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관계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여기서 먼가요?





안녕, 당신. 빙구에요.



 어떤 거리를 수반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당신이라던가, 현재, 관계라는 말들.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제아무리 미분해도, 과거와 맞닿은 지금 이 순간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미래 사이에서 어떤 가시적인 규정이 없이는 현재를 볼 수 없죠. 관계라는 이름 아래 당신과 나와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표시하지 않으면 당신과 나라는 이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요. 그러한 규정이나 법칙성, 당신과 나 사이에 상정된 어떤 거리가 무너졌을 때, 그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휘어지고 폐쇄적인 구조로 변질되어 우리를 황폐하게 합니다.



 오늘 빙구가 가져온 이야기는 그 거리감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부모와 가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로, 다시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로 세 점을 거쳐 대물림되고 반복됩니다. 서로에 대한 거리감을 상실하고 그 트라이앵글의 어느 선상으로 그들의 인생이 틀 지워지는 동안 그들의 시공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화학적 변화를 거친 채 화석처럼 굳어버렸습니다. 그곳에선 시간도 공간도 무한의 무게로 수렴할 뿐이지요.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가 그리는 짧고도 강렬한 광경을 통해 묻습니다. 각 점 사이의 상실된 거리와 빛을 잃은 시공간의 물리적 감각, 그 어딘가로의 틈새로 사라진 것들에 대해. 당신과 저와 또다른 무수한 당신들을 연결짓는 트라이앵글, 이쪽 점에서 저쪽 점까지의 그 광막한 거리에 대해. [여기서 먼가요]입니다.





관계의 기묘한 풍경





막이 오르면 어둠. 
쿵쿵, 위층에서 소리가 들린다. 
왼편 창에 불꽃이 일렁거린다. 자라나듯,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침대에서 남자, 이불을 찬다. 일어나 웃옷을 벗는다. 
헤드라이트 불빛 방안을 훑는다. 
남자의 시선 창 쪽을 향한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남자, 일어나서 창으로 간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 들린다. 
남자, 일어나 문을 향해 간다. 
뒤돌아본다. 
문 밖으로 나간다. 

불이 켜진다.



(......)



천장에서 구슬들이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남자, 턱을 위로 빼 올려다본다.

여자, 걸레를 들고 나와 바닥에 놓고 그릇을 포갠다.

구슬,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여자 : (걸레질치며) 또 시작이네.

남자 : (천장을 올려다보며)쥐새끼들.

여자 : 참자.

남자 : 안 참으면?

남자, 보이지 않는 구슬을 찾듯 천장을 보며 움직인다.

여자 (접시를 챙겨 일어서며)음악 틀까?

남자 : 관둬.

여자 : (부엌 쪽으로 가면서)그치겠지. 쫌 있으면.




 무대 위로 젊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합니다. 비좁은 원룸에 제삿상을 차리느라 분주한 그들의 대화는 마치 십 년은 같이 산 부부처럼 큰 감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십대 중반의 부부가 으레 나눌 법한 애정어린 일상의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조롭고 권태로운 중년부부 분위기에 더 가까워 보이네요. 오랜 세월 반복된 것인 양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대화 사이로, 윗층 아이들이 내는 발소리와 공소리, 구슬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끼어듭니다. 위층 아이들의 계속되는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남자와, 새벽에 나갔느냐고 눈치를 보며 묻는 여자. 제삿상을 다 차리고 나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 들린다. 

여자와 남자 일어난다. 문이 열린다. 
어머니가 먼저 들어온다. 한손에는 선물 꾸러미 다른 손에는 밧줄을 쥐고 있다. 어머니 뒤로 목에 밧줄을 멘 아버지 나타난다. 둘 다 선글라스를 썼다. 

(......)


어머니와 아버지. 상 가운데 영정 사진처럼 앉았다. 
부엌으로 갔던 여자, 밥을 퍼서 왔다. 

어머니 : 기도하자. 

다들, 자리에 앉는다. 둘러앉아 기도한다. 아버지만 눈을 뜨고 있다. 

어머니 : 오늘 저희 가족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날 있었던 모든 일들은 잊고, 용서하며, 감싸주고 

아버지가 밥을 손으로 먹는다. 여자는 눈을 뜨고 아버지 손에 수저를 쥐어준다. 

어머니 : (격해지며) 우리가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게 하시며 
아버지는 수저질이 서투르다. 밥덩이가 떨어진다. 
수저로 밥공기 주변을 두드린다. 

어머니 : 지옥의 불꽃 속에서도 일곱 겹의 화염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사 

어머니, 눈을 뜨고 아버지의 수저를 뺏는다. 뺨을 때린다. 아버지 누구에게 맞는지 모른다. 두리번거린다. 어머니 머리통을 때리자 아버지 웅크리고 머리를 감싼다. 

어머니 : (눈을 감고 수저를 쥔 채) 아멘하자. 아멘.





 곧이어 또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남자의 부모이자, 여자의 시부모입니다. 둘 다 선글라스를 쓰고, 아버지는 목에 줄까지 걸고 있고. 이들의 존재감은 등장부터 압도적이죠. 눈이 멀고 치매에 걸린 듯한 아버지의 괴기스런 행동들과 그런 아버지를 개 다루듯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우습다기보다도 이상하고 이질적입니다.



 거기에, 그 뒤로 이어지는 광경은 더 묘합니다. 어렵게 상도 차리고, 모처럼 부모님도 모신 모양이니 밥을 먹으러 둘러앉기는 했는데, 누구도 이게 제삿상이라는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구색이 좀 초라하긴 해도 분명히 이 상은 평범한 밥상이 아니라 제삿상인데, 촛불이나 향도 없고, 절을 하기는 커녕 영정사진 한 장 없고. 상 앞에 앉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만이 제사음식들 위에서 영정사진처럼 떠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어머니는 제삿상 앞에 앉아 지옥의 불꽃 속에서도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독교식 기도문을 올리다가, 밥을 흘리고 수저를 두드려대는 아버지의 뺨을 호되게 때리기까지 합니다. 남자는 부모와 마주한 식사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듯 침묵만 유지하고, 여자는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다가 어머니로부터 쌀쌀맞은 면박만 받습니다.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터질 듯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계속됩니다.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붕괴된 시공간, 0으로 수렴하는 거리





