드, 악의 없는 소통불가능성의 비극 (0) | 2013.02.27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 시작글 (0) | 2013.02.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 - 프랑스편]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을 읽는
세 가지 가이드 포인트
|
여기, 중년에 접어든 한 프랑스 남성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 여성 사업가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사진가로 성공했다. 그러나 아내의 배신을 겪고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딸은 정신착란에 빠져들었다. 갑작스런 성공과 예기치 못한 추락의 모순적인 삶. 몹시 프랑스적이고 또 동시에 대단히 보편적이기도 한 폴 블릭Paul Blick 삶. 프랑스의 중견 작가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가 들려주는 『프랑스적인 삶Une vie française』, 출간 즉시 프랑스 전역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100년 전통의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이다.
그런데 작가가 주인공 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사뭇 인상적이다. 유년 시절 겪었던 형의 죽음은 제5공화국 헌법의 반포 순간으로 기억되고, 아버지의 발작은 드골 대통령의 사임 장면과 중첩된다. 그의 사진가로서의 성공에는 자크 시라크의 총리 지명 순간이, 아내의 사업 실패에는 1997년 6월 총파업 사건이 배경처럼 펼쳐진다. 심지어 각 장의 제목으로는 샤를 드골, 조르주 퐁피두,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등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이 차례대로 붙어 있다. 우리로 치자면 삶의 시기를 김대중 시대, 노무현 시대, 이명박 시대로 구분하고, 노무현 탄핵 사건으로 첫사랑과의 이별을 기억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폴이 대단한 정치적 거물이라서 대통령들과 얽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폴은 고작 성적 욕망에 몰두하는 유년기를 보내고, 격동하던 68혁명기에는 자유로운 섹스에 탐닉했으며, 소일거리나 일삼다가 사진가로 데뷔한 별 볼 일 없는 인물일 뿐이다. 대통령을 만난 일이라고는 몇 해에 한 번씩 텔레비전 너머로 취임식을 본 게 전부일 정도인 평범한 삶이다. (대통령이 실제로 이야기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미테랑 대통령이 사진사 주인공에게 전화로 사진을 부탁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전직 대통령을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었으며, 폴 블릭의 삶은 제 5공화국의 부침을 배경으로 등장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도대체 『프랑스적인 삶』과 무슨 관계라는 것일까.
여기에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첫 번째 가이드 포인트가 있다.
#가이드 포인트 1: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의 역사
프랑스 제 5공화국은 1958년 5월, 알제리 혁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국민투표로 새 헌법을 채택하면서 출범했다. 1 당시 드골이 개헌의 과제로 주되게 고려한 것은 프랑스 내각제의 정치적 불안정성이었는데,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려 7년 임기의 직선 대통령제 2를 도입한다. 여기에 비상대권과 총리 및 장관 임명권, 의회해산권과 국민투표회부권 및 군통수권까지 대통령에게 몰아줬으니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제 5공화국을 출범시킨 샤를 드골. 지금은 드골 공항으로 더 유명한 듯
『프랑스적인 삶』에서 대통령의 취임과 퇴임에 관한 묘사가 배경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프랑스 사회에서 대통령이 가진 무거운 존재감 때문이다. 7년(혹은 14년)을 함께 한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은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하며,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은 그 자체로 프랑스 사회가 새로운 방향과 시대정신으로 선회하는 기점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68혁명과 국민투표 패배로 인한 드골의 사임은 아버지의 첫 심장병 발작과 병치되고, 몇 년 뒤의 아버지의 사망은 데스탱d‘Estaing에서 미테랑Mitterrand으로의 정권교체 3로 표현된다.
