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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15 3. 떠내려가는 순간들, [춘천, 거기]
- 2013.03.12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➂ <North Country> : 여성영화, 그 상징에 대하여
- 2013.03.11 [근근한 가이드]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 2013.03.07 [룽의EX]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갱스 오브 뉴욕> - 뉴욕은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1
- 2013.03.05 [저녁의 구애] 일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섬뜩함 3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떠내려가는 순간들
춘 천 , 거 기
당신의 오늘은 안녕한가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요? 당신의 나날들에도 조금씩 봄볕이 비치나요? 빙구는 매일매일 어제와 닮은 오늘을 지나고 오늘을 닮은 내일을 맞고 있어요. 차창에 매일 엇비슷한 풍경이 지나가는 것처럼, 거리에서 지나치는 당신의 얼굴들이 어디에서 본 듯 낯이 익네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똑같은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당신은 지금 그곳에서, 안녕한가요? 당신과 내가 만났던 곳, 그리고 당신과 내가 헤어지기도 했던 곳. 춘천, 거기입니다.
오월동주, 적과의 동침
인생을 길게 펼쳐놓고, 아무 부분이나 잘라서 들여다보는 상상을 한 적이 있어요. 당신과 저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인생의 그 어느 순간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누워 있을까요? 웃고 있거나 혹은 울고 있을까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과연 인생의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도 아름다울까요? 흘러가는 인생의 단면. 아름답지만은 않은 저와 당신. 떠내려가는 사랑의 찬란한 순간. 우리는 이미 서로를 지나가 어딘지도 모르는 거기로 흘러들어가는 중입니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이에 또 떠나고, 스쳐가는 거기이기도 하지요. [춘천, 거기]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것들과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죠. 바람을 피우고, 서로의 옛 애인을 자꾸만 꺼내거나 지난 사랑을 잊지도 못하고, 혹은 고백조차 못 하는. 명수와 선영과, 세진과 영민과, 수진과 병태의. 사실 당신과, 당신과, 당신과, 저의 이야기에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명수와 선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춘천, 거기]를 들여다볼까 해요.
선영 : 나 수진이네 집에서 자기로 했구나?
명수 : 오늘?
선영 : 내일. 여기 수다라고 써있어서 뭔가 했네. 내일 우리 일주년인데. 수진이한테 전화할까?
명수 : 아니야. 나도 내일 회식 있어.
선영 : 뭐야.
명수 : 일주년 오늘 하자.
선영 : 뭐 해 줄 거야?
명수 : 자기 전임되면?
선영 : 일주년. 반지. 나 혼자 사서 낄까?
명수 : 반지?
선영 : 그래도 돼? 그러고 싶다. 자기가 돈 내면 되잖아. 응? 응? 응? 비싼 거로 한다.
명수 : 싼 거로 해.
(……)
선영 : 자기는 나랑 자면 돈 굳었다고 생각한 적 있어?
명수 :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선영 : 장난으로.
명수 : 장난이라도.
선영 : 자기도 그랬잖아.
명수 : 나야 장난...
선영 : 말해 봐. 그냥 궁금해서 그래. 아무 의도 없이.
명수 : 나는 자기랑 자면 사랑이 더 굳는다고 생각해.
선영 : 그렇게 굳다가 부서지면 어떡해. 자기 사랑 안 믿는다며.
명수 : 사랑보다는 신의를 더 믿었지. 근데 나 지금 자기 사랑하잖아.
선영 : 아유 선수멘트.
명수 : 사랑은 믿어. 사람을 못 믿지.
선영 : 난 반지 하면 자기처럼 빼는 일 없이 어디서나 끼고 있을 거야.
술 취하지마. 내일 신의 지키는지 믿어 볼 거야.
명수 : 괜히 모험하지 마.
선영 :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구 신의건 믿음이건 둘 중에 하나 지켜.
명수 : 그게 아니라 반지 다른 사람한테 뭐라 그러려고?
선영 : 엄마꺼라 그러지.
오늘은 유부남인 명수와 동아리 동기였던 선영이 쉽지 않은 사랑을 시작한지 일주년 되는 날입니다. 흔한 반지 하나 마음대로 맞추지 못하고, 근 두 달 만에 모처럼 갖게 된 둘만의 시간인데도 명수 처의 전화 한 통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둘의 사랑은 항상 연약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죠. 선영의 친구 수진의 말처럼, 그들의 사랑은 ‘오월동주’의 뱃길을 위태로이 항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의 사랑이 아름답고 애틋한 만큼, 마음 졸이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함께 자리합니다. 아름다운 순간들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들까지 함께 싣고 흘러가는, 그래서 때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원망하기도 하는. 그래서 마음 놓고 만날 수조차 없는 그들의 일주년은 그냥저냥 조용히 흘러갑니다. 명수는 회사 술자리에서, 선영은 친구 수진의 집에서.
수진 : 반지 했어? 커플링인데.
선영 : 아니야.
수진 : 아니긴, 맞는데.
선영 : 그냥 꼈어.
수진 : 너 누구 만나는 구나. 세진이 커플링이랑 비슷하네. 넌 반지 어쨌어.
세진 : 그냥 뺐어.
수진 : 그냥 끼고 그냥 빼고. 난 그냥 모른 척하면 되는 거네.