 블랙홀이 어떻게 생기는지 들어본 적 있나요? 블랙홀은 주로 거대한 별의 죽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별이 수명을 다해갈 무렵 별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엄청난 중력이 그 별의 중심으로 쏠리는 어마어마한 질량을 야기한다고 해요. 너무 많은 질량이 한 점으로 쏠리면서 공간 자체가 그 점을 향해 휘게 되고, 그 점은 주변의 시공간을 잡아먹으며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검은 구멍을 형성합니다. 마치 천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았을 때 천이 음푹하게 파이는 것처럼, 너무 많은 무게가 한 점으로 쏟아지는 순간 시공간의 물리법칙 자체가 그 방향을 향해 휘어지는 것이죠.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과 저를 연결하는 선상에 무거운 질량의 무엇이 자리하면, 관계는 중심을 잃고 그 방향으로 쏠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와 거기에 있는 어떤 무게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적용되는 각도와 눈높이, 상의 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과 저의 거리는 상실되어버리고, 우리는 무게중심을 잃고 서로를 향해 뭉개질 겁니다. 마치 블랙홀에 빠진 물질처럼,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떤 검은 심연을 향해서요.



 남자와 여자의 상태는,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블랙홀과도 같은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순간이 돌이킬 수 없는 무게로 그들 사이에 자리잡았고, 시공간은 그에 따라 균형을 잃고 무너지면서 그들의 관계 안으로 쏟아져내렸습니다. 극은 이를 반복되고 변용되는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내줍니다.





아버지, 비틀비틀 일어선다. 
천장의 소리를 따라 움직인다. 
여자, 아버지를 앉히려고 한다. 
아버지는 꼼짝도 안 한다. 

어머니 : …앉아 여보. 

아버지, 뒤 돌아본다. 소리 나는 곳을 찾는다. 

어머니 : 귀 먹었어! 앉아. 

남자 : 앉아. 아버지. 

여자, 아버지를 앉힌다. 

여자 : 조금 있으면 멈춰요. 

천장에서 통통, 소리 들린다. 


여자 : 오빠가 공을 던지면 (공 던지는 시늉) 여자아인 주우러 가요. (천장에서 발자국 소리 들린다)방이 좁아서 공은 금세 벽에 부딪쳐요. 주워 와선 다시 던져달라고 해요. (공 소리 난다)오빤 공을 화장실로 던지고. 여자 아인 쫓아가고(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잠잠해져요. 

소리, 그친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정지화면처럼 앉아 있다.




 살벌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라도 하듯, 천장에서는 쿵쿵거리는 공소리, 구슬이 떨어지는 소리, 어수선한 발소리는 부모님의 등장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극의 초반부에 제시되었던 그 소리들은 극 내내 계속해서 들려오며 그들의 대화를 방해합니다. 오히려 더욱 더 빨라지고 커지면서 극의 분위기를 천천히 고조시키고, 그에 따라 그들의 대화는 점차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하지요. 어머니와 남자, 여자의 대화는 점점 표면 아래 감추어진 그들의 관계를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일상의 틀 안에 감추었던 변색된 시공간과 돌고 도는 관계의 순환구조가, 여러번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냅니다. 극의 초반에 제시되었던 여러가지 질문들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이들이 형성하는 삼각형의 순환구조가 가시화됩니다. 왜 제사상을 차려 놓고 누구도 절 한번 하지 않았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정사진인 양 상 가운데에 앉았는지, 왜 아버지는 눈이 멀고 아이처럼 어려졌는지, 그들의 지난날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복되는 이미지들로 드러나는 트라이앵글





어머니 : 몇 년이 흘렀지. 넌 우리에게 전화를 했어. (수저를 놓는다) 난 사실 놀랐다. 네가 우리에게 연락을 할 줄 몰랐어. 설마 먼저. 
여자 : 제가 부탁했어요, 오빠한테. 오빤 검정고시도 치른댔어요. 
어머니 : 죽은 사람한테 아니, 죽은 셈 쳤던 쟤한테 전화가 온 거야. 
밥을 먹자고. 
여자 : (고개를 숙이며) 예, 밥이요. 밥이나 한 끼 
어머니 : 난 겁이 났다.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왔어. 
저 애는 자기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했어. 

(전화 벨 소리, 남자 목소리 들린다) 어머니, 저는 정말 새사람이 되었어요. 곧 아이 아빠가 돼요. 전, 새로 다시 살아볼 거예요. 

아버지는 도리질을 친다. 

어머니 : 네 아버진 싫다고 하셨다. 난 밥 한 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했다. 무섭단 사람 끌고 먼 길 왔다. 

여자, 고개를 조아린다. 

어머니 : 됐다.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으니까. 

여자 : 저흰 앞으로 

어머니 : 셰리는 죽었고, 네 아버지와 난 언제나 불구덩이에서 뒹굴고 있어. 석쇠에 나란히 누운 생선처럼 꼼짝 못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널 볼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아버진 눈을 떴지. 

아버지는 주섬주섬 일어난다. 사방을 더듬거린다. 

어머니 : 네 아버진 널 봤다. 똑똑히. 
남자 : ……
어머니 : 눈이 멀었지. 널 보고는. 애빌 죽이려는 널 보고는, 구운 생선눈깔처럼 하얗게, 
여자 : 실수였어요. 
어머니 : 쟬 낳은 게 실수지. 뭘 낳게 될지 누가 알겠냐만.


여자, 배를 감싸 안는다. 
아버지, 현관으로 기어간다. 불이 난 집안에서 달아나려는 듯 절박해 보인다.





 진상은 대략 이러합니다. 이전부터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자는 집을 나가 몇년만에 나타났고, 여자와의 결혼을 허락받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남자를 가두었다는 것, 부모와의 사이가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남자는 여자를 부추겨 함께 불을 질렀고,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을 보고는 눈이 멀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저승에도 이승에도 머물지 못한 채 해마다, 날마다 그들을 찾아온다는 것. 반복되는 소리들과 더불어 높아지는 그들의 목소리, 아버지의 발작적인 울부짖음, 변용되며 쌓이는 여러 이미지들은, 애증으로 곪은 그들의 관계를 벗겨내고 그들의 관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여러 층의 층위들이 넘나들며 긴긴 나날동안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흘러가지 못한 채 거기에 그대로 그들이 갇혀 있으며, 그들의 인생 자체가 지난날의 틀로 변형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관계로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암시합니다.