"1년이 조금 지난 1969년 4월 28일, 드골은 지방제도 개혁과 상원 개편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 앞에서 별 감동 없이 선거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무엇을 잡고 싶은 듯 나의 아버지가 손짓을 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위로 푹 쓰러졌다. 아버지가 겪은 최초의 심장병 발작이었다." (p. 60)
프랑스 제 5공화국의 정치적 격변이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일상과 결코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가까이에서 발생하는 작은 변화보다 훨씬 커다란 힘으로 삶을 덮쳐온다. 프랑스 대통령제의 또 다른 특수성은 다수당과 대통령이 같은 계열인가 아닌가에 따라 권력 형태가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인데, 대통령이 의회 다수당도 장악할 경우 원래 의도한 대로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만, 의회 다수당을 빼앗길 경우 이른바 ‘좌우 동거 정부(cohabitation)’ 4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시라크 대통령 시기에 이러난 ‘좌우 동거 정부’에 따른 혼란으로 폴의 아내는 사업 경영에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면서 폴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안나가 한창 노동조합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돌발적으로 일어난 총리 교체 소식은 그야말로 레닌의 10월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몽드마르상 출신인 우파 총리 알랭 주페가 사임하고 므동 출신의 진짜 사회주의자인 리오넬 조스팽이 전격 취임한 것이다. 화가 치밀어오른 안나는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조합 측에서 주장하는 모든 인상안에 동의했다." (p. 323)
말하자면 이 소설을 감상하는 첫 번째 포인트는 프랑스 제 5공화국의 정치사가 어떻게 폴 블릭이라는 개인의 삶을 흔들었는지, 그리고 폴 블릭이라는 개인의 일생이 프랑스 제 5공화국의 부침을 드러냈는지에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추상적인 가상 세계를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 밀접하게 뿌리내리고, 그 다사다난했던 20세기를 몸소 겪어낸 현실 속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상과 정치의 연결을 통해 이끌어 낸 구체성’으로 정리해보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출간 직후 프랑스 독자들의 압도적인 공감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주인공에게 있다.
#가이드 포인트 2:
68세대의 자기 서사
혁명적 운동은 언제나 혁명적 세대를 낳는다.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그랬고, 우리의 386이 그랬다.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적 운동이 끝나고 나면, 여기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당시를 반추하고 곱씹으며 재구성하려 한다. 9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도 했던 ‘후일담 문학(386 문학)’이다. 공지영의 초기 소설이 대표하는 후일담 문학은 혁명적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의식을 짓누르는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과 자괴감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1968년 5월의 파리. 폴 블릭도 저 사이에 있었을까
『프랑스적인 삶』은 청년 시절에 68혁명을 겪었던 세대들을 위한 후일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386문학과 차이가 있다면 40년 이상의 세월을 돌아보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했던 20대와 부채의식에 사로잡혔던 30대를 지나 결혼, 직업적 성공과 실패, 부모의 죽음, 불륜, 아내와의 다툼, 부모 되기 등 68세대가 노년에 접어들기까지 지나 온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격차가 있는 만큼 주인공 폴의 태도는 다소 방관자적이다. 이를테면 폴은 내심 좌파적 성향에 동조하지만 투표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행동을 할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다. 아담 스미스를 신봉하는 우파적인 아내를 만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지만, 우파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1974년 5월 19일 저녁에 지스카르 데스탱이 1.62퍼센트 앞서서, 그러니까 명백하게 ‘사회주의 배신자’이지만 어쨌든 결코 더 나을 것 같지 않은 상대 후보 미테랑보다 겨우 42만 4,599표를 더 얻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을 보자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기분이 찜집하듯이 한 시간쯤 침울해졌다." (p. 126)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폴의 세계관에는 여전히 청년 시절 겪었던 68혁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 부채의식이라기보단느 세상과 타협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자조다. 이러한 태도는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보다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닮았다.
"적당한 시점에서 나는 아무런 의식 없이 프티부르주아의 여러 단계를 뛰어넘었다. 학위를 따려고 공부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전율의 시간에 방종했고, 그러고 나서 재빨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고, 두 아이로 식구를 채웠고,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결국 나는 좋은 학생이었다." (p. 235)
폴이 식물 사진가로 성공하는 전개도 68세대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혁명운동의 실패 이후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인들은 건강과 겉모습, 그리고 몸의 물질성에 엄청난 관심을 드러낸다. 5 거대 이데올로기와 거시적 관념의 붕괴가 즉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몸을 돌보고 온갖 종류의 바디 테라피를 받으며 요가, 마사지, 아로마 등 자연주의적 삶을 향한 열광은 혁명의 열기를 잃어버린 68세대가 찾은 대체물이었다.
68세대의 특수했던 (그러나 보편적이기도 한) 일생을 돌아봄으로써, 작가는 프랑스인들의 전폭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던 셈이다.
