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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25 6. 완전함을 향한 우리의 시선, [완전한 항해]
- 2013.04.24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2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차이를 중심으로 1
- 2013.04.21 [독서에세이]『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 후안 룰포 1
- 2013.04.18 [룽의EX] 현빈, 탕웨이의 <만추> - 사랑은 충돌의 몽타주 4
- 2013.04.16 [토니 다키타니] 고독: ‘孤(외로울 고)’와 ‘獨(홀로 독)’의 만남 2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완전함을 향한 우리의 시선
완전한 항해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게 거울을 만들고, 또 볼 수 있는 존재라고들 하지요. 혹자는 거울을 인간의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기도 하구요. 인간만이 거울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좌우가 바뀐 상일지언정, 거울에 비친 상이 이 세계에 속한 자아의 모습임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죠. 당신은 어떤지요. 자주 거울을 보나요? 거울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나요? 젊거나 늙은, 크거나 작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때로 낯설지는 않은가요?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은, 때로는 너무나도 당연하면서 때로는 너무나도 잔인한 진실이죠.
세상을 살아가면서 처음부터 마음에 꼭 드는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누구나 거울 속 자신이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테지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몸매, 머리 등등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완벽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만일, 마치 성형을 하듯 우리 자아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요? 모자란 부분을 메꾸고 부족한 부분을 버리고, 그렇게 자아를 바꾸어가다보면 언젠가 우리는 영원히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행복할까요?
오늘은 이러한 상상으로부터 뻗어나온 윤이형 작가의 한 SF소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윤이형 작가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자면, 꾸준히 과학소설을 발표하면서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법칙까지 모두 치밀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인물들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작품 속에서 줄곧 드러내왔던 작가랍니다. 과학적 세계관의 탄탄한 완성도는 물론이고, 밀도 있는 플롯과 구성 또한 돋보이는데요. 그동안 한국순수문학계에서 도외시되었던 SF분야에서는 드물게 200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이름을 올리면서 주목받기도 했지요. 완전성에 대한 담론을 SF적 세계관 위에 굳건히 구축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 <완전한 항해>를 만나보아요.
튜닝 : 자아를 성형하다
이 소설 <완전한 항해>는, 양자역학적 평행우주론을 바탕으로 다원우주에 존재하는 동일 자아의 유전형질을 교류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다른 우주들의 자아를 지우고 그로부터 재능과 잠재력을 흡수하여 모든 것을 이룬 창연과, 살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고 통보받은 창연의 또다른 동일자아, 희귀종족의 일원인 창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되지요.
창연은 마치 튜닝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각각의 에디션이 가지고 있었을 성격적 · 정신적 결함들은 창연과 조우하면서 마치 부끄러워 앞에 나설 수 없다고 판단하기라도 한 듯 수많은 장점들 뒤로 숨어버렸다. 창연 자신도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창연의 삶이 완벽하다고 입을 모았다. 더 이상 완전할 수는 없다고 했고, 운명의 질투 때문에 그녀가 요절할까 두렵다고 몇 번이나 애정 어린 걱정을 쏟기도 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창연은 만족하지 못했다. 창연의 삶은 거대하고 풍성했다. 즐거웠지만 피곤했고, 피곤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벌써 쉰이었는데 아직도 부족한 게 많았다. 미지의 가능성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창연은 시간의 속도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
창연은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은하에 아무리 많은 갈래 세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아닌 자신의 또다른 자아라니. 게다가 엄지손톱보다 작고, 엄청나게 빠른 괴물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돌연변이 종족이라니.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칭송받는 창연은 쉰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자신의 생일선물로 쉰 번째 자아의 튜닝을 원합니다. 이 세계의 튜닝이란, 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동일한 자아형의 존재들을 흡수하여 자아를 개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쌍꺼풀 수술을 하고 콧대를 세우는 것처럼 자아를 ‘성형’하는 거에요. 또다른 튜닝으로 새롭게 거듭날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던 창연에게, 튜닝을 의뢰받은 에이전시는 뜻밖의 이야기들을 전달합니다. 이전의 마흔 아홉 번의 자아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인 희귀종족의 일원 ‘창’이 그녀의 쉰 번째 에디션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를 흡수하는 것이 그녀에겐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 될지도 모른다고요. 예상 밖의 상황에 창연은 당혹스러워합니다.
몇 초밖에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창은 루의 겹눈 너머로 저희들끼리 제멋대로 뒤섞이며 부딪치는 세계의 파편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여느 때처럼 아주 빠르게 부서져내렸지만 아름답지 않았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
루의 겹눈에 비친 세계는 조그만 육각형이었다. 모서리를 서로 맞댄 채 한없이 이어져 있는 작은 육각형들의 연속체. 그나마 그 형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느리게 날 수 있을 때뿐이었다. 속도를 높이면 세계는 굉음을 내며 먼지보다 작은 입자들로 부서져 내렸다. (……) 넌 너무 빨라, 창. 하노는 자주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 그렇게 빨리 날면서 네가 보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속도가 만들어낸 허상이야.
뒤이어 등장하는 창연의 동일자아 '창'을 소개하기에 앞서, 창이 속한 종족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네요. 창이 속해있는 종족의 이름은 루족입니다. 한때 그들만의 동굴에서 영생을 영위하며 살았던 그들은 운명을 배반하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전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인간들의 거대한 도시에서 연명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과거를 연결짓는 것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유기체 비행선, 루뿐이지요. 거대한 눈송이와 빗방울, 어린아이의 손과 벌레 같은 것들이 날마다 그들 종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그들의 개체수는 나날이 줄어들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그다지 멀리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창은 튜닝 에이전시의 세일러로부터 자신의 죽음이 일주일 후에 예정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불어 튜닝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제안받지요. 창은 그들 종족의 독특한 비행선인 ‘루’를 타고 도시의 창공을 선회하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겹눈으로 되어 있는 루의 차창 속에서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육각형의 입자로 산산이 부서져내리는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삶이 빠르게 소모되어 갑니다. 창의 삶이 루의 빠른 속도만큼이나 위태롭고 파편화되어있듯, 부서지는 세상의 풍경은 그녀에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의 길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이고, 동시에 마흔 아홉 명의 에디션들이 군말없이 창연의 자아에 흡수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루의 겹눈에 투영되는 세상의 풍경처럼 그녀의 삶이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것. 그녀가 보는 것들은 속도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 뿐이며, 자신의 삶도 그처럼 한순간에 시들게 되리라는 것.