여자 : (걸레질치며) 오빠도 잠을 못자고 새벽녘까지 뒤척여요. 자다가 땀을 흘리고 헛소리도 해요. 울면서, 울면서 잘못을 빌어요. 자다가 집을 뛰쳐나가요. 신발도 안 신고. 
어머니 :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게다. 언젠간.
여자 : 아니에요. 오빠는 새사람이 되었어요. 우린, 행복하게 언제까지나 
어머니 : 언제까지? 
여자 : (걸레질 멈춘다)실수였어요. 어머니, 그땐 우린 너무 어렸어요. 저는 그냥 (걸레를 비튼다.)
어머니 : 석유통을 들고 골목길로 넌 달음질쳤지. 
남자 : 내가 시켰어. 싫다는 걸 억지로. (여자의 손을 잡으며) 덜덜 떨길래 잡아줬어. 

어머니 : 떨긴. 우린 영영 불속에서 헤맨다. 
남자 : 실수였다고. 
어머니 : 서로를 볼 때마다 너흰 불을 보게 될 거다. 너희가 싸지른 불은 씨앗이 되어 너희마 저 살라먹겠지. 불이 불씨를 낳고, 불씨가 자라 불을 낳고 

여자와 남자 마주본다. 

여자 :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눈을 감았으니까. 
남자 : 아니야. 난 아무 것도 못 봤어. 눈을 감았으니까. 
여자와 남자 : 우린 아무 것도 몰랐어. 실수였으니까. 

여자와 남자 서로에게서 물러선다. 

어머니 : (가슴을 뜯으며) 얼음을 다오. 

아버지 : (벽에 몸을 부딪친다.) 여기서 나가자. 문 좀 열어줘! 

아래층에서 고함 소리 들린다. 

아래층 남자 목소리 : 미쳤어! 너희들 왜 밤마다 못을 박아대.





 극이 점차 전개되어감에 따라 관객은 점차 깨닫게 됩니다. 윗집에서 나는 소음들은 사실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며, 그렇게 아랫집으로 그 아랫집으로 끊임없이 소리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요. 그들을 숨막히게 하는 소리들은 사실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들이고, 이것들은 또다시 반복되며 순환구조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관계의 구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되고 변용되는 소리들과 이미지들을 통해 극은 그들의 관계가 같은 삼각형의 틀 안에 갇혀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남자를 가두었듯, 윗집 아이들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듯, 그리고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화장실에 가두듯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과거와 똑같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며, 그들의 아이와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한치의 거리도 허용하지 않는 점과 점 사이에는 죽은 시공간만이 남아 계속해서 같은 광경을 재생합니다.극의 끝부분에서는 처음과 같은 광경이 연출되고, 뫼비우스의 띠를 걷듯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그들로,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로.





어머니 : (나가다 돌아선다) 깜빡할 뻔 했다. (가져온 선물꾸러미를 건네며) 우리 가거든 풀어봐라. 

여자, 선물꾸러미를 받아든다. 

어머니 : 아인, 봄에 나온댔지. 그래, 봄. 내년엔 네 아이들을 보겠구나. 너희와 똑 닮은. 

여자 : 이걸로 끝이에요. 

어머니 : 끝이긴. 그 아이들은 너흴 잘 모르겠지. 아이들은 너흴, 너흰 아이들을 아직 못 봤지. 우리가 알려줘야겠지.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버지, 짖어댄다. 어머니, 아버지의 줄을 잡아당긴다. 
어머니와 아버지, 밖으로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들린다. 
남자, 창문을 닫는다. 
여자, 선물 꾸러미를 푼다. 
공이 떨어진다. 
여자, 남자에게 공을 던진다. 
남자, 받아 안는다. 
오토바이 소리, 헤드라이트 불빛 천장에 길을 낸다. 
남자, 여자에게 공을 던진다. 
여자와 남자 사이의 거리 점점 벌어진다. 맞장구치듯 천장의 공 소리도 점점 커진다. 
조명이 무대를 붉게 물들인다. 
암전 
어둠 속에서 전화벨 소리 울린다.





거리의 존재 자체를 응시하는 것





 우리는 늘 일상이 겹치며 빚어내는 궤도를 돌고 돌면서 평면상의 좌표를 헤맵니다. 무수한 점을 찍어 누군가에게 닿으려 하고, 점과 선에 면적을 부여하고. 그리고 거기에 다시 다른 점을 이어 또다른 면을 만들고, 그 평면에 또다른 평면을 연결하고. 인생은 어쩌면 그런 면들이 모여 만드는 입체의 연속체인 것 같아요. 점과 점, 선과 선, 면과 면. 각각의 이름을 바꾸면서 각 점은 계속해서 그 위치를 바꾸지만, 세 점이 이루는 삼각형의 틀에서 단지 더 작아지거나 더 커질 뿐 그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타인과 저, 당신과 타인, 그리고 저와 당신. 그 세 점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거리에서.



 그러나 그 거리를 견뎌야만 관계는 평면 위에서 중심을 잡고, 시공간은 유한성을 가지고 우리를 스쳐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는 다시 우리가 그 삼각형의 면적을 견딜 수 있는 정도의 무게로 만들어줍니다. 때로는 허무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순간이나마 찬란한. 끊임없이 사그라들지만 또 동시에 영원히 반복되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순간순간으로 영원한 트라이앵글의 관계들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당신과 제가 이 우주 안에 홀로 떨어져 있어도 외롭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설령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해도, 그 거리 너머 당신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제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문득 그리운 새벽이네요. 이 우주의 어디쯤에 있을지, 어쩌다 한번은 서로의 곁을 스쳐갈지. 무수히 저를 스쳐가는 당신과, 당신과, 당신에게, 이 작은 내가 점 하나의 무게쯤으로는 존재하기를. 밤하늘의 좌표 중에서 아주 작은 별빛 하나 정도의 면적이면 충분하답니다. 저도 당신에게 그러한가요. 트라이앵글의 이쪽 한 점에서 보냅니다. 안녕, 당신.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➅ <왕의 춤> : 역사와 영화_고증과 상징에 대하여


왕의 춤 (2001)

The King Is Dancing 
7.6
감독
제라르 코르비오
출연
이밀 타딩, 자크 프랑소아, 브누아 마지멜, 세실 브와, 콜레트 엠마누엘
정보
드라마 | 벨기에, 독일, 프랑스 | 108 분 | 2001-11-10




