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2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차이를 중심으로


하녀 (2010)

The Housemaid 
4.9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박지영
정보
스릴러 | 한국 | 106 분 | 2010-05-13



하녀 (2010)

The Housemaid 
8.9
감독
김기영
출연
김진규, 주증녀, 이은심, 엄앵란, 안성기
정보
스릴러 | 한국 | 111 분 | 2010-06-03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http://seesunblog.tistory.com/3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글의 편의상 김기영 감독의 <하녀><하녀>(1960)/원작으로, 임상수 감독의 <하녀><하녀>(2010)/후작으로 표기했습니다.

 

<하녀>(2010)리메이크가 아닌 이유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를 비교하며 어떤 것들이 명확히 반복되는지 살펴보았던 지난 글(http://seesunblog.tistory.com/31)의 서두에서 밝혔듯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를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의 리메이크로 보는 것은 엄밀하지 못한 해석이다. 이전에 제작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제작하는 것을 뜻하는 리메이크는 대체로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며,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만약 <하녀>(2010)가 리메이크라면 오로지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재현하는 것에 몰두하지, 이렇게 다른영화로 재탄생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영화를 마주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원작이 되는 <하녀>(1960)의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후작 <하녀>(2010)의 운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얼마나 다른지’, 즉 원작과의 차이인 것이다.

, 그럼 이제 무엇이 그렇게 다른지 조목조목 따져보자.

 

 

차이 : 재해석의 근거

 하녀 입주 → 하녀의 유혹으로 인한 불륜 → 하녀의 임신과 낙태 → 아들의 죽음 → 하녀와 주인간의 갈등 → 주인남자와 하녀의 동반자살  <하녀>(1960)

 하녀 입주 주인 남자의 유혹으로 인한 불륜 하녀의 임신 하녀와 주인간의 갈등 하녀의 유산 하녀의 자살                                           <하녀>(2010)

 

  먼저 두 작품 모두 갈등의 계기가 하녀와 주인 남자의 불륜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녀>(2010)에서는 하녀가 유혹하지 않고 주인 남자가 먼저 접근하고 이에 하녀가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설정으로 변형된다. 무엇보다 원작에서처럼 하녀가 주인 부부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파국적 상황은 하녀가 감당할 몫이 되어 원작의 주인남자와 하녀의 동반자살은 후작에서 하녀만의 자살로 대체된다. 전작에서는 힘들게 쌓아온 중산층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하녀의 위협과 요구들을 주인부부가 받아주는 것에 반해 후작에서는 하녀의 존재가 최상층 재벌의 가정을 동요시킬 위협이 전혀 되지 않고, 후작의 하녀는 다른 이를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수를 실행한다. 50년 새 더욱 벌어진 사회적/계급적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다

 

배경의 변화



<하녀>(1960)의 배경이 되는 주인 가정은 주인 여자가 밤낮으로 재봉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부의 상징인 2층집을 짓고 만족하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으로 설정된다. 반면 <하녀>(2010)의 배경이 되는 주인 가정은 한국 사회의 최상층에 속하는 재벌가로, 사실상 식모나 하녀의 개념이 사라진 2010년대에 입주 하녀를 두고 생활할 수 있는 계층이다. 이들은 정원이 딸리고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대저택에서 저녁마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주말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 집안사람들의 특기이다. 이러한 배경의 변화는 하녀가 주인을 상대로 어떤 욕망-신분 상승이나 주인 남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큰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며 <하녀>(2010)<하녀>(1960)와 구별되게 하는 전반적인 전환을 발생시키는 중심 설정이 된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 : 병식(윤여정 분)


<하녀>(1960)에서 중심 인물 구도는 [주인 여자-주인 남자-하녀]로 이는 <하녀>(2010)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대신 <하녀>(2010)에서는 [주인 여자-주인 남자-하녀]의 구도에 하녀장 병식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추가된다. 병식의 추가로 인해 <하녀>(1960)의 전형적인 삼각관계(정심-동식-명숙)구도가 <하녀>(2010)에서는 계급 관계(-해라장모-병식-은이)의 수직적 구도로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계급격차와 병식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발흥 및 증가라는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다.