우주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던져진 삶
여섯 개의 모서리를 지닌 파도가 루를 덮칠 듯 아주 가까이에서 일렁였다. 크고, 알 수 없는, 것들. 창의 두려움 사이로 적대감인지 오기인지 모를 희미하고 가느다란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하노라면 더 가까이 다가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창은 한계라고 생각되는 순간 루를 믿어 수직 상승시킨 다음 하늘 높이 올라갔다. 달 쪽을 향하자 수백 개의 어슴푸레한 은빛 조각들이 루의 망막에 맺혔다. ‘더 빨리.’ 창은 점점 빨라지는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해 루를 믿었다. 너무 빠르게 날면 온몸이 산산조각 나 죽게 될 거라고 하노는 말했다. 하지만 창은 아직 달처럼 먼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달은 창이 아무리 열심히 날아도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둥근 덩어리였다. (……) 하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동안에도 달과 별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창은 생각했다. 내가 빨리 난다면. 더 빨리 난다면.
일주일의 시간만을 선고받은 창은 고민합니다. 동굴 안에서 몇 번이고 생명을 되돌려주던 루의 전설은 이제 옛날이야기이고, 한둘씩 죽어가는 동료들을 그녀는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음은 그녀 앞에 와 있지요. 문자가 없는 그들에겐 그들 하나하나의 삶이 스러져가는 책이며 상실된 역사입니다. 영원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찰나의 삶이, 우주로부터 그들이 허락받은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을 절망스럽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늘을 꿈꿉니다. 비록 문자로는 옮길 수 없으나, 또 다른 의미에서 다른 어떤 문자로도 옮길 수 없는 기쁨과 희열과 삶의 찬란한 순간을 그녀는 오롯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루를 타던 순간, 허공을 가르며 궤적이 그려지는 모습을 처음 보던 때를. 그것은 그녀가 아닌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제아무리 부유하고 완벽하다 칭송받는 창연이라도.
만약 세일러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고 다른 세계, 여기보다 근사한 세계로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끝나지 않고 더 완전하게 이어지는 삶이 어딘가에 있다면- 글쎄, 지금까지는 자신만큼 완전한 다른 에디션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조금 망설일 것 같긴 했다.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이긴 했지만, 어쩐지 자신의 남편과 친구들, 그리고 자신을 아끼고 좋아해주는 다른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 같았다. 내가 이 세계에 남아 죽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창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한편, 세일러에게 설명을 들으면서 창연 역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녀는 튜닝을 통해 자신에 흡수된 사람들의 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에디션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장점들을 드러내며 그녀의 삶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그들 생에의 염증과 보다 완벽한 다른 생에의 갈망이 깊었음을 반증해줍니다. 창연이 비록 태생적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물려받은 부와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을 결합하여 자아를 튜닝하면서 삶의 지도를 끊임없이 변경해 나갔으니까요. 한국에서 여섯 번째, 아시아에서 열일곱 번째로 큰 부를 거머쥐고 손대는 어떤 사업마다 성공을 거두며 각 분야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사는 그녀. 지도 속에서 그녀의 영토는 방대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창연은 자신이 갖지 못한 아주 작은 영토에도 욕심이 생깁니다. 청춘을 싱겁고 미지근하게 보낸 그녀에겐 창의 통통 튀는 젊음과 열정이 무척이나 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그녀를 잘 들여다보면, 갖지 못한 영역들에 대한 그녀의 욕망이 그녀가 그간 흡수해 온 다른 자아들의 갈망과 무척이나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완전을 향해 나아가도, 자신의 뜨락을 넓히고 경계선을 뒤로 물려도, 짧은 생 안에서 그녀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 거울 속에서 바뀌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그녀는 오래 전부터 그녀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아닙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녀 자신의 모습에선 어느덧 원래의 창연, ‘창연’이라는 이름 자체로 완전했던 하나의 자아는 마흔 아홉 개의 콜라주된 자아들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창이라면, 녹차라떼가 아니라 체리 향이 든 탄산음료를 마시자고 할지도 몰랐다. 아주 낯선 것을 해보라고 말을 걸어올 수도 있었다. 창연의 하루를 뒤흔들고 미친 듯 웃거나 혼이 빠져나갈 것처럼 울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자신 안으로 들어온다면, 새롭게 알아야 할 것들과 배워서 자신의 것들로 만들어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할 때마다 찾아오던, 위장이 짓눌리는 듯한 그 기분을 잠시 잊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아내는 것 같은 다급함,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여전히 부족한 인간일 거라는 강박에서 아주 잠깐 해방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상태는 면적을 끊임없이 넓혀 가는 부채꼴과 비슷합니다. 그녀가 아무리 원의 반지름을 늘려 가며 넓은 면적으로 나아가도 원 속에서 그녀가 취하는 각도는 그대로이며, 부채꼴이 커지는 만큼 그녀가 갖지 못하는 나머지 원의 면적 역시 커질 뿐입니다. 그를 부정하려고 무던히 애써 왔으나 점점 그 강박에 종속되고 휘둘리는 그녀. 어쩌면 처음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르지요.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를.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저 우주의 무한성과 영원성에는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녀 역시 창과 다르지 않게, 다른 누구와도 다르지 않게 우주로부터 내던져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 세계가 바라보는 나
가까이에서 바라본 눈송이들은 무수한 육각형 결정들의 통합체였다. 루의 작고 수많은 겹눈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모양이었다. 루의 날개를 적셔 창을 아래로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들 역시 녹아버리는 연약한 결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이 달에서 떨어져나온 알갱이라면, 달처럼 거대하고 멀리 있는 존재 역시 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창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세계를 천천히 들여다본 적도, 온전히 이해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창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과 한몸이 된 루가 사방에서 덮쳐 오는 거대한 얼음조각들을 피해 날아갈 수 있을 만큼은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세계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세계에는 루가 없었다.