  


제라르 꼬르비오 감독의 <왕의 춤Le Roi Danse>(2000)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 루이14세를 다룬 영화다. 절대군주, 태양왕 등 루이14세를 설명하는 수식어의 함축성을 상기할 때 루이14세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적 인물을 다룬 역사적 영화 <왕의 춤>은 루이14세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최대한 잘 ‘고증(考證)’하고자 한 노력이 보인다. 최대한의 고증을 위한 노력은 등장인물의 의상과 헤어, 배경이 되는 건물과 소품, 나아가 음악과 춤을 망라한 모든 요소들에서 충실히 이루어지며 당대의 문화와 세계관을 반영한 인물들의 행동거지와 대사는 루이14세 시대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빛을 발한다. 이렇듯 태양을 형상화한 루이 14세의 화려한 시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이 영화. 그렇다면 명백히 ‘역사’를 다루는 이 영화의 목표는 ‘최대한 똑같이 재현하기’일까? 상대적으로 팩트의 성격이 강한 역사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이 영화 안에 역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일까? 여기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가지는 필연적 숙제가 도출된다. 바로 픽션으로서의 영화의 본질적 속성과 사실로서의 역사 고증의 관계이다.
이 영화가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한 역사, 그에 대한 고증은 매우 흥미롭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긴장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리고 그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로서 기능하도록 만든 영화 전체의 완결성. 이 철저한 고증의 목표는 무엇인가? 철저한 고증을 수행하면서도 그 안에 심어놓은 ‘상징’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고증 : <왕의 춤>에서 재현되는 역사의 모습
영화 <왕의 춤>의 시대 : 바로크(Baroque) 
먼저, 루이14세의 시대는 바로크의 시대이다. 화려함과 장식성, 사치와 향락 등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바로크는 영화 <왕의 춤>의 배경으로서 완성도 높게 재현된다.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한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며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18세기에 걸쳐 문화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로크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루이13세, 14세로 대표되는 군왕주의의 절대주의 시대이며,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의 지배에서 벗어난 계몽사상시대이다. 바로크 예술은 절대주의의 궁정과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모체로 하여 궁정 양식의 장중한 취향을 기반으로 활력과 움직임, 표현의 강렬함, 현실주의적인 경향과 균형의 파괴에서 오는 부조화가 특징이다. 이러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적 특징은 회화 뿐 아니라 건축, 패션, 음악, 음식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고, 17세기 중엽 광대한 국토, 우세한 국민,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지배체제를 갖춘 프랑스가 영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함에 따라 절대왕정 사상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강화되어 왕좌 중심 문화가 유럽 전역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 불리며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는 등 프랑스를 바로크 양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예술과 미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장식미술 등에 있어서 바로크 양식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사실적 재현 : 의복과 건축




영화 <왕의 춤>은 루이14세의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건축, 패션, 음악 모든 분야의 시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의상은 바로크 문화 그 자체이다. 먼저 바로크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 남성 복식인 쥐스토코르(justaucorps)는 루이14세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몸에 꼭 맞는 남자 코트로 점점 아랫단이 넓어지고 길이가 무릎까지 닿았으며 후에 허리가 가늘어져 날씬한 S실루엣으로 변화했다. 앞 중심에는 단추가 촘촘히 달렸고 단춧구멍을 따라 금․은사로 만든 근 장식을 했는데, 이 끈 장식은 지위와 경제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바로크시대 여성의 복장인 로브(robe)는 몸을 강력하게 조여 몸의 실루엣을 살리는 코르셋과 가슴 또는 등 부분을 깊게 팜으로써 몸의 노출을 만드는 데콜테 네크라인, 그리고 층층이 화려하게 장식된 풍성한 페티코트(petitcoat)와 허리를 조이는 판판한 보디스(옷의 몸통 부분)인 코르발레네(corps baleine)로 완성되었다. 이 때 속에 입은 옷의 주름이 목 밑에까지 오게 하거나 많이 파진 네크라인에 레이스나 프릴을 달았고, 심지어 유두가 보일 정도로 대담하게 가슴을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패션이었다. 





바로크의 헤어장식 또한 바로크의 정신성-절대왕정 이념에서 나오는 위엄의 확립-을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요소이다. 남성의 헤어스타일은 1660년대 이후 풀 버텀 위그(full bottom wig)는 매우 거대하고 무거운 형태로 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으나 상류사회에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들에게도 퐁탕주(fontange)가 유행했는데, 리넨이나 레이스를 주름잡아 철사로 층층이 세워 부채를 핀 것 같은 형태를 했고, 치맛자락이 길어짐에 따라 퐁탕주의 높이도 더 높아져갔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머리 장식들은 과장되어 불편하고 육체적인 노동에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으나, 오히려 노동과 거리가 먼 의복 양식은 자신의 귀족계층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여겨졌으며 이런 경향으로 인해 과장된 장식의 불편함마저도 충분히 감내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은 원, 직선, 곡선의 조화를 극대화하여 주변의 길, 나무, 분수 등이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조화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크 건축은 다채로운 색상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벽면의 입체 장식과 정교한 도금 장식을 많이 사용하여 그 화려함을 더했다. 교회는 물론 궁정이나 저택 모두 이와 유사한 스타일로 브로케이드와 벨벳 등으로 벽면을 장식하고 여러 가지 색의 드레이퍼리와 호화로운 장식 프레임의 거울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영화 <왕의 춤>의 충실한 바로크 고증에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눈요기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확립이라는 상황이 바로크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문화적 선호의 뿌리가 되며 이는 절대군주로서 자임하기 위한 루이14세가 취한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군주’ 루이14세의 전략으로서 바로크 궁정문화    
<왕의 춤>의 모든 것에는 당시의 역사가 녹아있다. ‘근대’국가의 모델로서 언급되는 절대왕정은 이전의 중세왕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특징으로 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빠르게 나타나 루이14세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평가된다. 절대적인 왕권과 함께 종교로부터 정치의 독립성을 갖고자 하는 루이14세의 강한 의지는 절대왕권 확립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왕의 춤>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어머니와 추기경 신분의 재상, 그리고 이들의 행동기제로서 종교로부터 독립해 서서히 절대군주로 성장하는 루이14세의 모습이 드러난다.