새로운 인물 병식은 대저택을 총관리하는 하녀의 수장으로 수십 년째 하녀로 일하며 주인 가족의 신임을 얻고 아들을 검사로 키워낸다. 스스로 뼛속까지 하녀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병식은 어느 정도 안정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최상층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인물로서, <하녀>(2010)의 갈등 전개에서 하녀 은이의 행동을 염탐하고 은이의 임신 사실을 제일 먼저 헤라의 엄마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주인 가족의 심복으로 역할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나름의 대우도 받지만 결국에는 천대받는 하녀의 신분[각주:1]일 뿐인 병식의 복합적인 위치는 <하녀>(2010)에서 새롭게 설정된 수직적 구도를 드러내는 데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더불어 병식의 심경 및 행동의 변화도 극 전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주인 식구와 하녀 은이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병식은 주인 식구가 은이에게 행하는 비인간적인 행동들을 보며 분노하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은이의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병식의 감정은 단계적으로 고조(해라가 은이의 뺨을 때릴 때 시선 외면 은이가 하혈할 때 안쓰러운 눈빛 은이의 중절 수술 지켜보며 눈물)되고, 병식이 은이에게 눈물로 사과할 때 은이는 주인 식구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 것에 분노하며 병식의 뺨을 때린다. 후에 복수를 위해 저택에 돌아온 은이가 병식과 포옹하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같은 처지임을 인식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병식은 은이의 복수를 잠깐 말리지만 (중간 계급답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결코 자신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주인 남자의 위상 변화

<하녀>(1960)의 주인 남자의 권위가 사회적, 전통적으로 부여된 관념적인 것이라면 <하녀>(2010)의 주인 남자의 권위는 절대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부여된 실질적인 권력이다. <하녀>(1960)의 주인 남자 동식은 공장의 여공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 선생으로 경제적 소득이 뚜렷하지 않고 집안 경제를 담당하고 일으켜 세운 것은 부인 정심의 재봉 일이다. 극중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동식의 위치는 그가 애처가로 그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실질적 권력의 부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식에게 주어진 권력의 근원은 오로지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부여된, 비교적 실체가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반면 <하녀>(2010)의 주인 남자 훈의 경우 재벌 2세로서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극중 세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등장인물의 추가(병식) 및 변형(남매외동딸)으로 인해 주인 남자 훈은 저택의 유일한 남성으로 군림한다. 훈의 절대적인 권력은 불륜의 책임을 훈에게 묻지 못한 채 그 아래에 위치하는 여성들끼리 고군분투하며 그들만의 세계에서 갈등을 빚는 상황을 초래한다. 심지어 가족 관계의 서열상으로는 훈의 윗사람인 장모도 훈의 실질적 권력 앞에서는 약자로 위치지어진다. 이와 같은 권력 관계는 은이의 임신 및 유산 사실을 알게 된 훈이 장모를 추궁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누가 감히 내 애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누가, 감히.”

      “이봐요, 당신(장모) 딸이 낳아야만 내 애인 것 같습니까?”

장모 : (고개 숙이며) “아니지, 아니야.”

 

이런 저런 변명들로 추궁을 피해가려는 장모에게 훈은 장모님, 질문은 제가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카메라는 대화 장면 내내 장모는 하이앵글(카메라가 위에서 내려 보는 구도)로 훈은 로우앵글(카메라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 주로 인물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낼 때 사용된다.)로 잡음으로써 권력의 상하관계를 표현한다.

 

: (해라 때문에 생긴 입술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이 개 같은 년 어딜 감히.”