결국 창은 다른 자아에 흡수되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튜닝시스템의 예상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항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튜닝시스템이 그녀가 눈에 파묻혀 동사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창공을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속도로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온전하게 부서지지요.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의 모습처럼. 그럼으로써 창은, 창연과 튜닝 시스템이 아마 결코 가닿지 못할, 그들이 수렴할 수조차 없을 완전성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의 한계에 좌절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원망하며 전혀 다른 세계와 자아를 그리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스스로에게 남아있는 것들에서 변모의 가능성을 발견하곤 합니다. 창이 루 안에서 보는 파편화된 세계가 자신의 세계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창을 둘러싼 온 우주 역시 거울을 들여다보듯 같은 시선으로 창을 바라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우리는 깨닫습니다. 온 우주를 비틀고 뒤집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변화에 있음을요. 그렇게 해서 우주와 마주하던 시선은 곡선의 궤도를 돌아 다시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은 한계와, 그 한계가 함축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 전체를 비틀 만한 질문들을 말이죠.
당신이 지금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거울 너머 있는 자신의 시선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하고 온전하게 자신의 것임을 느껴보길 바랄게요. 그것이 당신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자, 세계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임을 알 수 있나요?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이 거기에서 시작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나요? 이 글자들이 제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면서 당신이 제게 건네는 이야기라는 걸 말이에요.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당신 그 자체로서 온전하길.
좋은 하루 되어요.
은하 속 수많은 갈래 세계들 가운데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한 작은 갈래 세계에서, 2월의 어느 수요일 밤 열시 사십일 분, 루족 비행사 창의 삶은 예정대로 끝났다. 그러나 시스템이 예언한 것처럼 그녀가 눈에 파묻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창의 루는 쏟아지는 눈송이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속도를 높여 계속 날아올랐고, 대기권을 벗어나면서 새빨간 불꽃으로 변해 타올랐다.
루족에게 문자가 있어 의미를 기록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루족 역사상 달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 그리고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날았던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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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2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차이를 중심으로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http://seesunblog.tistory.com/3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글의 편의상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하녀>(1960)/원작으로,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하녀>(2010)/후작으로 표기했습니다.
<하녀>(2010)가 ‘리메이크’가 아닌 이유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를 비교하며 어떤 것들이 명확히 반복되는지 살펴보았던 지난 글(http://seesunblog.tistory.com/31)의 서두에서 밝혔듯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를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의 리메이크로 보는 것은 엄밀하지 못한 해석이다. 이전에 제작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제작하는 것을 뜻하는 리메이크는 대체로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며,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만약 <하녀>(2010)가 리메이크라면 오로지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재현하는 것에 몰두하지, 이렇게 ‘다른’ 영화로 재탄생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영화를 마주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원작이 되는 <하녀>(1960)의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후작 <하녀>(2010)의 운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얼마나 다른지’, 즉 원작과의 차이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무엇이 그렇게 다른지 조목조목 따져보자.
차이 : 재해석의 근거
먼저 두 작품 모두 갈등의 계기가 하녀와 주인 남자의 불륜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녀>(2010)에서는 하녀가 유혹하지 않고 주인 남자가 먼저 접근하고 이에 하녀가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설정으로 변형된다. 무엇보다 원작에서처럼 하녀가 주인 부부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파국적 상황은 하녀가 감당할 몫이 되어 원작의 주인남자와 하녀의 동반자살은 후작에서 하녀만의 자살로 대체된다. 전작에서는 힘들게 쌓아온 중산층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하녀의 위협과 요구들을 주인부부가 받아주는 것에 반해 후작에서는 하녀의 존재가 최상층 재벌의 가정을 동요시킬 위협이 전혀 되지 않고, 후작의 하녀는 다른 이를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수를 실행한다. 50년 새 더욱 벌어진 사회적/계급적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다. |
➀배경의 변화
<하녀>(1960)의 배경이 되는 주인 가정은 주인 여자가 밤낮으로 재봉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부의 상징인 2층집을 짓고 만족하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으로 설정된다. 반면 <하녀>(2010)의 배경이 되는 주인 가정은 한국 사회의 최상층에 속하는 재벌가로, 사실상 식모나 하녀의 개념이 사라진 2010년대에 입주 하녀를 두고 생활할 수 있는 계층이다. 이들은 정원이 딸리고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대저택에서 저녁마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주말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 집안사람들의 특기이다. 이러한 배경의 변화는 하녀가 주인을 상대로 어떤 욕망-신분 상승이나 주인 남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큰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며 <하녀>(2010)를 <하녀>(1960)와 구별되게 하는 전반적인 전환을 발생시키는 중심 설정이 된다.
➁새로운 인물의 등장 : 병식(윤여정 분)
<하녀>(1960)에서 중심 인물 구도는 [주인 여자-주인 남자-하녀]로 이는 <하녀>(2010)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대신 <하녀>(2010)에서는 [주인 여자-주인 남자-하녀]의 구도에 하녀장 병식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추가된다. 병식의 추가로 인해 <하녀>(1960)의 전형적인 삼각관계(정심-동식-명숙)구도가 <하녀>(2010)에서는 계급 관계(훈-해라・장모-병식-은이)의 수직적 구도로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계급격차와 병식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발흥 및 증가라는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다.