루이14세 “I’ll work things out with Him.”(여기서 Him은 GOD을 의미)
루이의 모친 “Without sacred values, no reign can endure.” (42)
     


당시 프랑스는 강력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을 수립하고 이를 하나의 국가관으로서 확립시키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루이14세는 그가 9세가 되던 시절 세습 귀족들과 파리 고등법원이 왕에 대항한 귀족 중심의 프롱드의 난을 겪으면서 강력한 왕권 확립에 특히 필사적이었다. 추기경의 죽음을 계기로 친정을 하게 된 루이14세는 신이 내린 절대 권력을 왕이 가지고 있다는 왕권신수설에 의거하여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는 인물로 자처했다. 그러나 루이14세는 여전히 강력했던 봉건적 특권의 세습 귀족층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연금의 수여나 어떤 처벌이라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만든 것이 베르사유 궁전과 그곳의 문화였다. 즉 베르사유 궁전에 귀족들을 자의적/타의적으로 억류시켜 그들이 지방에서 권력 기반을 쌓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그 길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것이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우아한 감옥’이라 칭할 수 있는 근거이다. 루이14세는 귀족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끌어들여 방탕한 생활에 흠뻑 젖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운명이 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주문은 효과를 발휘해 귀족들은 몰리에르의 저렴한 풍자극을 즐기며 바보처럼 생각 없이 웃고 떠들기 바쁘다. 
   

루이14세 “I buy my old enemies with the pleasures at court. Gathered around me. Intent on pleasing me, the forget about plotting.” (56)
     
   


한편으로 당대의 전통적인 귀족층 역시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으니, 바로 생활력 획득과 신흥 시민계급출신 귀족관료들과의 차별성 획득에 관한 문제였다. 오래 전부터 돈 있는 시민계급에게 귀족 칭호를 판매해왔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돈을 주고 관직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차 프랑스 사회에서 어떤 관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곧 귀족 계급으로의 진입을 뜻하게 되었다. 시민들이 계속 귀족 계급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17세기에는 이들이 이미 전통적인 세습 귀족의 수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오히려 세습 귀족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내란으로 인해 사멸하거나 파산하여 경제적 능력을 잃은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안정적으로 연금을 얻을 수 있는 궁정에 기거하는 편을 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시민 계급 출신의 신흥 귀족층과 자신들을 구분할 수 있는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해 이들 귀족들만의 행동 규율이 생겨나고 예법서 같은 것들이 출간되기 시작한다. 루이14세는 바로 이러한 세습 귀족층의 수요에 착안하여 귀족들을 궁정에 머물게 하며 귀족층의 세련된 예법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상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은 귀족층을 완벽하게 궁정 안으로 위치시킴으로써, 동시에 귀족층에게 부과되는 특정한 예절로서의 문화적 소양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한 찬란한 궁정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 프랑스 궁정문화의 종합적 표출은 단연 춤이었다. 당시의 예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상적인 사람의 모델을 차용했는데, 그렇기에 이러한 이상들의 반영에 의해 창조된 궁정 무용들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공인된 예절의 반영이자 예법의 대표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복잡한 사회 예법 교육에서 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무용교사(ballet master)들은 세련된 예법을 소화하고 있는 자로서 중요한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상징 : 루이14세와 춤_정치권력과 예술, 문화의 관계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는 ‘춤’은 바로크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예술 장르다. 무용이란 그 자체의 동작뿐 아니라 음악, 의복, 시대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수행되는 종합예술이다. 바로크시대의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의도아래 자리 잡은 궁정 문화와 그 중심으로서 궁정무용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의복, 무용, 음악 등의 다양한 분야가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했다. 루이14세의 시기인 17세기는 춤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성을 가진다. 비록 궁정 무용이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왕과, 신흥 귀족 세력과의 차별성을 획득하려는 전통 귀족층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발생하였으나, 춤을 사랑하고 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궁정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궁정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정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춤>에서 춤은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루이14세가 권력 확립의 매개로서 춤을 이용하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춤이 루이14세의 상징적 힘 그 자체였음을 시사 하는 상징 또한 심어놓은 것이다.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왕의 무대는 그가 성장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춤의 상징성과 카리스마 역시 강해진다. 마치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은 의상과 분장, 소품, 무대장치, 그의 권위를 찬양하는 나레이션이 한 곳에 어우러진 춤은 루이14세를 태양왕-절대군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 기제로 활용된다.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을 직접 무대에 등장시켜 태양왕의 자비로 용서함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무대는 명확한 함의를 가짐과 동시에 왕의 권위에 무릎 꿇는 귀족의 초라함을 강조한다. 다음과 같은 대사들에서 당시의 춤이 루이14세의 명확한 의도아래 정치적으로 활용되었음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루이 “the Music,… it has a political function in the order I wish to establish. It serves me. It servers the state of a God.”(54)
쥴리 “your music made him immortal.”(1:41)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음악과 춤은 루이14세의 힘 그 자체가 된다. 루이14세가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왕과 대립하는 권력자 사촌 콩티가 륄리에게 경고하듯 던지는 말은 “No more dancing.(26분)”이다. 즉, 춤은 루이14세의 가장 큰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병마를 극복하는 묘약은 바로 륄리의 음악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은 음악과 춤, 예술이 루이14세에게 가지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륄리 “we are the instruments, the hands. Instruments are broken, hands cut off.“(39)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던 무용예술은 그 역할을 다 했을 때 쉽게 버려지는 존재가 된다. 춤을, 그리고 재능 있는 륄리를 사랑한 루이14세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견고한 왕좌가 중요할 터, 왕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막을 내리는 륄리의 예술. 왕은 더 이상 춤추지 않고 광활한 궁전은 배경음악도 없이 신하들의 발소리로 메워진다. 이제 왕이 춤을 추지 않아도 될 만큼 왕좌는 충분히 튼튼하다.
     
