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➁ <복수는 나의 것> : 몽타주와 사운드, 악의 없는 소통불가능성의 비극


복수는 나의 것 (2002)

Sympathy For Mr. Vengeance 
 8.5
감독
박찬욱
출연
송강호신하균배두나임지은한보배
정보
스릴러, 범죄 | 한국 | 120 분 | 200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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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시작된 비극, 상상보다 거대한 파국

  

  최근 개봉한 영화 <스토커>의 감독 박찬욱의 2002년 작 <복수는 나의 것>. 한국 최초의 정통 하드보일드 무비라는 이 영화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박찬욱 표 복수극의 시작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 내내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생경함을 갖게 한다. 분명 상업영화이지만 대중에게 조금은 덜 친절한 이 영화, 무엇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말 없는 몽타주와 소통불가능성의 조건

  

  류(신하균 분)는 선천성 청각 장애인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한다. 말할 수 없는 류를 대신해 가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류의 대사가 화면에 등장한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영화는 어떤 공간에서든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담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발소리는 물론, 창문 밖 빗소리와 사이렌 소리, 야구 배트의 경쾌한 충돌음과 거친 숨소리, 희미한 지하철 경적 소리, 귀가 멀 것처럼 커다란 제철 공장의 공정 소리와 매미 소리, 방음이 안 되도 너무 안 되는 류 남매 집 건물의 온갖 소음들과 빈 건물을 관통하는 공기의 흐름소리까지 모두를 놓치지 않고 매우 충실하게 담아낸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지언정, 류에게는 애초부터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의 소리. 아무런 대사도 없이 류의 일상과 주변을 무심하게 관찰하는 영화 초반부는 장면의 조각들이 엮어진 몽타주montage의 형태를 강하게 띤다.

 


  러시아의 영화 이론가이자 감독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에 의해 체계화된 몽타주 이론의 핵심은 단순한 편집으로서의 쇼트와 쇼트의 결합을 넘어서는 3의 의미를 창조하는 쇼트와 쇼트의 충돌로서 정의될 수 있다. 사람 인()과 나무 목()이 만나 쉴 휴()가 되듯이, 변증법의 정()과 반()이 만나 합()이 되듯이. <복수는 나의 것>의 몽타주는 이런 식이다. 주인공 류의 대사는 하나도 없이 이어지는 장면들의 연결. 류의 혈액형이 누나와 달라서 신장이식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 배팅 연습장에서 힘껏 배트를 휘두르는 류의 모습 병원 화장실에 붙여진 장기 알선 스티커 류가 일하는 공장의 공정과 소음과 노동자들 그리고 류 버려진 소파에 쪼그려 앉아있는 할아버지의 바지를 입혀주는 류 온갖 소음이 모두 들리는 류 남매의 집 누나가 통증으로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벽에 귀를 대고 자위하는 옆방의 청년들과 아무 것도 모른 채 라면을 끓여먹는 류.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사건 전개의 중심은 인물들의 대사로 옮겨가지만, 초반부의 몽타주는 영화 전체를 관장하는 열쇠가 된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소통불가능성에 대한 주목. 그리고 모두가 소통하지 않음으로 인한 파국으로의 전개.

 



관성으로서의 복수, 그 자체가 나에겐 중요하다.


저는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류)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유선 아빠)

 

  중심인물 두 명-류와 유선 아빠(송강호 분)-에게 닥치는 비극은 지나치게 가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나쁘게 살아온 사람도 아닌데 왜 이리도 가혹해야할까. 영화의 영어 제목 <Sympathy for Mr.Vengeance>에서 보이듯 연민, 결국엔 잔인한 살인자가 되는 이들을 위한 연민을 준비시키는 사건들의 얽힘을 어떤 면에서 참 친절하고 섬세하다. 어쨌거나 누나를 살리고 싶었을 뿐인 성실하고 순진한 근로자 류, 사장으로서의 지위와 많은 재산도 딸의 죽음 앞에 다 버리는 유선 아빠.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이를 잃은 착한 사람에게 복수는 이제 삶의 이유가 된다. 천진난만했던 벙어리 청년은 자신과 누나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근원을 단죄하는 잔인한 살인마가 되고, 이것만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강변하듯 그들의 신장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무표정으로. 유선의 시신 부검을 지켜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던 유선 아빠는 류의 누나 부검을 지켜보면서는 하품을 하고, 영미(배두나 분)를 전기고문하면서는 짜장면과 단무지를 씹어 먹는다, 역시 무표정으로.

 


  증오와 복수심만이 삶의 동력이자 관성이 되어버린 이들은 폭주하는 자신을 멈출 용기도 능력도 없다. 내가 그를 죽여야만 마침내 완성되는 복수. 어쩌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임하게 된 이 잔혹한 복수극을 즐기고 있다. 그들에겐 상대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에 (류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죽여야만 하고, 원래는 (유선을)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닌 탓에 미안하며 이 사람(유선 아빠)이 나()를 죽이는 것도 그럴 만 한 일이다, 여전히 죽는 것은 두렵고 나도 그를 죽이고 싶지만. 그저 용서와 연민과 이해를 서로, 나눌 수 없을 뿐이다. 복수 그 자체가 중요해진 이들에겐 상대의 죽음이라는 결과보다 내가 상대를 죽인다는 죽임의 행위가 중요하다. 철저히 내 입장에서! 그래서인지, 그렇게도 기다렸던 상대의 죽음인데도 상대방이 죽는 순간-숨이 끊어져 고개가 축 쳐진다든지 손이 떨어진다든지, 발버둥 치던 사람이 물에 떠오른다든지-은 굳이 포착되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

 


 

결국 ; 모두의 소통 부재와 파국으로의 귀결


  다시 처음, '류'라는 인물에 대한 설정으로 돌아가보자. 류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처하는 일상적/비일상적인 비극은 참혹하게 드러나곤 했다. 누나의 고통을 모른 채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에서,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모른 채 누나의 돌무덤을 만들던 장면에서. 그러나 이는 하나의 다른 조건일 뿐, 다 들리고 다 말할 수 있는 유선 아빠에게도, 그리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유선의 사진을 보며 영미(배두나 분)의 비명을 외면하는 유선 아빠. 유선 아빠가 외면했던 해고노동자 가족의 동반 자살과 그 안에서 살아남아 유선 아빠의 돌봄을 받지만 결국 다시 죽고 외면당하는 그 노동자의 아들. (류의 누나처럼) ‘아픈’ (유선만큼 아끼는)‘을 둔 경찰 수사 반장. 절박한 사람들의 장기를 훔쳐 팔아서 먹고 사는 장기 알선 업자 가족의 조금은 눈물겨운 몰살. 중심 인물이 아니어도 모든 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통불가능성을 소지하고 있다. 울타리 밖과는 결코 소통하지 않은 채 나의 울타리를 침범한다면 언제든 나의 복수를 할 사람들. 이게 바로 소통불가능성이 아닌가. 들을 수 없음과 말할 수 없음과 분절된 장면들의 연결은 청각장애인 류만의 것이 아니다. 파국은 충분히 예정된 귀결일 뿐이었다


   

  그렇다. 영화 초반아니 인물 설정에서부터 공을 들여 강조하고자 했던 소통불가능성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복수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야기.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