새로운 인물 병식은 대저택을 총관리하는 하녀의 수장으로 수십 년째 하녀로 일하며 주인 가족의 신임을 얻고 아들을 검사로 키워낸다. 스스로 뼛속까지 하녀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병식은 어느 정도 안정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최상층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인물로서, <하녀>(2010)의 갈등 전개에서 하녀 은이의 행동을 염탐하고 은이의 임신 사실을 제일 먼저 헤라의 엄마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주인 가족의 심복으로 역할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나름의 대우도 받지만 결국에는 천대받는 하녀의 신분일 뿐인 1 병식의 복합적인 위치는 <하녀>(2010)에서 새롭게 설정된 수직적 구도를 드러내는 데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더불어 병식의 심경 및 행동의 변화도 극 전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주인 식구와 하녀 은이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병식은 주인 식구가 은이에게 행하는 비인간적인 행동들을 보며 분노하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은이의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병식의 감정은 단계적으로 고조(해라가 은이의 뺨을 때릴 때 시선 외면 → 은이가 하혈할 때 안쓰러운 눈빛 → 은이의 중절 수술 지켜보며 눈물)되고, 병식이 은이에게 눈물로 사과할 때 은이는 주인 식구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 것에 분노하며 병식의 뺨을 때린다. 후에 복수를 위해 저택에 돌아온 은이가 병식과 포옹하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같은 처지임을 인식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병식은 은이의 복수를 잠깐 말리지만 (중간 계급답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결코 자신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➂주인 남자의 위상 변화
<하녀>(1960)의 주인 남자의 권위가 사회적, 전통적으로 부여된 관념적인 것이라면 <하녀>(2010)의 주인 남자의 권위는 절대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부여된 실질적인 권력이다. <하녀>(1960)의 주인 남자 동식은 공장의 여공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 선생으로 경제적 소득이 뚜렷하지 않고 집안 경제를 담당하고 일으켜 세운 것은 부인 정심의 재봉 일이다. 극중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동식의 위치는 그가 애처가로 그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실질적 권력의 부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식에게 주어진 권력의 근원은 오로지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부여된, 비교적 실체가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반면 <하녀>(2010)의 주인 남자 훈의 경우 재벌 2세로서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극중 세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등장인물의 추가(병식) 및 변형(남매→외동딸)으로 인해 주인 남자 훈은 저택의 유일한 남성으로 군림한다. 훈의 절대적인 권력은 불륜의 책임을 훈에게 묻지 못한 채 그 아래에 위치하는 여성들끼리 고군분투하며 그들만의 세계에서 갈등을 빚는 상황을 초래한다. 심지어 가족 관계의 서열상으로는 훈의 윗사람인 장모도 훈의 실질적 권력 앞에서는 약자로 위치지어진다. 이와 같은 권력 관계는 은이의 임신 및 유산 사실을 알게 된 훈이 장모를 추궁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훈 : “누가 감히 내 애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누가, 감히.”
“이봐요, 당신(장모) 딸이 낳아야만 내 애인 것 같습니까?”
장모 : (고개 숙이며) “아니지, 아니야.”
이런 저런 변명들로 추궁을 피해가려는 장모에게 훈은 “장모님, 질문은 제가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카메라는 대화 장면 내내 장모는 하이앵글(카메라가 위에서 내려 보는 구도)로 훈은 로우앵글(카메라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 주로 인물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낼 때 사용된다.)로 잡음으로써 권력의 상하관계를 표현한다.
훈 : (해라 때문에 생긴 입술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이 개 같은 년 어딜 감히.”
또한 훈은 부인과 자녀에게 친절한 가장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행동일 뿐, 부인의 임신으로 성욕을 충족시키기 어렵게 되자 하녀 은이에게 접근해 취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겉보기엔 훈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인 해라도 부족함 없이 자란 상류층이기 때문에 훈의 외도에 분노하고 용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분노는 만만한 상대인 하녀 은이에 대한 폭력으로 직접 표출(해라의 엄마 역시 은이에 대한 폭력에만 통쾌함을 느낄 뿐, 사위의 노골적인 무시와 하대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되고 훈에게는 입술을 깨물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소심한 복수에 그친다. 절대적인 권력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훈과 대결하지 않고 묵인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라의 내적 갈등과 행동의 부조리함은 해라가 페미니즘 서적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읽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한편 훈이 은이에게 접근해 은이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도 은이의 표정이 아닌 훈의 손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인과 하녀라는 주종관계와 결부된 남녀 관계에서도 훈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훈의 유혹에 은이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응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원작에서 하녀의 유혹으로 불륜이 성립되었다면 후작에서는 주인 남자의 접근으로 바뀌었음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➃하녀의 성격 변화
명숙 : “뭐라도 첩이 됐으니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하녀>(1960))
은이 : “저 남한테 해코지 못해요. 돈도 필요 없고….” (<하녀>(2010))
원작의 하녀 명숙은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과 주인 남자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반면 후작의 하녀 은이는 무언가를 더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원래 없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거니와, 그런 욕심을 품기에는 너무 큰 경제적 계급적 차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훈과 불륜의 관계가 생긴 뒤 화장도 진하게 하고 이성으로 기대도 가졌으나 훈이 자신에게 수표를 건네주는 행동에서 자신을 한 명의 여자가 아닌 단지 성욕 해소의 도구로 대했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일말의 기대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주인 남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와 물욕이 없고 아이를 좋아하며 맹하다 싶을 만큼 순수한 은이의 성격은 원작과의 차이를 생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이로써 영화는 욕망이 빚어낸 파국적 치정 관계에서 인간성마저 제거할 정도의 계급 차이 인식으로 초점을 한껏 옮겨간다.
또한 후작은 하녀의 복수심과 광기에 설득력을 주기 위해 아이를 좋아하는 은이의 성격을 드러내는 복선들을 추가한다. 주인 부부의 딸 나미를 귀여워하고 나미 같은 딸을 낳고 싶다고 말하고, 해라의 만삭의 배를 마사지 해주면서 뱃속의 아기들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 장면과 은이가 나미에게 동화를 읽어줄 때 그 내용이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이를 되찾기 위해 시련을 겪는다는 설정 등이 복선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하녀가 아이에 집착하고 엄청난 복수심과 광기에 휩싸이게 되는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써 원작이 하녀의 광기를 하녀 개인의 특이한(조금은 괴기스러운) 성격 탓으로 돌려 전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➄새로운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장면들의 추가
지금까지 열거된 차이들의 목표는 주제의식의 전환, 새로운 메시지의 강조이다. 원작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연출되는 하녀의 광기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후작은 하녀가 광기를 표출하게 되는 결과에 대한 개연성-계급과 구조의 문제-을 부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한다. 기존의 <하녀>(1960)에 계급 문제의 시각을 새로이 적용한 <하녀>(2010)에서는 새롭게 부가된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장면과 대사들을 추가했다.
일단 주인 가족과 하녀 사이의 계급적 격차, 즉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과 장치들은 기본적인 설정이다. 주인 가족은 정문을 사용하고 하녀들은 다른 쪽 출입문을 사용한다. 식사 시간과 공간이 다른 것은 기본이며, 겨울 산의 야외 온천에서 주인 가족이 실내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하녀 은이는 수건을 덮은 채 야외에서 기다리다가 주인 부부의 딸 나미의 수영을 돕는다. 주인 가족은 하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비교적 친절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친절한 대우조차 진심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높이기 위한 위선적인 면모로 그려진다.
은이 : (훈이 병식을)“여사님이라고 불러요?”
병식 : “지 기분 내킬 때만 그래.”
해라 : “나 아줌마한테 인간적으로 대해줬다고 생각해요, 친절하게. 아니야?”