(……)
수진 : 나 뉴욕 갔을 때 그 사람 나 보고 엄청 울었다. 보자마자 막 울더라.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나도 눈물이 막 흐르더라고. 나한테 미안하다 그런 소리 안했어. 그날 밤새도록 울고 이모 집에 있다가 그냥 나왔어. 그 때 생각이 나서 전화 피하게 돼. 왜 이혼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네가 작용을 했다 그렇게 들려서 싫어. 생각에서 멀리 두고 싶어. 겨우 그렇게 됐는데. 그냥 가끔 소식이 궁금할 정고로 겨우 버텨냈는데 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다 야. 그래서 나 그 사람 부인 입장 생각한다.
선영 : ...
수진 : 나 괜찮아..
선영 : 수진아 나..
세진 : (소리로) 언니 보일러 좀 올려 줘.
수진 나간다.
선영, 전화 확인한다.
그러는 사이 수진 들어온다.
두 사람만이 아는 게 사랑이라는 수진의 말에 선영은 과연 두 사람은 알까, 하고 대꾸합니다.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편히 걸 수 없는 선영을 두고 회식자리에 간 명수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거든요. 오지 않는 전화를 신경쓰면서, 결혼한 남자를 사랑했던 수진의 체념섞인 지난 이야기들과 명수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선영은 자신의 사랑이 가게 될 앞길을 예감합니다. 새벽 내내 자신의 사랑에 대한 회의와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는, 끝내 자신을 짝사랑하던 남자 지환을 집에 들이고 맙니다.
봄이라 꽃들은 만개하는데
명수 :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선영 : 잘못한 거 없어.
명수 : 그런데 왜 그래?
선영 : 더 이상 이렇게 가기 힘들어.
명수 :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우리 이렇게 힘들 거 알고 시작한 거잖아.
선영 :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사우나에서 잤어?
명수 : 아가씨들 있는데서 접대자리 끝나고 좀 취했는데 네 생각나더라.
너한테 미안한 생각나서 집에 못가겠더라.
선영 : (물 닦다가) 말이 돼?
명수 : 선영아...
선영 : 나.. 당신 집에 가는 거 질투하지 않았어. 질투하지 못했어. 집에 가면 처랑 같이 잠자리하는 건 너무 당연하니까. 그건 진투 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냥 아파하면서 견뎠어. 근본적으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니까. 당신 처한테 내가 죽일 년이니까. 내가 죄인이니까 이렇게 숨어서 사랑하는 거다. 살면서 자기 사랑할 수 있다면 죽어서 지옥에 가도 좋고 현생에 이렇게 당신 처한테 모르게 상처준 거 다음 생에 죄업으로 받더라도 지금 사랑만 할 수 있다면 달게 받겠다. 나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밤에 당신 어디 갔는지 뻔히 아는데 전화 통화 안 되고 신경 너무 쓰이더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이랑 잠자리하는 건 똑같은데 뭔가 싶었어. 근데 알겠더라고. 다 착각이었어.
명수 : 착각이라도 지금은 말자.
(……)
명수 : 회사 낚시 취소됐어. 춘천으로 간다, 그랬나? 우리 처음 손잡은 데가 거기였는데 춘천. 응. 너 그 때 물에 빠져가지고 속옷 비쳐서 내가 바지 벗어주고 그랬잖아. 난 팬티만 입고 다니고.
선영 : 그 때 자기 소설 계속 쓰고 싶다 그랬는데.
명수 : 술 취했었잖아. 그 때 너 울었었는데.
선영 : 엄마 얘기하다 그랬지 뭐. 그 때 첨 손 잡은 거잖아 우리.
명수 :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네 모습이 참.
선영 : 참 뭐.
명수 : 참 예쁘기도 하고. 전에 알았던 네 모습에 다른 너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복잡하고 그랬었어.
(……)
뒤로 수진(소녀) 나타난다.
소녀 : 마주하고 있으면 둘 만일 수 있고, 마주하고 있어도 둘 만일 순 없는, 등을 보이는 사람의 마음과 등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읽을 때, 아픔이 저리도록 사무쳐 옵니다. 그 사람의 빨래가 한 세탁기 안에 같이 섞여 돌 수 없음에 가슴으로 한참을 운 소녀에게는 너무 아픈 사랑은 그저 아픔일 뿐입니다. 봄이라 꽃들의 만개에 세상은 들떠 웃는데 아픔에 절뚝이며 소녀의 꽃은 홀로 집니다.
불안해서,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선영은 명수가 없는 그 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방에 혼자 누워 있으면 가끔, 지나간 나날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등을 구부립니다. 그럴 때면 저는 그 어딘가에서도 늘 결국 이렇게 엉거주춤 서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곤 해요. 그 어딘가에서 제가 서있든 앉아있든 누워있든, 결국 어디에서건 저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마 선영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명수와의 짧은 만남이 아무리 찬란한들, 그녀의 긴긴 밤들은 온전히 그녀만의 몫이라는 것. 잘린 그녀 인생의 단면에서 쏟아져 나올 것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순간이 아니라 아프고 힘든 그녀만의 공백들이라는 것. 이것들을 그녀는 문자 한통 오지 않는 핸드폰 액정에서 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잔인한 깨달음은 온 우주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듯한, 미칠 것 같은 외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자신과는 상관없이 들떠오는 춘천의 아름다운 풍경에도, 선영의 이러한 외로움과 불안은 예고없이 나타난 지환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됩니다.