#가이드 포인트 3:
관능적인 삶, 프랑스적인 삶
마지막 가이드 포인트는 이 소설의 관능적 묘사에 대한 것이다. 성욕과 자위행위에 빠져들었던 유년시절, 자유로이 섹스를 탐닉하던 청년기, 연애와 결혼, 장모를 향한 성욕와 몇 번의 불륜까지, 이 소설에는 자유분방한 성적 묘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성을 다루는 태도는 대단히 가볍고 유쾌하다. 불륜에 대한 인간적인 갈등이나 고뇌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성적 즐거움을 마음껏 향유하려는 솔직한 태도가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
"그녀도 나도 성교가 끝난 뒤에 후회하는, 예수회의 도덕률에 얽매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후회도 회한도 어떤 죄의식도 없었다. 오로지 쾌락만이, 실제로 느끼는 엄청난 쾌감만이 존재할 뿐 각자 결혼을 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누추한 작은 방을 나가면 너무도 분명한 각자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쾌락과 정액의 공국인 이 작은 작업실의 은염과 정물 사진 한가운데서 우리는 아무런 구속 없이 즐겼으며, 낯 모르는 사람들과 열광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여행자들처럼 굴었다." (p. 213)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성적으로 방종(!)한 것일까? 그렇게 말해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청교도적 육체관을 가진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미국, 영국, 독일 등)이 감각적 쾌락을 경멸하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 문화의 국가들(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은 관능적인 것을 찬양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미국에서 사람들이 영화에 관능적인 장면이 있다고 부모들에게 미리 경고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관능적 장면’이란 용어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6 특히 프랑스에서 육체에 관한 사회적 도덕은 1960년대 이후 훨씬 더 자유로워지고 개인주의화되었다. 육체의 도덕성은 개인사가 되었고, 개인은 자기 나름의 규범을 선택하였으며, 타인의 규범에 관대해져 갔다. 성을 묘사하는 폴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68세대가 가진 정체성의 한 표현인 셈이다.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열 세 살 연하인 인기 연예인과 연애하다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2008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재임 중 부인과 이혼하고 인기 모델이자 가수인 카를라 부르니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거대한 스캔들로 비화됐을 일이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대통령의 진지한 로맨스를 축하했다 하니 사생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념은 우리와는 확실히 사뭇 다른 모양이다.
"데헷, 나 모델이랑 사귄다능^^V" - 사르코지 전 대통령(우)과 카를라 부르니(좌)
그러니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성에 대한 도덕적 갈등이나 고뇌에 빠져들지 말고 한 사람의 자유로운 프랑스인이 되어 성적 유희에 몰입해보도록 하자. 물론 한국 사회로 돌아와서도 똑같이 생활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다.
# 마치며
『프랑스적인 삶』은 작고도 위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프랑스 제 5공화국의 격변에 한 사람의 일생을 버무려냄으로써 왜소한 인간의 왜소하지 않은 운명을 그리고 있다. 위에서 세 가이드 포인트를 제시했지만, 그런 것 하나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더 충실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인 장 폴 뒤부아
그래서, 작가가 말하려던 ‘프랑스적인 삶’이란 결국 무엇일까.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도록 하자. 근근하게 써내려간 김근근의 근근한 가이드는 여기서 이만 갑작스럽게 마쳐야겠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다. 이만, 근근!
참고문헌
장폴 뒤부아, 함유선 옮김, 『프랑스적인 삶』, 밝은세상, 2006.
로렌스 와일리·장 브리에르, 손주경 옮김, 『프렌치 프랑스』,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2004.
최연구,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 살림출판사, 2008.