주인 가족과 하녀의 권력 차이는 하녀 은이가 자신의 몸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은이 : “지들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내 뱃속에 있는 애기를.”
해라 : “시간은 좀 주겠지만, 그래봤자 아줌마 뜻대로 절대로 안 돼요~”
훈 : “서은이씨, 낳읍시다, 우리.”
은이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없애기 위해 장모는 은이를 2층에서 떨어뜨리고 해라는 은이의 한약에 몰래 유산을 유도하는 약을 섞는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권한은 은이가 아닌 훈에게 있고 훈이 아이의 출산을 ‘허락’하는 구도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새롭게 추가된 인물 병식은 새로운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설정이므로 병식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차별과 억압에 대한 굴욕감도 새로운 상징의 추가로 연결된다.
병식 :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겪어야 할 일들이 딱 떠오르면서 신경질이 콱 하고 돋지. 그치만 뭐 어쩌겠어. … 아더메치한 짓이야 이게.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고.”
병식 : (주인 가족이 나가자 만세 포즈를 취하며) “해방이다!”
해라에게 무시를 당한 밤 병식은 술에 취해 연신 “아더메치”를 외친다. 그리고 출산을 위해 주인 가족이 모두 집을 비우자 “해방이다!”를 외치는 병식의 모습 뒤로는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벽에 붙어있는 프랑스의 삼색기가 보인다.
의사1 : (밖의 병식을 가리키며) “밖에 저 여자는 누구야? 보호자 아니야?”
의사2 : “아니야, 아무도 아니야.”
은이의 중절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로부터 “아무도 아니”라고 가리켜지는 병식의 위치는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생각되다가도 결국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하녀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➅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
<하녀>(2010)가 공개된 후 관객과 전문가들의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관심사는 바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였다.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진 오프닝 시퀀스는 분주한 시장 거리의 가운데에서 투신자살을 한 여자와 죽은 여자의 흔적 주위를 서성거리는 은이를 보여준다. 여자가 추락해 죽은 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금방 흩어지고 죽은 여자의 흔적 위로 다시 숱한 전단지가 뿌려진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은이의 관심은 생명조차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취급하는, 은이가 죽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주인 가족의 모습과 겹쳐진다.
은이 : “나미야, 아줌마 꼭 기억해 줘야 돼.” (밧줄을 목에 감은 채로 뛰어내린다.)
은이가 복수의 방식으로 택한 것은 자신의 몸을 불로 태우는 분신자살이다. 자신이 건드릴 수조차 없을 만큼 강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주인 가족의 눈앞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죽음의 형태인 분신자살을 행함으로써 강렬한 트라우마 2를 선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분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강한 충격을 전달할 수단으로 택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의 예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과 분신의 사회적 함의를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영화 <하녀>, 반복과 차이를 함께 가지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2010)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큰 틀에서 같지만, 전체적으로 다르다. 분명히 기본 설정을 수용하여 비슷한 스토리로 흘러가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얻게 되는 메시지는 꽤나 다르다. 단순히 배우와 시대적/공간적 배경의 차이가 아닌 주제의식의 변화. 이것이 바로 2010년 작 하녀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하녀>(1960)와 <하녀>(2010)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무엇인가? 어쩌다보니 3부작까지 이어지게 된, 다음 글에서 정리해보겠다. 기대하시랏 냠냠!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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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특별히 독서 에세이의 형식으로 씁니다. 다음 주에는 다시 김근근의 가이드로 돌아옵니다.
벚꽃이 있음을 안다
: 후안 룰포, 『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독서 에세이
올해도 꽃놀이를 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비가 왔으니 내일이면 꽃놀이도 끝나있겠다. 시간이 없었던 탓은 아니다. 바쁘게 사는 듯 보여도 짜투리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관악산 천지가 꽃밭이니, 친구 잠깐 불러내 산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차라리 마음의 문제일까. 아무리 시간적 여유가 많아도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면 꽃놀이는 사치처럼 느껴지고 만다. 조급한 삶을 갖게 된지 벌써 일 년이 조금 넘었다.
한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좋다. 벚꽃, 살구꽃, 복숭아꽃……. 짧게 폈다가 이내 지고 마는 꽃들이다. 바로 그 잠깐이 아니면 일 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꽃을 놓치지 말고 마음에 꼭꼭 눌러 담아야 하는데, 왠일인지 그 1~2주의 시간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지나간다. 작년엔 지는 꽃이 아쉬워 밤중에 드라이브를 나선 적도 있었다. 밤벚꽃이라는 단어도 있다지만, 가로등에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만 잔뜩 찍고 돌아왔다. 내려오던 길에 다음해에는 꼭 꽃놀이를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오늘이었다.
느닷없이 안겨 드는 졸음과 환영 속으로 빠져 드는 이 순간까지, 나는 내 어머니의 남편인 뻬드로 빠라모라는 사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꼬말라에 왔다.(p. 8)
『뻬드로 빠라모』를 읽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핸드폰도 꺼놓고 단숨에 읽었다. 매번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꼬말라로 도피했다. 말하자면 내가 찾은 나름의 화원(花園)인 셈이다. 풀이라고는 비누풀(saponaria), 또론힐(toronjil), 마령초(capitana), 알팔파(alfalfa), 플로레스 데 가스띠야(flores de castilla)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척박한 땅의 식물들뿐이었고, 혼미하면서도 모호하고 그로테스크한 우울이 가득한 꽃놀이긴 했지만.
후안 룰포.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하나 모르면서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스페인어를 알았더라면 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후안 룰포를 더 잘 이해하고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스페인어도, 멕시코도, 멕시코 혁명, 후안 룰포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 터무니없는 오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주인공 쁘레시아도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뻬드로 빠라모가 있는 꼬말라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꼬말라는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혼미한 세계. 쁘레시아도는 차츰 생명을 잃어가고 이야기는 급격하게 뻬드로 빠라모를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후에는 뻬드로 빠라모의 사랑과 죽음, 화자가 불분명한 독백이 멕시코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 그게 아니라, 제가 물은 것은 이 마을입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 같군요
―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여기엔 아무도 살지 않소.
― 그렇다면 뻬드로 빠라모는……?