지환 : 형님은요. 이 자리에 좋아하는 사람 없으세요.
명수 : 없어요.
영민 : (들어오며) 명수 형 좋아하는 사람은 집에 있죠. 유부남인데.
지환 : 아, 결혼하셨죠.
명수 : 네.
수진 : 난 있어.
세진 : 정말.
수진 : 이거 진실 게임이잖아. 있어. 여기서 제일 키 커.
세진 : 병태...
수진 : 키 커.
세진 : 취했어.
지환 : 누나는.
선영 : 나 있어.
주미 : 누구.
지환 : 나도 있어요.
주미 : 뭐야. 어머 어머 둘이 뭐 있지. 지환씨 여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빨리 돌려 빨리.
(……)
영민 : 이 중에 바람핀 경험 있는 사람. 양다리.
영민 손든다. 명수 손든다.
영민 : 결혼하기 전에요. 결혼한 다음에요.
명수 : 결혼한 다음에.
영민 : 세다. 다음 질문자는 형이다. 형 질문하세요.
명수 : ...연상이랑 자 본 적 있는 사람.
영민 : 넌 왜 안 드냐.
세진 : 짜증나.
주미 : 그만하지. 내일 아침은 뭐 먹을까. 귀찮으니까 라면 해 먹을까.
영민 : 야 너두 바람 폈었잖아.
주미 : 말은 똑바로 해. 바람 핀 건 오빠지.
영민 : 아니 나는 그래요. 과거는 상관이 없어. 나 만나기 전이니까. 근데 내가 물어 봤잖어. 담수랑 일 있었는지 없었는지. 없었다며. 너는 없었다 그러고 병태하고 애들은 다 알고 있고. 담수 씨발놈이 너하고 잔 거 떠들고 다녔는데 나만 몰랐어. 그래서 미연이하고 잤다.
(……)
영민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근데 자꾸 생각이나 미치겠어. 여기다 구멍 뚫어서 그 생각 다 끄집어내고 싶은데. 나 어떡해. 세진아. 나 어떡하면 좋아. 세진아 나 정신병원 다닐까.
아픈 처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봐야겠다는 명수와, 진실게임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지환. 그리고 서로의 전 애인을 들먹이며 싸우는 세진과 영민까지. 위태로이 사랑을 유지하고 있던 선영의 마음은 결국 무너져, 선영은 그 밤 지환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채 명수를 외면하고 맙니다.
우리는 불현 듯 무너지는 마음을, 떠내려가는 순간들을 붙잡을 길이 없습니다. 이유 없이 외롭고, 외롭다는 생각에 초라한 우리네 생과 사랑은 끝없이 서글퍼집니다. 사실 저나 당신이 없어도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없는 창가에도 여전히 마을들은 똑같이, 본 적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낯익은 표정들로 지나치겠죠. 선영이나 명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지환이나, 세진, 영민, 수진, 그리고 병태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때로 사랑을 견딜 수 없게 하나봅니다.
흘러가기 위해서 떠나보내는 아름다운 것들
선영 : 명수야. 가니.
명수 :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얘기 좀 해줘.
선영 : ...
명수 : 갈게.
선영 : 나 뭐 하나 물어 봐도 돼. 어제 질투했어 걱정했어.
명수 : ...
선영 : 추접했지.
명수 : 질투했어.
선영 : 잘 지내.
명수 : 너도.
선영 :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
명수, 선영을 안는다.
뒤로 수진 (소녀)나온다.
소녀 : 취하진 않았는데 당신 생각이 나요. 술을 마셨지만 취하진 않았는데 당신 생각이 나 요. 당신 생각이나요. 취하진 않았는데 눈물이 나요. 아플 줄 알고 당신과 헤어졌지 만 아파서 힘들어요. 당신도 그러시면... 당신도 그러시면... 저 어쩌죠...
우리는 타인이 지나치는 그 어느 차창에 서 있는 걸까요. 혹은 앉아 있거나, 아니면 누워 있을까요. 웃고 있거나 혹은 울고 있을까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과연 인생의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도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우리는 아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흘러가기 위해서 또 어떤 고통을 품어야 하는지, 흘러가기 위해서 또 어떤 아름다운 순간들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인지. 이 우주도 가끔은, 보잘것없는 지구의 불빛을 내려다보려 몸을 일으킬 때가 있을까요. 등이 굽은 나날들도 이런 밤이면 당신과 저의 우주 어딘가를 별빛처럼 밝힐까요. 다만 그런 물결들이 모여 우리는 또 흘러간다는 것을 알 뿐이죠. 먼지 같은 별들이 모여 밤하늘이 되고, 아름답던 순간들이 모여 사랑이 되고, 어제를 닮은 오늘과 오늘을 닮은 내일들이 모여 삶이 되듯이.