     



고증의 목표로서 영화의 메시지 
지금까지 풀어놓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 <왕의 춤>은 자신의 배경이 되는 바로크문화를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루이14세의 절대왕정확립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영화 구석까지 재현된 바로크의 특징들은 루이14세가 예술-문화를 매개로 의도한 왕권강화로의 이행을 몸소 드러내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화려한 의복과 장식품, 화려한 건물들 그리고 궁정에서의 유희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들은 모두 지방 영주들의 관심을 뺏어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하기위한 절대군주의 기획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 안에서, 그러니까 역사와 영화 안에서 정치와 예술의 관계, 정치와 종교의 관계 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물음이 관객에게 던져진다. 이를 위해 영화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역사의 사실적 재현에 신경을 몰두했는지 모른다. 단지 화려한 것을 좋아한 왕의 시대로 생각되는 우연이 아닌, 인과관계와 맥락의 결정체로서 해석돼야할 역사로서 절대왕정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로써 몇 백 년 전 다른 공간의 역사를 다룬 영화가 오늘날 이 곳의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좀 더 확장될 수 있다. 오늘날의 역사, 원인과 결과를 가지는 의도된 모든 것에 대한 질문으로.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켄 로치가 돌아왔다. 만드는 영화마다 작품성과 재미, 사회적 메시지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아 온 영국의 영화장인, 믿고 보는 감독 켄 로치가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그 동안 스페인 내전, 니카라과 혁명, 아일랜드 내전 등을 배경으로 삼아 큰 서사를 엮었던 것에 비교하면 이번 영화는 하층계급의 소시민이 주인공이며 이야기도 상대적으로 작다. 게다가 감독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찌질한 청춘들의 코믹한 에피소드가 펼쳐지니 거장 감독이 잠시 쉬어가는 마음으로 만든 소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벌써 77세를 넘긴 노장이니 잠시 쉬어갈 만도 하다.

 

<엔젤스 셰어> 한국 포스터

 

  그렇다고 영화가 소소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청년 실업이 100만명을 훌쩍 넘는 영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지친 젊은이들이 모습을 집중적으로 담았다. 범죄와 처벌에 대한 감독의 시각과 함께 사회의 타자, 이방인들을 보듬자는 관용도 담겨 있다. 노동자, 하층민, 심지어 범죄자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선 수십년 동안 좌파 영화감독의 아이콘이 되어 온 켄 로치 특유의 휴머니티가 녹아있다. 가벼운 코미디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날카로은 사회적 비판이 담겨있는 영화,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통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보자.

 

 

 

 

#1 스코틀랜드의, 스코틀랜드를 위한, 스코틀랜드에 의한?

 

 

 

  영화의 주인공이 반드시 인물일 필요가 없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스코틀랜드적 삶 그 자체다. 스코틀랜드의 두 중심 도시 글래스고와 에딘버러를 배경으로, 구수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들이 등장해,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인 스카치 위스키를 두고 벌이는 소동이 영화의 전부이니 말이다. 게다가 영화는 스코틀랜드인들이 느끼는 소외와 분노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재판 장면이 대표적이다. 청년 백수 라이노(윌리엄 루앤)가 경범죄로 처벌을 받는 이유는 그가 만취한 상태로 엘리자베스 동상을 스코틀랜드기로 덮고 오줌을 갈겼기 때문이다.

 

원래 스코틀랜드기는 이렇게 생겼다. 올해 안으로 스코틀랜드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진행한다고 하니 정말 독립국가 스코틀랜드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스코틀랜드인의 잉글랜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단지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반한 것만은 아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연합왕국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의 경제적, 정치적 주도권은 잉글랜드가 행사해 왔다. 부와 권력은 런던으로 집중되었고, 수 세기동안 자치적 주권을 행사해 온 스코틀랜드는 사실상 영국의 변방으로 전락해 온 것이다. (영국이라는 단어 조차 잉글랜드의 음차이기 때문에 실은 United Kingdom 혹은 Britain에 대한 올바른 번역은 아니다.) 연합왕국에 가담한 덕분에 스코틀랜드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많지만, 오랜 청년실업과 경기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이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유산들을 약삭빠른 잉글랜드인들이 빼앗아갔다는 인식은 영화에서의 언어 사용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인 고가의 위스키를 감별하는 자리에서, 정작 감별자로 나선 사람은 스코틀랜드어가 아니라 점잖은 런던 억양(잉글랜드어)을 구사한다. 구수한 스코틀랜드어는 어딘지 덜떨어지고, 촌스러운 하층민들 주인공들만이 쓰고 있다. 교양 없는 하층 계급일수록 스코틀랜드 억양은 심해지며, 같은 스코틀랜드 안에서도 지위가 높을수록 표준적인 영어 억양에 가까워진다. 각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영어를 도식화하자면 스코틀랜드어 -> 잉글랜드어 -> 미국식 영어 순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식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스코틀랜드 사투리(사실 사투리라는 표현에도 잉글랜드 중심주의가 깔려있다)는 매우 중요한 유머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는데, 외국인 관객이 이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우리나라 조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상상하면 유사할 것이다. 어딘지 덜떨어져 보이는 스코틀랜드어로 치는 드립의 향연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우리나라 자막에서는 모두 표준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어쩌면 사투리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는 네 명의 찐따들이 주인공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켄 로치 감독 자신이 스코틀랜드 인이며, 그와 함께 오랫동안 각본을 맞춰 온 폴 래버티도 스코틀랜드인이다. 심지어 주연을 맡은 배우 폴 브래니건은 주인공 로비처럼 스코틀랜드에서 감옥을 전전하며 밑바닥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일반인이었다. 그는 아들을 얻은 후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해 지역 축구클럽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사회봉사를 하던 중 폴 래버티의 눈에 띄어 전격 캐스팅됐다. (그는 앤젤스셰어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완전히 배우로 변신해 이제 배우로서의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폴 브래니건은 이 영화로 배우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됐다.

 

 

 

#2 Scotch, Single Malt Whiskey

 

 

 

  스코틀랜드인들이 모여 만든 영화라는데, 스카치 위스키가 등장하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 이야기 전개의 중심에는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스카치 위스키, 그 중에서도 한 개의 오크통에서 숙성해 만든 싱글 몰트 위스키가 있다.