- 최연구,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 살림출판사, 2008, p. 32. [본문으로]
- 중임 금지 규정이 없어 재선, 삼선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 2000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의회와의 선거 주기를 맞추기 위해 임기를 개정해 현재는 5년 임기로 축소되었다. [본문으로]
- 이 때 제 5공화국 사상 최초로 사회당이 집권한다. [본문으로]
- 프랑스와 같은 이원집정부제에서 여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를 경우에, 대통령이 의회 다수당 출신의 인사를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구성하는 연립 정부를 일컫는다. 이 경우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의 충돌이 발생해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대통령은 외교 및 국방을, 총리는 내정을 맡는 경우가 많지만, 총리가 외무 행정 권한도 갖고 있기 때문에 역할의 구분이 엄밀하게 이뤄지지 못한다. 통상적으로 대통령은 입헌군주제에서의 왕처럼 의례적인 존재가 된다. [본문으로]
- 로렌스 와일리·장 브리에르, 손주경 옮김, 『프렌치 프랑스』,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p. 113. [본문으로]
- 위의 책, p. 112. [본문으로]
'[영화] 김근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근한 가이드]『무기의 그늘』- 황석영 (1) | 2013.04.08 |
---|---|
[근근한 가이드]『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토머스 하디 (3) | 2013.03.25 |
[근근한 가이드]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0) | 2013.03.11 |
[근근한 가이드] 『이방인』 - 알베르 카뮈 (7) | 2013.02.25 |
가이드 김근근입니다. (0) | 2013.02.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Ex 1.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 다이하드, But 다이하드, So 다이하드
매번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과 연애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있다(얜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긴 한 건가 싶은). 그런가하면, 외모고 성격이고 거의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사람과만 연애를 하는 사람도 있다(어디서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만 데려오는지). 마찬가지로 배우도 배역과의 관계에서, 매번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배우가 있는가하면, 대체로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배역을 맡는 배우도 있다. 무엇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고, 그저 성향이 다르다고 봐야할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후자에 가까운 배우로 보인다. 총을 들지 않은 브루스 윌리스의 모습은 잘 상상되지도 않고,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그런 모습은 많지 않다. 그 수많은 총을 든 모습들 중에서도 사람들은 25년이 넘도록 그를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로 보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 자신도 25년이 넘어 머리는 벗겨지고, 여러 여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에도 여전히 존 맥클레인과는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물론, 브루스 윌리스는 이후 존 맥클레인에게서 벗어나려 다양한 배역을 맡았지만). 오늘의 Ex-MovieFriend는 브루스 윌리스의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이자 현재진행형 사랑인 <다이하드>이다.
<다이하드>는 1988년 존 맥티어넌 감독이 만든 액션영화로, 당시만 해도 TV시리즈 <블루문 특급>에서 탐정을 연기하며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브루스 윌리스를 액션히어로로 만들어 놓은 대흥행작이다. 브루스 윌리스의 첫사랑인 이 영화는 실은 많은 남자들에게 실연을 당하며 그에게까지 왔는데, 당시 육체파 최고의 남자였던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먼저 섭외가 갔었다고 한다(재밌게도 이후에 그들은 <익스펜더블>에서 한자리에 모인다).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만의 유머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존 맥클레인의 툴툴대고 반항적인 유머는 거의 브루스 윌리스의 애드리브였다고 하니 이거야 말로 천생연분이라 해야 하나.
소설가 김연수 씨는 밥 말리의 명곡 <No Woman No Cry>를 오랫동안 <여자가 없으면 울 일이 없다>로 알고 있었다고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다(아마도 한문식 해석? 아니면 'no pain, no gain'식 해석?). 하지만 그 본래 뜻은 <그만, 그대여. 울지 말아요>로 여자를 위로해주는 말이었으니. 완전히 정반대의 해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 역시도 <다이하드>라는 제목을 보고 한참을 난감해했다. <다이하드>라는 제목을 보면 어떤 영화일지 대략 감은 잡힌다(어찌되었던 '다이'고 '하드'니까 액션이겠지). 하지만 해석을 하려고 하면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름대로 <다이하드>라는 제목이 어떻게 번역될까 열심히 궁리를 하다가 결국 두 개의 후보로 압축할 수 있었다. 1) 열심히 죽다! 2) 죽기도 힘들어! 그러니까 한 남자가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 죽는 이야기거나 한 남자가 '이거 참 죽기도 힘드네.'하며 한탄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결과 약 10초 만에 <다이하드>의 본래 뜻을 알았으니, 바로 <죽도록 고생한다>였다.(이 오묘한 번역의 세계란) 영화는 그야말로 죽도록 고생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사는 아내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뉴욕경찰 존 맥클레인은 아내의 회사에서 테러범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 어쩌다 초고층빌딩의 인질테러사건에 휘말린 맥클레인은 권총 한 자루에 런닝셔츠와 맨발로 무모하고 아슬아슬하게 테러범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그는 영화 속 영웅들처럼 탄탄한 근육질도 아니고, 고도로 훈련된 몸놀림을 보여주지도 않는다.(마치 비교하듯이 영화 속에서 람보와 슈워제네거가 대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어딘지 허둥대면서도 아슬아슬하고,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어쩌자고 이런 일에 끼어들었냐며 엄살을 부리고 툴툴거린다. 그러니 세상을 구하겠다는 영웅심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다. 이게 바로 안티히어로 맥클레인의 웃기는 매력이다.