오늘 들여다본, 명수와 선영의 사랑은, 그리고 제가 미처 다루지 못한 세진과 영민, 수진, 병태의 사랑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듯, 당신과 저의 모습을 보듯 낯익습니다. 어제나 혹은 오늘의 이야기, 아니면 내일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떠내려가고, 떠내려오는 삶 앞에서 우리는 앉아 있어야 할지, 서 있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다만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들마다 안녕,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명수와 선영을 닮은, 어제와 내일을 닮은, 타인과 우리를 닮은 나날에게.
그래서, 당신의 오늘은 안녕한가요? 아름답지 않던 당신의 어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던 당신의 사랑은, 안녕한가요?
소녀 : 책갈피 사이 단풍잎. 책상 위 지우개 청소차. 스탠드 불 빛 위에 걸린 느티나무. 나 뛰는 심장소리 처음 들었을 너. 느린 모습으로 꿈인 양 자리한 키 작은 소년이던 너. 나의 작은 이별에 첫 입맞춤한 그 때. 어떤 모습이라도 멀지 않은 그 곳에 있어 주길 바라고 바라고 바랬던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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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➂ <North Country> : 여성영화, 그 상징에 대하여
3월 8일 : 세계 여성의 날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3월 8일 즈음이 되면 학교 캠퍼스와 도심 곳곳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여러 행사가 열리고, 100여 년 전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빵과 장미"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지요. 1908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임금인상, 10시간 노동시간 준수, 여성 선거권 부여 등의 요구를 외치며 루저스 광장으로 나왔고, 그녀들의 구호는 오늘날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슬로건, "빵과 장미"의 유래가 됩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 여성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이듬해에는 미국 의류산업 전체 여성노동자들이 13주동안의 대규모 파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92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루저스 광장의 저항을 기념하고 전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자는 취지로 3월 8일을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로 제정하게 되었고, 올해는 여성의 날이 제정된 지 105주년이 됩니다. 저도 105주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니키 카로 감독의 <North country>(2005)입니다.
영화 <North country>
<North country>는 1984년 미국에서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문제제기하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여성노동자가 승소한 최초의 사건,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Jenson vs Eveleth Mines)’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보면,
주인공 조시 에임즈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떠나 두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북부 미네소타로 돌아옵니다. 마침 새로 제정된 법에 따라 철광에서 여직원을 일정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충분한 급여를 주는 직장이 필요했던 조시는 철광에 취직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철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성만 있던 곳, 남성적인 작업환경일 뿐 아니라 여직원들에 대한 시선조차 곱지 않죠. 무엇보다 여성광부들을 힘들게, 절망하게 하는 것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보다도 남성 광부들의 끊임없는 직간접적 성폭력입니다. 언어적 성희롱부터 신체적 성폭력의 위협까지, 나아가 여성의 신체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노동 환경 또한 문제적입니다. 여러 사건을 거치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조시는 문제제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지만, 그녀의 여성 동료들과 가족들까지도 그녀의 행동에 우려를 표하며 쉽사리 동조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안 될 싸움,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 좁은 동네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죠. <North country>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외로운 싸움과, 그리고 결국엔 승리하는 목소리의 이야기입니다.
상징의 원리 : <North country>에서 성폭력의 프레임을 보다.
영화 <North country>를 본 대부분의 사람은 조시의 싸움과 승리에 감동하면서도 지금 적용하기엔 극단적인 사례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North country>에 그려진 사례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헐 너무 한 거 아니야? 저걸 어떻게 참아!’라고 당연히 말할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대놓고 하는 모욕적 언사, 도시락 통에 남성 성기 모형 넣어 놓기, 담배꺼낸다며 가슴 만지기, 간이 화장실 흔들어 넘어뜨리기, 여성 탈의실에 정액 뿌려놓기…. 그러나 또, 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1984년의 일을 2006년에 영화로 소개하는 것에는 당시의 일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여성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보아야할 것에 대한 질문도 분명히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인지 <North country>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대사들은 그냥 넘기기에는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 ; 첫 출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작업 현장을 둘러보러 나가는 여성 광부들을 보며 남성광부1은 나지막이 “창녀들”이라 말하며 지나쳐가고 그를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쳐다보는 조시의 등 뒤로 “귀마개 하세요, 레이디들.”이라 말하는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서 귀마개를 하라는 지시는 본래 작업장의 소음이 크기 때문에 귀를 보호하라는 뜻이지만 이 말은 남성광부의 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창녀들이라고 말하는 남성들의 욕 같은 것에는 그저 귀를 막으라는 조언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뿐 만이 아닙니다. 성희롱적 언사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 여성의 감정은 ‘유머’라는 단어로 정당화되고, 성희롱에 대해 문제제기하려고 할 때 돌아오는 답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입을 닫고 신경 쓰지 말고 더 열심히 일만하면 된다.’ 같은 말. 여성들끼리라도 서로 위로해가며 버텨보고자 하지만 그녀들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주문도 “더 강해져. 남자처럼.”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성폭력의 프레임은 조시의 과거와 삶을 추궁하는 부분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된 조시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문란한 성 생활을 가지는 것 아니냐며 추궁하고 그녀에게 성폭력에 문제제기할 자격이 안 되는 문란한 여성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죠. 또한 회사 측도 한마음 한뜻으로 조시를 ‘원래 헤픈 여자’로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후에 드러나길 조시는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강간당한 것이었습니다만.)