 

또한 훈은 부인과 자녀에게 친절한 가장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행동일 뿐, 부인의 임신으로 성욕을 충족시키기 어렵게 되자 하녀 은이에게 접근해 취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겉보기엔 훈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인 해라도 부족함 없이 자란 상류층이기 때문에 훈의 외도에 분노하고 용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분노는 만만한 상대인 하녀 은이에 대한 폭력으로 직접 표출(해라의 엄마 역시 은이에 대한 폭력에만 통쾌함을 느낄 뿐, 사위의 노골적인 무시와 하대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되고 훈에게는 입술을 깨물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소심한 복수에 그친다. 절대적인 권력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훈과 대결하지 않고 묵인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라의 내적 갈등과 행동의 부조리함은 해라가 페미니즘 서적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한편 훈이 은이에게 접근해 은이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도 은이의 표정이 아닌 훈의 손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인과 하녀라는 주종관계와 결부된 남녀 관계에서도 훈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훈의 유혹에 은이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응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원작에서 하녀의 유혹으로 불륜이 성립되었다면 후작에서는 주인 남자의 접근으로 바뀌었음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녀의 성격 변화

 

명숙 : “뭐라도 첩이 됐으니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하녀>(1960))

은이 : “저 남한테 해코지 못해요. 돈도 필요 없고.” (<하녀>(2010))

 

원작의 하녀 명숙은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과 주인 남자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반면 후작의 하녀 은이는 무언가를 더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원래 없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거니와, 그런 욕심을 품기에는 너무 큰 경제적 계급적 차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훈과 불륜의 관계가 생긴 뒤 화장도 진하게 하고 이성으로 기대도 가졌으나 훈이 자신에게 수표를 건네주는 행동에서 자신을 한 명의 여자가 아닌 단지 성욕 해소의 도구로 대했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일말의 기대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주인 남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물욕이 없고 아이를 좋아하며 맹하다 싶을 만큼 순수한 은이의 성격은 원작과의 차이를 생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이로써 영화는 욕망이 빚어낸 파국적 치정 관계에서 인간성마저 제거할 정도의 계급 차이 인식으로 초점을 한껏 옮겨간다.

또한 후작은 하녀의 복수심과 광기에 설득력을 주기 위해 아이를 좋아하는 은이의 성격을 드러내는 복선들을 추가한다. 주인 부부의 딸 나미를 귀여워하고 나미 같은 딸을 낳고 싶다고 말하고, 해라의 만삭의 배를 마사지 해주면서 뱃속의 아기들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 장면과 은이가 나미에게 동화를 읽어줄 때 그 내용이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이를 되찾기 위해 시련을 겪는다는 설정 등이 복선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하녀가 아이에 집착하고 엄청난 복수심과 광기에 휩싸이게 되는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써 원작이 하녀의 광기를 하녀 개인의 특이한(조금은 괴기스러운) 성격 탓으로 돌려 전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새로운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장면들의 추가

지금까지 열거된 차이들의 목표는 주제의식의 전환, 새로운 메시지의 강조이다. 원작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연출되는 하녀의 광기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후작은 하녀가 광기를 표출하게 되는 결과에 대한 개연성-계급과 구조의 문제-을 부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한다. 기존의 <하녀>(1960)에 계급 문제의 시각을 새로이 적용한 <하녀>(2010)에서는 새롭게 부가된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장면과 대사들을 추가했다.



일단 주인 가족과 하녀 사이의 계급적 격차, 즉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과 장치들은 기본적인 설정이다. 주인 가족은 정문을 사용하고 하녀들은 다른 쪽 출입문을 사용한다. 식사 시간과 공간이 다른 것은 기본이며, 겨울 산의 야외 온천에서 주인 가족이 실내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하녀 은이는 수건을 덮은 채 야외에서 기다리다가 주인 부부의 딸 나미의 수영을 돕는다. 주인 가족은 하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비교적 친절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친절한 대우조차 진심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높이기 위한 위선적인 면모로 그려진다.

 

은이 : (훈이 병식을)“여사님이라고 불러요?”

병식 : “지 기분 내킬 때만 그래.”