이런 그에게 영웅적 면모가 있다면 (어찌 보면 보통 사내인 이 남자가) 바로 죽으려고 환장했다는 거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님의 신념을 본받아 '열심히 죽으려는' 사나이인 것. 그런데 이게 웬걸.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죽음을 무릅쓰니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하나씩 적을 소탕하며 그는 기똥차게 살아남는다. 이거 참 이 남자. '죽기도 힘든'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곡절 끝에 런닝셔츠는 피범벅 맨몸이 되고, 맨발은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적들을 모두 소탕한 우리의 영웅 맥클레인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는 성취감이나 승리를 만끽한다든가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는커녕 아내와 함께 어서 집에 가서 남은 크리스마스라도 편하게 쉬겠다는 듯 차를 재빨리 타고 떠나버린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참 죽도록 고생만 했네' 하며 끝나는 것이다. 오글거리는 영웅식 감동은 1초도 없고, 오히려 노동자의 감성을 꽉꽉 채워놓은 그런 영화인 것.
영화를 보고나니 제목에 대한 내 번역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던 것이, <다이하드>는 '열심히 죽으려고' 하지만 '죽기도 힘든' 남자 존 맥클레인이 결국 '죽도록 고생만 한' 이야기였다. 내 식으로 다시 번역하면 '다이하드(열심히 죽으려), But 다이하드(죽기도 힘든), So 다이하드(죽도록 고생만한)'인 이야기.
이 사즉필생의 남자가 몸으로 주는 노동스릴도 굉장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맥클레인의 진정한 매력 혹은 영웅적 면모는 다름 아닌 '말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생활의 영웅은 어쩌면 대신 욕해주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대놓고 욕하긴 망설여지는 상황에서 누가 대신 해주면 그가 멋져보였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욕이 유머러스하기까지 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열광한다. <개그콘서트>의 개그맨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을 때의 희열, <봉산탈춤>의 말뚝이가 양반들을 놀려줄 때의 통쾌함 같은 것. 답답하고 권위적인 경찰국장에게 시원하게 욕을 해버리고, 폭력으로 사람을 누르고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테러단을 놀려주며 바보로 만드는 이 통쾌한 말빨이 맥클레인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자 서민적 영웅의 면모다. 서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권위적이면서 무능한 국가'와 '거대한 힘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이익집단'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다. <다이하드> 시리즈가 쏟아지는 액션히어로물 사이에서 아직도 사랑을 받으며 이어지는 데는 그만의 노동자적 액션과 서민영웅의 말빨이 관객들에게 물리적 액션의 쾌감 이상의 감정적 액션의 쾌감을 맛보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존 맥클레인은 선망의 영웅이 아닌 공감의 영웅으로 가슴에 남았다.
25년이 지나 새로운 <다이하드>로 머리는 벗겨졌고 주름은 늘었지만 브루스 윌리스가, 존 맥클레인이 돌아왔다(심지어 아들과 함께). 서민들은 언제나 그야말로 '다이하드'하며 살고 있다. 맥클레인이 몸은 늙었지만 말빨은 더욱 살아서 다시 한 번 통쾌하게 욕을 날려준다면, 죽을 둥 살 둥해도 결국에 살아남아 집으로 퇴근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쾌하게 세대를 막론하고 힐링이 되는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한 번의 '다이하드 정신'을 기대하며 다시 극장으로 가보아야겠다. 렛츠 다이하드!