이러한 모든 장면들은 현재와 오버랩 되면서 몇 십 년의 시간이 지나고 여성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발전해도 여전히 견고한 ‘성폭력의 프레임’을 보여줍니다. 작년만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성폭력 사건이 여러 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K대 의대 성폭력사건’을 보면, “왜 여자 혼자 남자 셋과 엠티를 가느냐.”, “그렇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이 문제”라는 말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고, 소송 초기 가해자 측에서는 “피해자는 평소 행실이 문란했다.”는 골자의 설문을 돌려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회에 안착하고 싶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웃어넘길 것, 무뎌질 것, 강해질 것, 그리고 빌미를 주지 말 것과 같은 말들은 여성들에게 익숙한 주문입니다. 더불어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시가 (자신을 때리는) 남편으로부터 독립해서 경제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때나 지금이나 안타까운 엄마들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참, 여전하죠?
<North country>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도.
이 정도면 1984년의 사건을 2000년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보여준 감독의 의도를 조금은 더 알 것 같다고 말해도 될까요? 모든 픽션에 비유와 상징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특정하고 구체적인 어떤 것을 예술로서 추상화시키는 단서이기 때문이죠. 다른 시대, 다른 인물의 삶을 통해 시간이 지나 세상이 많이 변해도 생각보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런 찝찝한 진실을 폭로해버리는 것. 이 영화에 한정시킨다면, ‘North country’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도 존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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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젠가 여기에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Working Girl>(1988)인데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이 영화.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알려진 것과는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지금도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다음을 위해 참겠습니다.
어쨌든 꼭 하고 싶은 한마디, 아무리 야한 옷을 입었어도, 아무리 술에 많이 취했어도 그것이 그녀를 성폭행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여성의 삶이 한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싸워온 여성들의 역사에 경의를 표합니다. 냠냠!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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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마라의 죽음>으로
프랑스 대혁명 디벼보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로마문명이 프랑스지역에 전파된 고대? 골족이 거주하기 시작한 게르만 대이동? 클로비스 왕조? 저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부르봉 왕가? 모두 일견 맞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랑스 혁명을 말할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야말로 현대 프랑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의 기초를 만들어 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역사학계에서는 프랑스의 역사를 시대에 따라 구분할 때 현대의 기점으로 프랑스 혁명을 삼겠는가. (이는 20세기를 현대로 이해하는 다른 나라보다 2세기나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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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루이 자크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급진적 혁명가이자 열렬한 자코뱅 당원이었던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젊은 여성에게 살해당하자, 그의 혁명동지이자 화가였던 다비드가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미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그림을 간단하게 디벼보고, 또 뒤집어보면서 프랑스혁명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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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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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1: 위대한 순교자, 장-폴 마라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마라는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위대한 자코뱅 혁명가였다. 평소 고질적인 피부병에 시달리던 마라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나무상자를 책상 삼아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혁명 신문 <민중의 친구>를 창간해 당대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열심히 퍼뜨리던 마라는 1793년 어느 여름, 자택 욕실에서 한 여성에게 살해당한다. 혁명가 중 한 명으로 마라의 절친한 동지이기도 했던 다비드는 비참히 살해당한 마라의 모습을 위대한 작품으로 남긴다. 공개적으로 진행될 장례 행렬에 쓰일 회화로 만들어진 <마라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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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자신의 혁명동지였던 마라를 위대한 순교자로 묘사하고 싶어했다. 민중을 위해 혁명에 참여했으나 비극적으로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마라. 역사의 진보와 민중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순교자 마라. <마라의 죽음>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마라를 위대한 순교자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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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매우 고요하고 성스러운 공간에 펼쳐진다. 마라의 욕실에는 어떤 장식이나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배경을 뒤로 하고 마라의 머리와 어깨에 비춰지고 있는 빛은 어떤 숭고한 감정을 일으킨다. 잉크병이 놓은 작은 나무상자는 마치 묘비처럼 육중하게 서 있고, ‘마라에게, 다비드가(A Marat, David)’라는 글귀만이 비문처럼 적혀 있다. 오른쪽으로 점점 밝아지는 빛의 묘사는 마치 마라의 죽음 앞에 하늘의 영광이 펼쳐지는 듯 하다. 다비드는 마라를 그리스도적 순교자의 이미지로 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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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른쪽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전면을 향하고 있는 마라의 자세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통하는 ‘피에타’의 예수를 모방하고 있다. 마라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같은 자세로, 온화한 잠에 빠진 듯 종교적 승화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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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예수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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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 2: 마라는 혁명의 순교자인가 - 코르테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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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그림은 마라의 죽음에 대한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마라의 죽음을 재구성한 ‘선전물’에 가깝다. 다비드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마라의 죽음을 순교로 승화시키고 있다. 바로 마라를 살해한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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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욕실에 있던 마라를 죽인 범인은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몰래 품에 숨겨 들어간 15센티미터 가량의 칼로 마라의 갈비뼈 사이를 두 번 찌른 뒤 바닥에 버렸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욕실 밖의 자코뱅 당원들이 몰려 들어와 코르데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말하자면 죽은 마라가 발견된 순간은 작품 속처럼 고요한 상황이 아니라 손에 피가 낭자한 범인이 자코뱅 무리와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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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대체 범인 코르데는 누구였던 것일까? 