 

요런 게 싱글 몰트 위스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직업도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청년 백수 로비는 폭행 사건에 연루돼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 명령을 받는다. 여자친구의 출산으로 아빠가 된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아들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어느 날 사회봉사 교육관의 집에서 난생 처음 몰트 위스키를 맛보게 된 그는 자신이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타고났으며 위스키 감별에 선천적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봉사를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위스키 시음 행사에 갔다가 수십억을 호가하는 세계 최고의 위스키 경매가 곧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타고난 위스키 감별 재능을 이용해 일생일대의 인생 반전을 계획하는데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하층계급 청년들이 스코틀랜드의 특산품이자 상징인 고가의 스카치 위스키를 훔치는 줄거리인 셈이다. 이는 (극중에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 자체로 상징적인 행위이다. 이중의 박탈에 시달리는 스코틀랜드의 청년들이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훔치는 위스키는 이른바 싱글 몰트 위스키’. 흔히 먹는 브랜드 위스키처럼 여러 오크통의 위스키를 블랜딩해 만든 술이 아니라 하나의 오크통에서 바로 뽑은 빈티지 위스키로, 엄청나게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 위스키이다.

 

  그런데 싱글 몰트 위스키는 높은 가격 때문에 대부분의 스코틀랜드인과 무관한 술이 되어있다. 극 중에서 (전설의) 싱글 몰트 위스키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콜로라도 출신의 미국인(돈 많고 교양 없는 미국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이거나 러시아의 대부호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청년들은 위스키를 한 번이라도 먹어본 경험조차 없다.

 

  그러니까 싱글 몰트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의 청년들이 박탈당한, 배제된, 그러나 응당 향유해야 할 어떤 것들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3 The Angels’ share.

 

 

 

  이 영화의 논리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눈먼 돈은 조금 훔쳐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The Angels' Share>는 실은 누구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치 천사의 몫이 날아가듯 조금 슬쩍해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관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누구도 자신이 입은 피해를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런 작은 도둑질이 한 사람의 (혹은 네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초석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도둑질을 허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켄 로치에게 무해한 도둑질은 지극히 합법적인 세금을 통한 재분배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일일 것이다. 극빈층에게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약간의 종잣돈이 제공될 수 있다면, 그 돈은 이미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유층에게 있을 때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의 시각은 순진한 이상주의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천사처럼 따뜻하기만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77세의 노련한 좌파 영화감독이 만들었음을 고려하다보면 어딘가 깊은 사유의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죄와 교정에 대한 켄 로치 식의 철학과 처방이 담겨있는 것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노년의 켄 로치가 (젊은 시절의 날카롭던 발톱을 잃어버린 많은 좌파 감독과 마찬가지로) 관용과 타협의 정신에 물들었을 뿐이 아니라면 말이다.

 

 

 

# 나가며

 

 

 

  <엔젤스 셰어>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영화다. 영화 전반부에는 청년들의 탈출구 없는 삶을 그리며 답답한 마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된 해피엔딩을 향해 가는 주인공들을 흐뭇하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다. 혹여나 갑작스러운 비극이 닥치진 않을까 하는 긴장감은 영화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켄 로치의 성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착하고, 관객은 따뜻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 가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칸 심사위원장 상을 받게 된 것에는 이번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에 이례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 아닐까 하는. 켄 로치 답지 않게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이 영화가 칸에서 수상할 수 있었던 강력한 원동력이 스필버그 감독으로부터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77세의 켄 로치 감독.

 

  청년 문제, 지역 소외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영국은 우리의 미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켄 로치의 <엔젤스 셰어>로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와서, 우리 사회의 현주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닐까.

Ex 8.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선셋>

- 순간의 영원성

 

 

 

 

  '사랑해, 영원히'.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했을 말이리라. 하지만 나처럼 이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족속들도 있을 거다. 그건 '영원'에 대한 약속 때문이다. 그게 부질없는 일임을, 또 부메랑처럼 아픔으로 다가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껏 써본 적이 없다. 정말 '영원'과 '사랑'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젠가 '영원히 사랑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듣고서야 나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사랑해'에서 '영원'은 시간의 무한한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강도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마법 같은 사랑의 시간에 대한 강도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영원'이라는 것. 실제로 어떤 1초는 어떤 10년보다 깊고 넓고 중요하기도 하다. 그런 순간들은 영원에 닿아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거대한 시간의 강도를 체험한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신앙고백인 것.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순간의 사랑을 영원으로 잇는 영화 <비포 선셋>이다.

 

 

  2004년 개봉한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9년 만의 속편이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로맨스 영화임에도 속편이 만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많은 관객들이 주인공 제시와 셀린의 뒷이야기를 너무나 궁금해 했던 것.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속편을 만드는데 우려도 많았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기어코 만들었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의견도 적극 반영되었다. 제시와 셀린에 대한 세 사람의 애착과 궁금증이 관객만큼 컸던 모양이다.

 

  <비포 선셋>은 9년 전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비엔나에서 황홀한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 제시와 셀린이 파리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껄렁하고 제멋대로지만 소년 같던 제시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우수에 젖어있고 지적이며 통통 튀던 셀린은 환경운동가가 되어있었다. 9년의 세월은 많은 걸 바꿀 시간이었다. 제시는 결혼을 해 아들이 생겼고, 셀린은 종군기자인 남자친구가 있다. 메일 것 없어 자유로웠고 그만큼 흔들리던 청춘들은 이제 어딘가에 살짝은 메인 어른이 되었다.

 

  '그들은 6개월 뒤에 만났을까?'.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난 뒤에 남는 질문이다. <비포 선셋>은 그에 답해준다.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현실주의자들은 수긍할 수도 낭만주의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정확히는 제시와 셀린은 현실과 낭만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비포 선라이즈>가 밤의 낭만과 사랑이 출렁이는 영화라면, <비포 선셋>은 낮의 이성이 간밤의 꿈을 곱씹는 영화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거리로 나서 9년 전처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늘어난 주름만큼 삶의 곡절도 늘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여름밤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어 반갑다. 9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 상대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마법 같은 사랑인지를 에둘러 확인하고픈 순간의 머뭇거림이 있다는 것이다. 그 머뭇거림 뒤에 터져 나오는 순간, 참을 수 없게 울컥해진다.

 

  "결혼 날짜를 잡고도 네 생각뿐이었어. 결혼식장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네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어. 우산을 접으며 소시지 가게에 들어가더군. 내가 미쳐가는구나 싶었지. 브로드웨이 13번가였어.”와 같은 제시의 고백이나, “너와 보낸 그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 부어,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라는 셀린의 토로는 그래서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다. '지나간 나의 그녀들도 혹시 그런 생각을 가끔은 할까'하는 생각과 함께.