― 그 양반은 오래전에 죽었소.(p. 12)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할까. 꼬말라에는 망자의 무리들이 득실거리고, 산 자는 적나라한 자연의 마력 앞에 농락당한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쁘레시아도의 기억은 마치 또 다른 화자의 독백처럼 현재적이며, 등장 인물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망령은 땀으로 뒤범벅 된 베개를 건네고, 공기는 땡볕에 달구어진 바람한 점 없이 정체된 열기로 가득 차 숨을 죄어온다.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사이에 영원히 되풀이되는 대화. 빅토르 위고가 『크롬웰 서문』에서 말했던 낭만극의 지도이론을 빼다 박은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남미 붐(BOOM) 세대의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라고 한다지만, 이야기는 마르께스보다 오히려 보들레르나 카프카와 닮아 보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다. 복수의 화자가 등장할 뿐이다. 전반부에 쁘레시아도가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그는 결코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니다. 뻬드로 빠라모와 그의 도시 꼬말라를 소개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후반부의 뻬드로 빠라모가 주인공일까? 이 소설은 뻬드로 빠라모라는 뒤틀린 인물의 수사나를 사랑과 죽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파티를 열어대는 순수와 향락의 화신 『위대한 개츠비』의 멕시코판인 셈일까? 그런데 봉기를 선택한 렌떼리아 신부는? 꾸까를 잃은 아분디오의 슬픔은? 한마디로 멕시코 혁명은?
순간 그는 혼자서 쓸쓸하게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 위에 높여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꾸까, 그녀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잠자리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던 여자였다. 시력이 좋지 않고 몸에 냉기가 흐르는 체질에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기에, 아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름조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왕진을 다녀가는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나귀까지 팔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꾸까, 그녀는 찬 이슬을 맞으며 차디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오는 햇살도, 상큼한 아침 바람도,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p. 170)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뻬드로 빠라모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누가 말하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자 각각도 아니다. 차라리 각 화자의 총합 이상으로서의 멕시코 사회 그 자체라 할만 하다. 황폐화된 농촌의 현실과 그들 위에 군림하는 토호의 절대적인 존재. 부패된 연방 정부와 토지를 빼앗긴 채 좌절하는 농민. 실패한 혁명과 계속되는 갈등에 대한 그로테스크 몽타주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뻬드로 빠라모보다 꼬말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룰포는 자신의 역사관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팔짱을 낀 채 굶어서 죽어가는 꼬말라를 지켜보(p. 162)”는 듯한 태도다. 그래서 독자는 알쏭달쏭해진다. 룰포는 뻬드로 빠라모를 비난하고 있는가, 미화하고 있는가. 그는 혁명을 옹호하고 있는가, 조롱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읽은 것은 삶의 배태성(embeddedness)이다. 다중의 화자, 생사(生死) 경계의 모호함, 힌트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전개가 드러내는 것은 모두의 삶이 단일하거나 단절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다. 뻬드로 빠라모, 쁘레시아도, 수사나, 아분디오, 미겔 뻬드로, 렌떼리아 신부, 바르똘로메, 이들은 모두 꼬말라가 낳은 자식들이다. 이들의 삶은 서로 배태(embedded)되어 있고, 각자가 뿌리박은 관계망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러한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며,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죽은 이후에 더 깊게 뿌리내린다. 의미는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내가 어디로부터(누구로부터) 왔느냐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될 수 있다(되어야 한다).
― 후스띠나, 너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
― 그럼요. 하지만 천국도 있잖아요.
― 난 지옥만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p. 153)
조급한 삶을 갖게 된 지 벌써 일 년이 조금 넘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잊을 때가 많다. 무엇이든 빨리 이루고 싶은 조급함에 터무니없는 선택을 할 뻔도 했다.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신념도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며칠간 고민한 일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실은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나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열여섯 살에 일기장을 만들면서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서른 넘은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 말자.” 이제 내가 그 서른이 되기까지 고작 2년 여 남았다. 어느 노랫말처럼, 나이 서른에 나는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지금의 나는 열여섯 살 때와는 가치관도 세계관도 무척이나 달라졌다. 그 때 모르던 것들도 알게 됐고, 못 보던 것들도 보게 됐다. 그러나 그 때의 다짐을 읽다보면 나는 여전히 그저 퇴보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나의 선배들, 또 그들의 선배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짧다면 짧은 인생, 어떤 성취와 좌절로 채워나갔던가. 꼬말라의 자식들처럼, 오히려 죽은 이후에 더 깊게 뿌리내리는 유산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니, 나는. 나를 위한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회상하게 될까. 나의 유산은 어떤 이들을 웃고 울게 만들까.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p. 165)
일 년에 한 번 꽃을 틔울 뿐인 벚나무 옆을 지나면서, 나는 벚꽃이 없어도 벚꽃이 그 곳에 있음을 안다. 녹음이 무성한 여름에도, 낙엽이 쓸쓸한 가을에도, 가지만 앙상한 겨울에도, 나는 벚꽃이 없어도 벚꽃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안다. 봄이면 다시 가지에 꽃을 틔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새하얗게 흔들어댈 것임을 안다. 그래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도 서글퍼하지 않을 수 있다. 꽃은 한철 피고 지지만, 벚나무는 대지에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꼭 꽃놀이를 가야겠다.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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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6. 현빈, 탕웨이의 <만추>
- 사랑은 충돌의 몽타주
'영화같다'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영화같다'고 말한다. 과연 영화같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것과 쇼트와 쇼트가 만나는 것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순간 묘한 황홀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사랑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사랑이 되며, 황홀한 입맞춤을 하는 영화. 여미는 옷깃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안개같은 영화. 김태용 감독, 현빈 탕웨이 주연의 <만추>이다.
<만추>의 줄거리는 [감옥에 있던 여자가 며칠간 나온다. 나와서 한 남자를 만난다. 헤어지고 감옥으로 돌아간다.] 로 정리할 수 있다. 운명적이고 강렬한 남녀의 사랑이 보여질 것 같지만, 영화는 덤덤하다. 특히 여자주인공 애나의 표정은 영화 내내 텅 빈 무표정이다. <만추>가 보여주는 영화적 순간은 그녀의 무표정이 다른 느낌과 다른 표정으로 다가올 때 황홀하게 체험된다.
