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➃ <밀양> : 비밀의 볕온전히 햇볕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하다.


밀양 (2007)

Secret Sunshine 
7.6
감독
이창동
출연
송강호, 전도연, 조영진, 김영재, 선정엽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42 분 | 200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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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Secret Sunshine, 비밀의 볕.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볕.”

 

항상 궁금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왜 밀양일까?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라는 두 번의 물음에 밀양을 대표하는 종찬(송강호 분)은 매번 밀양, 뭐 다른 곳이랑 똑같습니다.”라며 일갈한다. 무슨 꿍꿍이를 감춘 것 가은 미심쩍은 말투도 아니라 의심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왜 하필 밀양이어야 했던 거지? 유괴사건쯤은 어느 도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데. 다시 만나게 된 영화 <밀양>에서 나는 나름의 답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시작점은 (비밀 밀), (볕 양).

 

 

 


흐린 하늘, 그늘진 얼굴


영화 <밀양>을 볼 때면 침침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곤 했다. 물론 이야기가 무거운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화면 속의 밀양은 안개의 도시 무진이라도 되는 양 많은 날 흐린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밀양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면 신애(전도연 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욱 도드라지곤 했다. 따사로운 빛은 차창에 가로막혀 사선의 무늬를 만들며 신애의 얼굴에 그려지고, 많은 경우 응달이거나 실내에 있음으로써 빛의 흔적은 그림자 밖이나 창문의 후광으로 짐작할 뿐. 이 편파적인 비춤의 야속함은 신애가 다른 인물과 함께 양지에 있을 때 가장 선명하다. 신애와 마주보는 이(주로 종찬)는 빛을 정면으로 받는 반면 신애는 빛을 등지고 서있기 마련이었다. 이렇듯 따사로이 비추는 빛을 온전히 갖지 못해온 신애가 얼굴과 온 몸을 감싸는 빛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어째서인지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의 한 가운데. 아들 준의 사체를 확인하던 습지, 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던 동사무소의 주차장. 어쩌면 밀양에 입성하던 날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 밀양 길목의 국도에서 멈춰선 차와 씨름할 때에도 그랬다. 그래도 그 때는 준과 함께 햇볕을 쬐는 신애의 얼굴이 조금은 평온해보였으니 그건 아니라고 해줄까. 햇빛만큼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더니, 신애에게는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 것일까. 빛을 대하는 그녀의 눈에서 원망과 분노를 발견한다.






빛의 상징 ; 그녀에게 빛이란

 

“(빛을 만지는 시늉을 하며) 이거요?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래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토록 엇갈리는 신애와 빛, 그녀에게 빛은 어떤 상징일까? 신애처럼 불행한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꼭 필요하다며 끈기 있게 전도를 시도하는 건너편 약국 사모님은 말한다. 세상 일은 모두 주님의 뜻대로 흘러간다고. 저 햇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그 말에 신애가 발끈하며 하는 말은 아무 것도 없잖아요.”이다. 이렇게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신애가 준이를 잃고 급격하게 의지하며 빠져드는 신의 품, 그 안에서 그녀는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주문을 건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지만. 마침내 영화의 결정적 전환점. 신애가 준이를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교도소에 면회를 갔을 때, 범인은 이미 주님을 만나 속죄하고 평온을 구한 뒤였다“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 이미 용서 받았대요. 하느님한테. 그래서 맘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라고 절규하는 신애는 이제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광기에 휩싸인다.

이제부터 신애의 모든 저항과 복수의 대상은 바로 신, 절대자가 된다. ‘보란 듯이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짓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음반가게에서 앨범을 '훔쳐서' 부흥성회에 잠입해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가 울려 퍼지게 한다. 교회 장로님인 건너편 약국의 약사님을 유혹해 대낮에 갈대밭에서 간음을 저지르고 기도회에 돌을 던지고 마침내는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기독교의 가장 큰 죄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때 신애의 눈은 하늘, 바로 빛을 향한다. 하늘의 빛, 십자가의 빛을 노려보며 보고 있어? 잘 보이냐구.”, “난 너한테 절대로 안 져.”라고 몇 번을 되뇌이는 것이다. 빛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집 안의 모든 조명을 켜고 그를 노려보며 사과를,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깎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 신애에게 빛이란 신- 그녀를 구원해줬다 믿었지만 철저히 배신당했을 뿐인 신이라는 존재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빛의 따스함과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이의 절규와 저항은 더욱 처절하다. 예전에는 억지로라도 행복하다고 말하던 신애였지만 신의 존재를 한 번 인정하고 나서는 그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다만 자신이 불행한 탓은 신에게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섭리,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으니까.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는 것 아니에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의 손으로 잘라낸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려 빛이 비춰진 땅으로 가는 장면은 빛으로 상징되는 신의 존재로부터의 주체적인 단절을 뜻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나는 이제야 왜 밀양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조금은. 비밀의 볕,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던 숨겨진 빛, 그 절망과의 조우.


 

 

 


밀양, 지금, 나와 우리에게

나는 한 때 기독교신자였고, 기독교의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조차 못해본 시절이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할 때 인간의 삶은 한없이 무력한 것이 된다. 내가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살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내가 태어나고 죽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과 사건이 신의 뜻이라는데 나의 노력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내가 만드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져본들 삶은 그저 승리와 전복에의 희망이 전혀 없는 투쟁의 연속이 아닌가. 그 때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종교의 원리를 배제한 채로,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공간에 대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바꿀 수 없는 미래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재를 깨달을 때의 처절한 무력감과 절망. 나에게만은 이토록 가혹한 현실에 대한 항변이라면, 이제 이 영화는 꼭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우리는 충분히 무력하고, 햇볕은 충분히 불평등하다.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