정신 나간 여자였던가? 아니면 혁명에 반대한 귀족? 왜 인민의 벗을 자처한 마라를 감히 죽이려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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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데는 스물 다섯의 열렬한 지롱드파 여성이었다. 당시 왕정을 전복시킨 혁명파는 집권파인 자코뱅 당과 소수파인 지롱드 당으로 분열돼 있었다. 흔히 자코뱅 당은 급진적인 파로, 지롱드 당은 온건한 파로 알려져 있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자코뱅은 중앙집중적 권력을 추구했고, 지롱드는 지방분권을 선호했다. 자코뱅은 혁명전쟁을 추구했으나 지롱드는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특히 여성의 권리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크게 벌어졌다. 자코뱅 당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민중의 해방을 외치며 발생한 봉기였지만, 자코뱅 당에게 여성의 권리는 중요치 않았다. 지롱드 파였던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패러디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를 발표하며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으나 결국 자코뱅에게 처형당했다.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시작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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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롱드 당원이었던 코르데는 이미 자코뱅에 의해 수많은 동료를 보내야 했다. 자코뱅은 일단 권력을 잡고 나자 모든 정치적 반대를 묵살하고 비판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코르데의 동료들도 마라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터였다. 마라를 없애는 것이 프랑스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은 코르데에게, 마라는 <민중의 친구>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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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데는 체포당할 경우 누구라도 대신 읽어줄 수 있도록 드레스 안에 연설문을 단단히 붙여 두었다. 마라를 ‘프랑스인의 피로 살찌고 있는 야만스러운 짐승’이라고 평가하고 마라 사후 프랑스의 평화를 기원하는 글이었다. 처형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보면 마라는 공포정치를 수행한 탐욕스러운 집권자였고, 오히려 순교의 마음으로 칼을 든 혁명가는 코르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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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를 살해한 직후, 코르데는 경찰과 자코뱅 당원들에게 범행의 경위를 심문받았다. 그러나 자코뱅은 결코 코르데가 스스로 범행을 했을거라고 믿지 않았다. (무지한) 젊은 여성이 혼자서 그토록 대범한 범행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코뱅에게 여성은 정치적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남자 공범이 있을 거라며 코르데를 추궁했지만, 코르데는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사흘 뒤, 코르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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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폴 자크 에메 보드리는 <마라의 죽음>과 같은 장면을 코르데의 입장에서 다시 그린다. 이제 주인공은 혁명가 마라가 아니라, 공포정치를 끝내기 위해 결연히 죽움을 각오했던 여성 혁명가 코르데이다.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영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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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가 그린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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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인트3: 마라의 데스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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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
마지막으로 마라가 손에 든 쪽지에 주목해 보자. 프랑스어를 해석해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얻을 만큼 충분히 비참합니다.” 이 종이는 코르데가 마라를 만나기 위해 사용한 거짓 청원서였다. 코르데는 도움을 청하러 온 불행한 시민으로 가장해 마라를 만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코르데가 마라에게 건낸 원본에는 ‘자비’가 ‘도움’으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비드는 마라를 자비를 베풀려다 순교한 위인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약간의 ‘조작’을 가한 셈이다.) 그러한 청원서를 들고 찾아온 코르데를 마라가 의심 없이 만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실제 초상화. 감옥에 수감된 당시에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코르데가 어떻게 욕실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뒷말이 있다. 마라가 옷을 갖춰 입고 욕실 밖으로 나오는 대신 코르데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코르데는 대단히 용모가 뛰어난 미혼 여성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마라는 조금은 불순한 의도에서 코르데를 욕실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뭉크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코르데가 알몸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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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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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데와 마라는 욕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일설에 따르면 코르데는 시위를 벌였던 지롱드 당원의 이름을 대며 석방을 요구했고, 마라는 이들 이름을 받아적으며 그들이 며칠 안에 단두대에서 처형될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순간 코르데는 품에서 칼을 꺼내 마라의 가슴에 깊이 꽂았던 것이다. 상황을 사실적으로 복원하자면, 마라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는 코르데의 청원서가 아니라 처형자의 명단을 적은 데스노트였다. 마라는, 가려움증을 참으며 욕조에 누워 ‘반혁명분자’의 데스노트를 작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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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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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정신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을 낳았고 전제왕정을 끌어내렸으며 현대적 공화정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참정권은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공포정치로 수많은 죽음을 가져왔다. 마라의 죽음은,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역사적 상황이 교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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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마라의 죽음>은 1793년 10월 16일 루브르의 정원에서 처음 대중에 공개된다.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일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인간의 운명은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았지만,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던 셈이다.
"L'assassinat de Marat", par Jean-Joseph Weerts Rouba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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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3.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갱스 오브 뉴욕>
- 뉴욕은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했는데 약속장소가 그 아이의 동네여서 더욱 떨렸다. 처음 함께 영화를 보았던 곳(아마 <태극기 휘날리며>였지?), 처음 손을 잡았던 곳(땀이 어찌나 나던지), 그 아이의 집 앞 놀이터(내가 비 맞으면서 기다리던 거 기억하니?), 헤어지기 싫었던 버스정류장(버스로 30분 걸리는 중거리연애였지) 같은 곳이 불쑥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건물과 골목들이 그때 그대로였다. 그 아이도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큰 눈, 하얀 얼굴, 청량한 웃음도 그때 그대로였다(몇 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만 빼고는 말이다…). 그것들을 마주하니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던 추억들이 뽀얗게 먼지처럼 일었다. 그렇게 기억이란 다른 이의 얼굴에도, 어떤 장소에도 묻어있는 것이다(여기까지였으면 아름다웠을 걸, 첫사랑 앞에서 술 취해 진상을…하아).