1. 무표정이 표정이 되는 순간
애나는 영화 내내 거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환하게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비슷비슷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관객은 마치 쿨레쇼프의 실험처럼 애나의 무표정에서 각기 다른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버스에서 처음 보는 훈이 애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애나는 웃지도 않고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그저 무표정하다. 하지만 관객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거의 본능적으로 투사하여 애나의 감정을 읽어낸다. 이때의 무표정은 황당함 혹은 경계심 정도로 읽힐 수 있다. 또한 애나의 첫사랑인 왕징과 애나가 만나는 시퀀스에서 보인 그녀의 무표정은 원망과 체념, 후회와 미련을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훈과 헤어지려 할 때 버스에 탄 애나는 무표정하게 창 밖의 훈을 애써 무시한다. 이때의 애나의 무표정은 안타까움, 헤어지기 싫음, 체념 혹은 사랑스러움 등의 감정으로 느껴진다. 모아놓고 보면 각 장면의 애나의 표정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쇼트가 붙어 작용함으로써 애나의 표정은 회의문자처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관객에 의해 다시 의미화 되어 이제 무표정한 애나는 천의 얼굴의 애나가 된다.
훈과 애나는 무표정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대화를 나눈다. 애나가 훈에게 왜 자신에게 돈을 빌렸냐고 묻자 훈은 애나가 웃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에 애나는 자신은 웃지 않았다고 답하고 훈은 분명히 웃었다고 응하며 실랑이를 벌인다. 이 장면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몽타주에 대한 은유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장면에서 애나는 웃지 않았다. 비유적인 이야기지만, 훈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쇼트가 애나의 무표정과 몽타주를 이룬 결과의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사랑은 영화같다. 무표정이 표정이 되는 순간. <만추>의 영화적 순간이다.
2. 마음으로 와 닿는 충돌의 순간
<만추>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면을 꼽아보라 하면 관객들은 대부분 곱슬머리 남자와 금발의 여자가 춤추는 장면을 꼽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가지고 있던 서사적 맥락과 사실적인 화면과는 전혀 다르게 환상적이며 이질적이다. ➀애나와 훈이 놀이기구를 타는 장면과 ➁애나와 훈이 남녀의 모습을 보고 더빙하듯 이야기하는 장면 뒤에 ➂갑작스럽게 뒤 돌아선 여자를 남자가 좇아가는 장면, 그리고 ➃두 남녀가 춤을 추는 장면이 이어진다. ➄그 다음은 뛰어가는 애나와 애나를 좇아가는 훈의 쇼트가 이어진다. 이 장면들의 연결은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삽입된 남녀의 춤 쇼트는 상당히 길다. 삽입 장면은 다분한 감독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견인요소란 서커스의 볼거리, 뮤직홀의 노래들, 롤러코스터 등과 같이 플롯에 복속되지 않은 개별적으로 정점을 갖는 흥미진진한 순간들이라고 했다. 삽입된 남녀의 춤 쇼트는 에이젠슈테인이 말했던 견인요소와 꼭 맞아 떨어진다. 삽입된 장면은 서사와는 개별적이며 흥미진진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말한 견인요소로서의 몽타주(montage of attraction)이다. 또한, 일련의 장면들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닌 충돌(collision)이다.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면서 관객은 충격을 체험하고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의미가 생성된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파업>(1925)에서 제철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짜르의 진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의 이미지와 병치한 것에서도 쇼트의 충돌과 새로운 의미생성이 드러난다.
③과 ⑤번 장면에서 보이는 '같은 대사와 같은 상황'은 쇼트의 연결을 더욱 긴밀하게 만든다. 앞뒤 장면과의 병치로 인해 삽입된 남녀의 춤 장면은 훈과 애나의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암시적 의미와 애나의 욕망 혹은 속마음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애나는 이 충돌적 장면 이후 훈에게 자신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면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백한다. 또, 중국어로 말하긴 하지만 훈에게 자신의 모든 사정과 속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➀에서 ➄로 연결되는 장면들은 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형상화된다.
재미있는 장면은 훈과 애나가 멀리 보이는 남녀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행동에 맞추어 더빙하듯 목소리를 연기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뤄지는 남녀의 대화와 그들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훈과 애나에 의해 남녀의 행동이 조작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영화의 이미지에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키는 '감독 혹은 관객'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몽타주가 본질적으로 감독의 생각이 투영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➃번 장면에서 보이듯, 남녀가 춤추는 장면을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애나와 훈이 보고 있는데 이는 '영화와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대한 메타적 은유로 보인다. 훈과 애나는 한 편의 영화를 함께 본 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하여 본다면,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나오는 행위는 [일상 - 영화 - 일상 ]이라는 나의 삶과는 전혀 이질적인 어떤 순간이 삽입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충돌적 몽타주가 된다. 이렇게 삶과 영화도 몽타주 된다.
3. 핸드폰과 시계의 상징
<만추>에 등장하는 상징적 소재는 애나의 핸드폰과 훈의 시계가 있다. 이 역시 몽타주에 의해 의미가 더욱 상징화된다. 먼저 애나의 핸드폰을 살펴보자. 교도소에서 외출을 허락받은 애나는 수시로 위치를 확인받기 위해 핸드폰을 지급받는다. 애나가 시애틀에 도착해서 새 옷과 귀걸이를 사서 갈아입고 달라진 모습으로 거리에 나오는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애나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찾기 위해 가방과 옷을 뒤지고 교도소로부터 온 전화는 애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복귀 시간을 재차 강조한다. 옷과 귀걸이를 사는 것은 7년 만에 밖에 나온 애나의 첫 번째로 발현된 욕망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급받은 핸드폰으로 인해 손쉽게 저지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애나는 산 옷과 귀걸이를 버리고 원래 옷으로 갈아입는다. 여기서 핸드폰은 확장된 감시와 감옥, 유한한 시간, 돌아가야만 하는 운명 등 애나의 욕망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상징성을 갖게 된다.
훈은 애나에게 차비를 빌리고 대가로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준다. 훈과 시간을 보내고 난 뒤 기다리라는 훈의 말에도 애나는 시계만 침대 위에 놓고는 사라진다.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함께 있던 훈이 사라지고 난 뒤 애나는 자신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시계는 [훈 - 애나 - 훈 - 애나]의 순서로 주고받아 진다. 최종적으로 시계를 받은 애나는 2년 뒤 마지막 장면에서 훈과 헤어진 휴게소에서 훈을 기다린다. 시계는 시간을 상징한다. 애나와 훈은 서로 시간을 주고받는다. 여기서의 시간은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 소통하는 시간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엔딩신에서 애나의 옅은 미소를 생각해보면 훈은 죽어있던 애나의 시간에 새로운 시간을 선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핸드폰과 시계는 영화의 서사적 흐름에 의해 의미화 되며 클로즈업 쇼트와 몽타주에 의해 더욱 상징화된다.