 

해라 : “나 아줌마한테 인간적으로 대해줬다고 생각해요, 친절하게. 아니야?”

 

주인 가족과 하녀의 권력 차이는 하녀 은이가 자신의 몸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은이 : “지들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내 뱃속에 있는 애기를.”

해라 : “시간은 좀 주겠지만, 그래봤자 아줌마 뜻대로 절대로 안 돼요~”

: “서은이씨, 낳읍시다, 우리.”

 

은이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없애기 위해 장모는 은이를 2층에서 떨어뜨리고 해라는 은이의 한약에 몰래 유산을 유도하는 약을 섞는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권한은 은이가 아닌 훈에게 있고 훈이 아이의 출산을 허락하는 구도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새롭게 추가된 인물 병식은 새로운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설정이므로 병식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차별과 억압에 대한 굴욕감도 새로운 상징의 추가로 연결된다.

 

병식 :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겪어야 할 일들이 딱 떠오르면서 신경질이 콱 하고 돋지. 그치만 뭐 어쩌겠어. 아더메치한 짓이야 이게.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고.”

 

병식 : (주인 가족이 나가자 만세 포즈를 취하며) “해방이다!”


해라에게 무시를 당한 밤 병식은 술에 취해 연신 아더메치를 외친다. 그리고 출산을 위해 주인 가족이 모두 집을 비우자 해방이다!”를 외치는 병식의 모습 뒤로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벽에 붙어있는 프랑스의 삼색기가 보인다.


의사1 : (밖의 병식을 가리키며) “밖에 저 여자는 누구야? 보호자 아니야?”

의사2 : “아니야, 아무도 아니야.”

은이의 중절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로부터 아무도 아니라고 가리켜지는 병식의 위치는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생각되다가도 결국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하녀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


<하녀>(2010)가 공개된 후 관객과 전문가들의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관심사는 바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였다.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진 오프닝 시퀀스는 분주한 시장 거리의 가운데에서 투신자살을 한 여자와 죽은 여자의 흔적 주위를 서성거리는 은이를 보여준다. 여자가 추락해 죽은 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금방 흩어지고 죽은 여자의 흔적 위로 다시 숱한 전단지가 뿌려진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은이의 관심은 생명조차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취급하는, 은이가 죽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주인 가족의 모습과 겹쳐진다.


은이 : “나미야, 아줌마 꼭 기억해 줘야 돼.” (밧줄을 목에 감은 채로 뛰어내린다.)

 

은이가 복수의 방식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몸을 불로 태우는 분신자살이다. 자신이 건드릴 수조차 없을 만큼 강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주인 가족의 눈앞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죽음의 형태인 분신자살을 행함으로써 강렬한 트라우마[각주:2]를 선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분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강한 충격을 전달할 수단으로 택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의 예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과 분신의 사회적 함의를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영화 <하녀>, 반복과 차이를 함께 가지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2010)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큰 틀에서 같지만, 전체적으로 다르다. 분명히 기본 설정을 수용하여 비슷한 스토리로 흘러가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얻게 되는 메시지는 꽤나 다르다. 단순히 배우와 시대적/공간적 배경의 차이가 아닌 주제의식의 변화. 이것이 바로 2010년 작 하녀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하녀>(1960)<하녀>(2010)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무엇인가? 어쩌다보니 3부작까지 이어지게 된, 다음 글에서 정리해보겠다. 기대하시랏 냠냠!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1. 임상수, <하녀>, 2010 중 54분의 장면은 ‘하녀’ 병식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해라 : “아줌마, 야밤에 내 방에서 웬 수다에요? 그 흉한 목소리로. 그리고 그깟 출장 짐을 몇 시간 째 싸고 있는 거야 도대체. 늙어서 그러는 거예요?” [본문으로]
  2. 임근호, (2010.5.14.) 임상수가 말하는 하녀, 그리고 몇 가지 논란 (기자회견)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831508.htm)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