반대로, 어떤 장소와 함께 삶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가 전에 없던 거대한 건물을 보았다. 나는 멍청히 서서 전에는 뭐가 있었는지 떠올리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그러니까 거긴 학창시절 공을 차거나 자전거를 타던 넓은 공터였다. 그곳에 이마트와 영화관이라니. 그 매끈한 외관을 보는데 나는 어쩐지 우울하고 먹먹해졌다. 공터와 함께 나의 추억이, 내 생의 한 시절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시란 사람들의 거대한 기억저장소인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다는 태생적인 특징 때문에 시간을 그대로 담아내는 기억저장소의 역할을 해왔다. 또 배우와 감독에게도 한 편의 영화는 그들의 한 시절이 담겨있는 소중한 것이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뉴욕의 19세기를, 또한 감독과 배우의 한 시절을 그대로 저장하고 있는 영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이라는 경이로운 타이틀을 가진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미소년에서 선 있는 배우로 성장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리고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야심만만한 작품인 바로 <갱스 오브 뉴욕>이다.
일반적으로 뉴욕하면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 패션피플, 노란 택시, 높은 마천루 등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풀썩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 나에게 뉴스에서 끝없이 리플레이 되던 9·11 테러의 광경은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뉴욕은 나에게 그렇게 각인되었다. 그 다음으로 나에게 강력한 뉴욕의 이미지는 <갱스 오브 뉴욕>에서 왔다. 영화를 보고 난 후부터 나는 뉴욕의 쭉 뻗은 골목과 건물을 보면서 어느새 19세기 뉴욕의 질척이는 골목과 개미굴 같은 지하세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만큼 <갱스 오브 뉴욕>은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는 영화이다.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자손으로 뉴욕에서 자랐다. 그는 언젠가 친구의 집에서 본 19C 뉴욕의 갱들에 대한 소설을 읽고 완전히 반해버렸고 이를 영화로 만들고자 결심한다. <갱스 오브 뉴욕>은 그가 30년간 묵혀둔 이야기로, 말하자면 필생의 작품이다(혹은 첫사랑). 그러나 공공연하게 뉴욕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던 마틴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뉴욕은 매끈하고 화려한 미국 자존주의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피와 야만으로 질척이는 아수라장이며 비열한 거리이다. 표면적인 뉴욕의 모습만이 아니라 질곡의 역사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껴안는 그의 영화를 보면 뉴욕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느껴진다. 이러한 그의 야심과 애정 때문에 영화는 19C 뉴욕의 건물, 거리, 의상, 관습, 작은 소품들까지 그대로 고증한다. 그 자체로 19C 뉴욕의 기억저장소인 셈이다.
도살자 빌 역할을 맡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1997년 <더 복서>를 끝으로 이탈리아에서 구두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이후 5년만의 복귀작이 <갱스 오브 뉴욕>이었고,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매순간 탄성을 부른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만난 그에게도 <갱스 오브 뉴욕>은 남다른 한 시절이 담긴 영화였을 것이다. 그의 존재감은 뉴욕이라는 배경과 함께 영화의 가장 큰 부분이 된다.
암스테르담 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도 <갱스 오브 뉴욕>은 특별했다. 16살에 이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갱스 오브 뉴욕>을 기획중이라는 얘길 들었던 그는 작품에 참여하고자 에이전트를 바꾸기까지 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주연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감독뿐 아니라 배우들에게도 영화와 만나기까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인지 영화는 그야말로 세 남자의 야망과 열정이 부딪히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영화는 때때로 미끄러지고 엇나간 느낌을 주기도 한다(마치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 앞에서 추억과 의욕에 젖어 진상을 피워버린 나처럼).