 

 

 

  연애의 목적은 결국 섹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는 아마 인간이 만든 것들 중 목적으로 가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답답한 절차일 것이다.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여기로 당겼다 저기로 밀었다 하는 세상에서 가장 먼 우회로이다. 섹스까지 닿기 전 연애의 도구는 '말'이다. <비포 선셋>은 쉴 세 없는 대화가 오간다. 그들의 말에 깔린 의미들과 그들이 침묵하는 순간들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의 대화는 몸의 섹스를 하기 전의 전희로 보일만큼 매순간 매혹적이다.

 

  특히 9년 전 그날과 서로에 대한 원망의 대화들은 '살'이라기 보단 '뼈'의 대화다. 어떤 경험 후의 인간은 절대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중의 또 어떤 것들은 삶의 체인 전체를 흔들고 강력한 인력으로 생의 모든 순간을 수렴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 사람의 생의 뼈가 되는 것이다. 제시와 셀린에게 9년 전의 하룻밤은 그들 생의 척추이다. 그래서 척추를 건드리는 대화들은 제시와 셀린을 무너지게 한다. 물론 그와 같은 생의 척추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우리들도.

 

 

 

 

  <비포 선셋>은 제시와 셀린이 셀린의 집에 들어가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듣는 아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 갑자기 끝이 난다. 또 다시 둘이 어떻게 되었을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미완의 엔딩이 둘의 사랑의 완성처럼 보인다. 어쩐 일인지 <비포 선라이즈>와 다르게 이후의 둘이 궁금하지 않다. 영원히 니나 시몬의 노래가 나오고, 셀린은 춤을 추고, 제기는 소파에서 미소 짓는 순간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원히. 그 순간의 시간의 강도가 나에게도 다가왔나 보다.

 

  어떤 하루는 어떤 9년보다 절대로 길 순 없지만, 비교할 수 없도록 밀도가 클 수도 있다. 순간은 끝없이 찬란하게 되살아나는 것으로 영원에 닿는다. 이 영화가 준 순간들은 아마 내 마음 속에서도 영원히 되살아날 것이다.

 

※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미드나잇> 2013년 5월 22일 개봉

 

 

 

<비포 미드나잇> 스틸컷

 

그들은 이번엔 그리스에서 말하고, 걷고, 사랑한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2008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2008) 속의 권여선의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단절의 순간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은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한 채 소리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외침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규와도 같다. 다시 돌아가려 하기에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단절시키는 선. 영화는 시간을 과거로 돌려 그 선이 그어진 순간들을 보여주고, 시간을 더 돌려 그 전의 영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예를 들면 더 이상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 아니면 더 이상 자신이 착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단절시키는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깨닫는다. 그 사실을 당신이 깨달은 후에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절의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는지를 생각해내고 후회하는 것.

 


    위대한 작가는 예리한 통찰로 단절의 순간들을 포획하고, 섬세한 묘사로 그 순간들을 나타낸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랬고, 레이먼드 카버가 그러했다. 미세한 균열을 통해 단절이 시작되던 순간을 나타내기도 했고, 뒤늦게야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소설을 마주하고 나면, 우리도 작가가 되어 우리 삶 속에서 어떠한 단절선이 있었는가를 찾아보게 된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역시 단절의 순간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소설은 '나'와 한 여자가 사랑을 믿는 사람에서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는 그 단절의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단절의 순간은 각 인물의 이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번 글에서는 소설 속에서 이별의 과정을 살펴보며, 그 속에 나타나 있는 단절의 순간을 찾고자 한다.

 


    우선은 한 여자의 이별이야기이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를 만나 여자는 자신의 이별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자는 실연의 아픔을 들이키고 있던 중, 어머니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큰고모님 댁에 선물을 전해주러 가게 된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조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금전적인 문제로 자신을 떠났을지 모른다는 망상이 그날 아침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면 그녀가 무거운 선물 보따리를 들고 큰고모님 댁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4)

 


    그 당시 여자는 자기 소유물의 가치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남자가 금전적인 문제로 떠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여자는 자신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남자가 누릴지도 몰랐을 자신의 소유물들을 세며 무의미한 복수를 행하고 있었다. 자식이 없는 큰고모님 댁의 건물을 찾아간 것도, 큰고모님 부부가 모두 돌아가시면 받게 될 미래의 자기 재산을 확인하려는 옹졸한 속셈이 깔려있던 것이었다.

 


    현관문을 연 여자는 큰고모 댁에 앉아있는 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여인들은 희귀병을 앓는 친지의 완쾌를, 유괴된 손자의 생사를, 바람난 남편의 귀가를 위해 큰고모님댁 위층에 있는 철학관을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안 여인들은 위층으로 올라가고, 큰고모님 부부에게 선물을 전한 여자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여자는 큰고모님 댁에 앉아있던 여인들과 자식을 먼저 보내고 늙어가는 큰고모님 부부의 평안을 빌었다. 여자는 자신이 이렇게 간절히 다른 사람을 위해 빌어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여자는 자신이 큰고모댁을 방문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느꼈다.

 


    이것이 여자의 단절의 순간이자 이별을 마무리한 순간이다.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슬픔을 이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잃은 것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의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별 역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여자는 사랑을 믿는 사람에서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자의 이별 이야기를 모두 들은 는  여자에게 실연을 안긴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자신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사람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후에 그 역시 여자와의 실연을 앓게 된다.

 


그때 나는 어쩌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스물아홉의 그녀로 인해 뒤늦은 실연을 앓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늦어 격렬하지는 않겠지만, 격렬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 입술을 피나게 씹어대진 않겠지만, 희미해진 사진 속 윤곽을 더듬듯 손끝이 닳도록 무언가의 테두리를 하염없이 더듬어나갈 만짐의 세월이 시작되리라는 예감이었다. 그 예감은 지난 2월 내가 이 술집을 찾아든 순간 적중했다. (39)

 


    ‘는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한 때 사랑이었던 여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동시에 는 여자가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고, 자신 역시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한 남자의 단절의 순간이자 이별을 겪는 모습이다. 이제 는 그저 술집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고,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이랬더라면 하고 상상하며 술잔을 들이킬 뿐이다.


    단절의 순간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삶 속에 있는 것을 종이 속 글자로 옮겨온 것이다. 책장을 덮은 혹자는 또는 이 글을 읽고 난 혹자는 훌륭한 탐험가가 되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단절의 순간이 있었는지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단골 술집을 찾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