◎
전혀 몰랐던 애나와 훈이 충돌하며 사랑이 되었듯, 사랑이란 그렇게 모르는 두 사람이 충돌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충돌의 몽타주'인 것이 아닐까. 사랑은 충돌의 몽타주이다. 사랑은 영화다.
P. S. 우디 앨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가 원래 이번 Ex-MovieFreind의 주인공이었는데 사정상 쓰지 못했습니다. 정기 업데이트 날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개봉공지는 예정대로 우디 앨런의 작품을 하겠습니다.
※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 2013년 4월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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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모음집『렉싱턴의 유령』(문학사상, 2006) 속의 단편소설「토니 다키타니」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를 하였고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④ 본래 책에서는 '토니 다키타니'를 썼지만, 글쓴이가 소설을 짓게 된 동기에 티셔츠에 적혀있는 'TONY TAKITANI'에서 모티프를 얻었기에 '토니 타키타니'로 바꾸어 사용하고 인용하였습니다.
고독: ‘孤(외로울 고)’와 ‘獨(홀로 독)’의 만남
한 단어를 보고 그것을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런 소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해 보이는 소설은 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토니 다키타니」이다. 작가는 ‘고독’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바라본 뒤, 그 두 글자를 쉴새 없이 늘려 이 소설을 만든 듯하다. 고독은 ‘獨(홀로 독)’ 자가 ‘孤(외로울 고)’ 자와 만난 것이다. 조금 뒤틀어본다면 ‘孤(외로울 고)’ 자를 만나기 전까지 ‘獨(홀로 독)’은 고독이 될 수 없다.
‘獨(홀로 독)’의 남자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토니 타키타니가 틀림없다. 그는 그런 이름(호적에는 물론 타키타니 토니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지만)과 얼마간 윤곽이 뚜렷한 얼굴 모습과, 고수머리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자주 혼혈아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미군의 피가 섞인 혼혈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부모는 어엿한 일본인이었다.’ (123)
책은 토니 타키타니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일본인 부부에게서 태어난 미국식 이름의 아이. 한 존재와 그것을 부르는 호칭 사이의 괴리는 한 존재와 그것을 부르는 사람 간의 괴리로 이어졌다. ‘그가 이름을 남에게 알릴 때면 상대방은 묘한 표정을 짓거나, 더러는 약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언짢은 농담처럼 받아들였고, 더러는 화를 내는 사람마저 있었다.’(132)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3일 뒤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늘 악단을 이끌고 연주여행을 떠났다. 학교에서도 이름 때문에 혼혈아라고 놀림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있는 것이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건, 그에게 있어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굳이 말하자면,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제 조건이라고 까지 생각하기도 했다.’(132-133)
‘孤(외로울 고)’를 만나다
어느 날 갑자기, 토니 타키타니는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사무실에 와야만 될 구실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그녀와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둘은 열다섯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 통했고, 점심식사 이후에도 몇 번의 데이트를 했다. 그가 살아왔던 혼자만의 세계에 장막이 걷히고, 그녀가 그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를 뒤따라 외로움도 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이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고독이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녀에게 푹 빠졌던 토니 타키타니는 다섯 번째 데이트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고, 열다섯 살의 나이차이도 무시하지 못할 조건이었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시간동안 토니 타키타니는 고독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를 만나기 전의 그의 삶은 고독했던 것이 된다.
‘그녀가 결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토니 타키타니는 매일 혼자서 술을 마셨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고독이란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야말로 지금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야.’ (141)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토니 타키타니는 ‘고독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고독의 시기는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고독의 시기는 시작되었다. ‘외롭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금은 이상한 상황이었다. 고독하지 않게 됨으로써, 다시 또 고독해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마음속에서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142) 고독이 전부인 세상에 고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은 고독하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孤獨(고독)’을 안고가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서로는 서로를 사랑했고, 물질적인 부족함도 없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내의 옷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녀는 매일 새 옷을 구입했다. ‘아내 옷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계속 불어나게 되자, 아내에게 무한히 너그럽던 그도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146) 그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고민을 이야기했고, 그녀는 옷 사는 것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옷을 반품하고 오는 길에 그녀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갑작스레 사랑을 가지고 나타난 것처럼, 그녀는 갑작스레 그의 곁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에 남은 것은 깊은 고독과 7 사이즈의 옷들뿐이었다. ‘그 옷들은 그에게 마치 아내가 남기고 간 그림자처럼 보였다. 7 사이즈의 아내 그림자들이 켜켜이 몇 줄로 열을 지어 옷걸이에 매달려 있었다.’(155)
그에게 아내의 옷은 살아있던 아내와 그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였다. 아내의 몸에 딱 들어맞는 7 사이즈의 옷은 아내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옷이 영원한 아내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호칭이 호칭의 존재와는 다른 것이듯, 그녀의 상징물인 옷 역시 그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그 사실을 얼마가지 않아 깨닫는다.
‘그 그림자들은, 예전에는 아내의 몸에 찰싹 붙어서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상실한 채 시시각각으로 말라비틀어져 가는, 볼품없는 그림자 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그저 낡고 바랜 옷일 뿐이었다.’(155)
결국 그는 옷을 모두 처분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내에 대한 기억은 점점 옅어져가고 희미해져갔다. 기억이 옅어져가는 것은 그가 아내를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거기에, 꼭 걸맞은 무게를 지닌 채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161) 고독과 맞닥뜨린 후로는 고독을 뿌리칠 수 없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 고독을 안고 가는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2년 후 아버지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유품으로 레코드 더미를 남겼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를 떠나보냈던 방식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레코드 더미를 1년 동안 방에 보관하고 있다가, 레코드 더미가 아버지에 대한 상징을 잃고 짐스럽게 느껴지자 모두 팔아버린다. 방은 텅텅 빈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레코드 더미를 완전히 정리해 버리고 나자, 토니 타키타니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외톨이가 되었다.’(161)
2004년에 영화화 되었습니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포스터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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