1846년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에서 뉴욕 토박이들과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전투를 벌인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버지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은 아일랜드 이주민의 수장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아버지는 아들의 눈앞에서 뉴욕토박이의 우두머리인 도살자 빌 더 부처(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암스테르담은 16년간 소년원에 감금되었다 돌아온다. 그동안 파이브 포인츠의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세력을 잃고, 타협과 복종과 배신으로 각자 나름의 살 방도를 찾아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복수(도살자 빌을 암살하는 것)를 위해 도살자 빌의 수하로 들어가고 신임을 받게 된다. 하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모든 것이 들통 나게 되고, 결국 뉴욕토박이 세력과 아일랜드계 이주민 세력 간의 목숨을 건 전투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된다.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영화의 큰 스토리는 고전적인 복수극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스토리는 조금 촌스럽고 단편적이다. 또 암스테르담이 복수를 단행하려는 순간은 동료의 배신으로 너무도 허무하게 무력화되고, 마지막 클라이막스 전투장면은 정부군의 저지로 안개 속에서 엉망진창이 되며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방해한다. 때문에 개인의 복수서사에서 쾌감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찜찜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분명 감독의 연출력 미흡이 아닌 미학적 선택이다. 그렇기에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갱들'인가 '뉴욕'인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19세기 뉴욕의 전경이 나올 때만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앵글이 고정되고 시간이 흐르며 뉴욕의 실루엣에 하나 둘 높은 건물들이 더해지고 다리가 놓아지고, 다시 더 높은 건물들이 세워지는 모습을 보면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갱스 오브 뉴욕>의 주인공은 '갱들'이 아니라 '뉴욕'이었다는 것을(혹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무덤들에게 받치는 영화임을). 그러니 개인의 서사는 무력화되고 도시는 이를 삼켜버린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암스테르담은 어떻게 복수를 했는가가 아니라 뉴욕은 어떻게 지금의 뉴욕이 되었는가인 것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단편소설 <크랴샤>는 도시에서 결국엔 스러져가는 사람들과 반면에 무너지고 사라져도 또 다시 세워지는 건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나는 공터 위에 세워진 이마트를 보며 이 문장을 되뇌었고 문득 처연해졌다. 누가 그 시절을 기억이나 할까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암스테르담은 말한다. '인간은 뼈와 피와 시련을 안고 태어난다 하셨던 아버지의 말처럼 당시의 뉴욕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러나 분노의 시대를 관통하며 쓰러져간 우리들에게 그것은 도도한 물살에 씻겨간 소중한 그 무엇과도 같았다. 후세들이 뉴욕을 재건하기 위하여 뭘 했건 우리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어쩌면 도시는 우리의 피와 뼈와 기억을 먹고사는 괴물인지도 모른다. <갱스 오브 뉴욕>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뉴욕은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물론, 영화도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P.S. 깜빡했는데, 이 영화는 분명 카메론 디아즈가 가장 예쁘게 나온 영화 중 하나이다.
※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링컨> 3월 14일 개봉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장고 : 분노의 추적자> 3월 21일 개봉(심지어 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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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편혜영 단편집 『저녁의 구애』(문학과 지성사, 2011)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일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섬뜩함
‘기괴함’과 ‘섬뜩함’에 대한 논의로 글을 시작해보자. 국어사전을 보면 ‘기괴하다’는 ‘외관이나 분위기가 괴상하고 기이하다’이고, ‘섬뜩하다’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하다’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갑자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견해를 가장한 프로이트의 견해이다.
프로이트는 1919년에 <섬뜩함Das Unheimliche>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기괴함’으로부터 ‘섬뜩함’을 구별해내었다. 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섬뜩함이란 친숙했던 어떤 것이 억압의 과정을 통해 멀어졌다가 갑자기 자신의 삶 앞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보는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의 기괴함과는 전혀 다른 단어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는 예로 간질과 정신착란이 발생할 때나 분리된 신체의 한부분이 움직일 때를 든다. 친숙했던 것 -평상시 모습의 간질 환자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팔- 이 갑작스레 낯선 모습 -발작을 일으키는 간질 환자나 몸에서 분리되어 혼자 움직이는 팔- 으로 다가올 때 섬뜩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편혜영, 저녁의 구애 앞 표지 (출처 : 알라딘)
편혜영의 단편 「저녁의 구애」는 섬뜩함이 드러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그동안 편혜영 소설들이 주로 ‘기괴함’을 다루었다면, 이번 『저녁의 구애』에 실린 단편들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섬뜩함을 그려냈다.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소설 「저녁의 구애」에서 섬뜩함을 자아내는 대상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죽음이다.
주인공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 곁에 놓여있다. 대강의 큰 줄거리는 이러하다. 꽃집을 운영하는 김은 예전에 자주 찾아뵙던 어르신이 곧 돌아가신다는 소식과 함께 장례식 화환을 부탁받는다. 화환을 싣고 380킬로나 떨어진 장례식에 도착했으나, 어르신이 아직 돌아가시지 않아 장례식장 근처에서 어르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김의 곁을 지나가던 트럭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목격한다.
김에게 죽음이란 자신이 대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일이었다. ‘그에게 탄생은 지나간 일이었고 소멸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48) 이러한 그의 관점은 지진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김에게 지진은 먼 땅 어딘가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전쟁 얘기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피해를 안긴 다른 나라의 쓰나미나 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있다는 얘기와도 같았다.(51) 지진 대신 죽음을 집어넣는 데도 그의 생각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죽음이 돌연 섬뜩한 것으로 변한다. 그것은 마라토너의 환영을 통해 시작되어 트럭의 사고로 확실시 된다. 마라토너가 보여주는 극한의 상황과 트럭이 가드레일에 부딪혀 조등처럼 활활 타오르는 장면들을 통해, 죽음은 다른 사람의 문제라는 익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라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깜짝 놀라 휴대전화를 꺼내 방금 전에 그만 만나자했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제야 다시 소설의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저녁의 구애.
섬뜩하게 돌아온 죽음을 마주했을 때, 그는 왜 구애를 했을까? 물론 소설 속의 그 자신도 모르며, 충동적으로 한 구애를 후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조심스레 추측해보자면, 익숙했던 죽음이 낯설게 돌아오면서 익숙하게 생각했던 사랑도 낯선 모습으로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귀찮은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운명 앞에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최선의 보호막이라는 것을 느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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