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2. 홍상수의 <북촌방향>

- 벗어날 수 없는 찌질함의 섬뜩한 얼굴

 

※ 감상의 큰 줄기는 이동진 평론가의 평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룽의 EX 소개글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조금 찌질하지만 모두들 자기 애인의 EX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실은 그보다 더 궁금하고 더 찌질한 궁금증이 있다. 그래서 숨기고픈,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알려고 하고 있는, 그러다보면 어느새 문득 내가 싫어지는 블랙홀 같은 궁금증. 바로 내 EX에 대한 궁금증이다. 아, 어쩌면 오늘의 룽의 Ex-MovieFreind는 술 한 잔 하고 읽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의하시길. 술 취하면 이 궁금증이 미치도록 강력해져 다음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건대 나는 이 부분에서 상당히 전통 있는 강호요, 권위 있는 찌질이임을 밝힌다. 기본 경력으로는 술에 취해 나를 배신한 '썅년'(<건축학개론>)을 찾아가 울고불고 오기, 이미 '윈터'쯤에 와서는 문득 이해할 수 없었던 '썸머'(<500일의 썸머>)가 그리워져 여기저기 근황을 캐묻기 등이 있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가끔 미치도록 네(들)이 안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건지, 왜 헤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겨털마저도 사랑스러웠다는 걸 갑자기 깨닫게 되는 건지(<러브픽션>). 오늘 이 찌질한 룽의 두 번째 Ex-MovieFriend는 누군가에겐 리얼리스트, 다른 이에겐 모럴리스트, 하지만 나에게만은 찌질리스트인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이다.

 

 

  홍상수 감독에 대해 아마 많이들 들어봤을 거다.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영화인, 독특한 이야기와 연출, 해외영화제가 아끼는 감독 등 너무도 많은 수식어들이 그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일단 봤다 하면 호평이든 혹평이든 공통적으로 느낄 그것은 바로 '낯섦'이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나왔을 때부터 이 낯섦은 그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며,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형화되지 않고 새롭게 몸을 바꾸며 진화 중이다. 그의 열두 번째 영화인 <북촌방향>은 전작 <옥희의 영화>에 이어 그의 영화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줄곧 상투성과 싸워왔던 그는 이제 시간 그리고 우연과도 싸우려는 듯 보인다).

 

  홍상수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찌질함'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욕망과 통념은 찌질함을 넘어 너무도 리얼하게 다가와서 사람에 따라 불편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북촌방향>이 중요한 작품인 것은(특히 나 같은 찌질이에게는) 이 찌질함이 섬뜩함으로 변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신비롭고 혼란스러운 영화에는 엔딩까지 내내 알 수 없게 교란된 시간의 틈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미묘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영화가 어려울 것 같다고 겁먹을 건 없다. 내용은 간단하고 러닝타임도 짧고, 홍상수 특유의 유머가 여전하니까. 그리고 당신은 결국 영화를 안주삼아 술 한 잔 하게 될 테니까.

 

 

  한때 영화감독이던 성준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려 한다. 그날 혹은 다른 어떤 날(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도록 되어있다), 성준은 다른 이들과 우연히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고덕동에 사는 옛 여자인 '경진'을 찾아가기도 한다. 또 그날 혹은 다른 어떤 날에 선배 영호와 영호의 후배 보람과 만나(이렇게 셋이선 두 번) 혹은 전직배우인 중원까지 만나(이렇게 넷이선 한 번) '소설'이라는 술집에 간다(그러니까 총 세 번). 그런데 그 술집의 주인인 '예전'은 성준의 옛 여자인 '경진'과 꼭 닮았다(실제로 1인 2역). 이게 내용의 전부다. 이 순환·반복·변주되는 시간과 북촌이라는 무대에서 성준은 자신의 찌질함을 옛 여자에게, 또 그녀와 닮은 여자에게 우습게, 안타깝게, 경이롭게 발산한다.

 

  옛 사랑과의 관계에 있어서 찌질함이란 아주 잊어서 쿨해지지도 못하고 용기 있게 다시 사랑을 시작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서 어물쩍거리거나, 문득 욕망과 미련이 끓어오를 때만 사랑인 척 다가갔다 사라지는 행태들일 것이리라. 앞에서 내가 고백한 행동들이 바로 이것이며, 영화에서 성준이 줄곧 하고 있는 행동들도 다름 아닌 이것이다(그러니 이건 찌질동지의 영화인 셈).

 

  영화 초반부에 잠시 나오지만 성준은 북촌에서 술을 마시고 옛 여자인 '경진'이 사는 고덕동 그녀의 집으로 향해 하룻밤을 보낸다. 이 장면 이외의 모든 영화 속 공간은 북촌이며, 이후에 경진은 문자메시지로만 등장하고 대신 예전만이 등장한다. 때문에 이 장면은 쉽게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찌질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면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해 진다. 찌질함의 근원은 '예전과의 관계'가 아니라 '경진과의 관계'에 있으며, '북촌'이 아니라 '고덕동'에 있다. 북촌에서 그리고 예전에게서의 성준의 찌질함은 결국에 고덕동에 사는 경진 때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북촌은 찌질함의 근원적 공간이라기보다 찌질함이 상징적으로 재연되는 '무대적 공간' 혹은 영원회귀하는 '신화적 공간'인 것이다(쉽게말해 고덕동에서 뺨맞고 북촌에서 찌질거리기). 

 

  또 내 얘길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정동과 성북동이 그러한 공간이다. 그 동네의 오래된 돌들이 주는 색채와 질감, 좁고 조용한 골목길을 보면 어쩐지 옛사랑이 생각나곤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슈퍼에서 그녀가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거나, 닮은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란 적도 있다. 그런 내 모습에 나 스스로도 우습고도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나에겐 정동방향쯤 될까.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북촌'에서'>가 아니라 <북촌'방향'>이 된다.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방향을 향해가고 그 행동을 반복하는 '지향성'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향성은 연애얘기에 국한한다면 찌질함으로 바꿔도 무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찌질함은 홍상수에 의해 뒤틀린 시간과 공간과 관계들 속에서 마법처럼 인생의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굴레 같은 것들로 변하여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북촌지도 옆에서 성준이 사진 찍히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 와서는 견딜 수 없는 처량함이 나아가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결국엔 벗어날 수 없는 내 삶의 어떤 굴레들을 깨달을 때의 그것이 이 영화에 있다. 성준은 아마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 옛사랑에 대한 자신의 찌질함과 함께 인생의 다른 부분에도 있을 찌질과 비슷한 무엇을 깨달았을 것이다(예를 들면, 성준에겐 영화가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거다).

 

  <북촌방향>을 보고 나는 한동안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힘껏 뛰어올라도 3초도 안되어 땅에 발이 붙어버리는 것이 그토록 야속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게 너무도 억울했던 기억도 난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그녀의 생각에 눈물 났던 기억도 난다. 삶이란 결국 이 거대한 인력들 앞에서 찌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방향쯤을 향해서 찌질하게 가고 있는걸까. 

(거봐라, 결국 술 한 잔 하고 싶어지지 않았나?)

 

 

※ 홍상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3년 2월 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