※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 2013년 2월 6일 개봉
'[영화] 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룽의EX] 황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 행복과 항복 (0) | 2013.04.04 |
---|---|
[룽의EX] 조 라이트, 키이라 나이틀리의 <어톤먼트> - 저마다의 속죄의 길 (0) | 2013.03.21 |
[룽의EX]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갱스 오브 뉴욕> - 뉴욕은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1) | 2013.03.07 |
[룽의EX] 홍상수의 <북촌방향> - 벗어날 수 없는 찌질함의 섬뜩한 얼굴 (1) | 2013.02.21 |
룽의 Ex의 Ex (0) | 2013.02.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승옥 소설전집1 『무진기행』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선택으로부터의 도피
『무진기행』에 대한 이 글은 소설의 끝 문장에서 시작하려 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희중은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웠을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함
서울에 사는 윤희중은 아내의 부드러운 강요로 무진에 내려오게 된다. 서울과 무진. 이 둘은 많은 측면에서 대립 관계를 갖는다. 현재 사는 곳과 과거에 살던 곳, 세속적 삶과 소박한 삶 등등. 따라서 도시와 시골이라는 대립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답변이다. 무진은 도시의 정반대 축에 놓인 시골이 아니다. 이는 버스 안 시찰원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무진에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구도 오륙만 명으로 6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나 많다. 도시는 전혀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무진이다.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안개’와 ‘반수면상태’는 이러한 무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무진의 명물인 ‘안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하는 모호성을 띤다. 또한 ‘안개’는 일반적으로 잘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의 흐릿한 시야를 만들어낸다. ‘반수면상태’도 마찬가지다. 글자 그대로 수면에 든 상태도, 들지 않은 상태도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르면 무진을 도시의 대립항인 시골로 보는 것보다, 도시에도 시골에도 속하지 못하는 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윤희중은 왜 무진으로 온 것일까? 간단하다. 그가 무진을 닮았기 때문이다. 무진처럼, 윤희중 역시 서울에서의 삶과 무진에서의 삶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 서울의 삶을 동경하여 무진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지만, 그는 서울의 세속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장인영감이 그를 세속적인 삶에 편입시키려는 장면(182)을 떠올릴 때, 그는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무진을 닮았고, 무진도 그를 닮았다. 그렇기에 새출발이 필요할 때, 다시 말하자면 어딘가에 속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 무진으로 가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제 그 짧은 시간에 윤희중이 하인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윤희중은 하인숙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의 세무서에 처음 간 날, 윤희중은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 사이에 있는 하인숙을 보게 된다.(173-174) 또한 시간이 더 지나면서 순수한 ‘박’과 세속적인 ‘조’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하인숙을 발견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두 남녀는 서로를 알아보고 이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으로부터의 도피
이제 윤희중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보자. 그는 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자신이 어느 곳에 속할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택으로부터 도피하였다. 소설 속에 나오는 첫 번째 선택 도피는 6·25전쟁 참여다. 중학교 상급반 학생들까지 전장에 나갈 때, 그는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있었다. 윤희중은 괴로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모든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넘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학생인 그는 충분히 어머니의 감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추측해 본다면, 폐병을 가진 자신이 전쟁에 나가면 죽을 확률이 크다는 것과 어머니를 홀로 두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 불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윤희중은 어머니의 감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감금이 미칠 지경에 이르도록 부당하다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기에 고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선택으로부터의 도피는 세속적인 삶과 관련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세속적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희’와 헤어진 후, 부유한 집안의 과부와 결혼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부유한 집안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을 전무로 만들려는 장인어른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는 책임을 져야하는 선택은 회피하면서, 책임을 탓 할 사람들 - 어머니, 아내, 장인어른 - 을 만들어놓고 그들에게 회의적인 시선만 보낸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175) 그는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속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어쩌면 이것이 윤희중이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윤희중은 선택으로부터 도피하며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전보의 눈을 피하여”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193-194)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하고 책임 질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권유나 강제가 아닌 오롯이 스스로 하는 선택. 그는 편지를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그리곤 결국 버리고 만다. 갈등 끝에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 더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유나 강요에 의한 선택이 가져온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하지만 그는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내의 급한 전보로 인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제 윤희중의 부끄러움에 대해서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부끄럽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서 갖게 되는 무책임 때문에, 선택으로부터의 도피로 점철된 자신의 삶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젊은 날의 김승옥 (출처 : doopedia.co.kr)
'[문학] 오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사라져버린 '그'를 이해하는 방법 (5) | 2013.04.02 |
---|---|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세계의 끝을 넘어선다는 것 (1) | 2013.03.18 |
[저녁의 구애] 일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섬뜩함 (3) | 2013.03.05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무의미가 갖는 의미 (0) | 2013.02.19 |
오까마의 책장을 덮고 나서, 첫인사 (0) | 2013.02.03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