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영어듣기평가. 요즘 흔히 'listening'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어른들이 ‘hearing'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마 처음 영어듣기평가를 시작할 때 ‘듣는다’를 단순히 번역하여 ‘hearing'으로 써오다가 나중에 'listening'으로 바꿨기 때문에 세대 간에 쓰는 용어가 달라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hear'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소리가 물리적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listen'은 듣는 사람이 들리는 소리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hear‘가 들리는 것이라면 ’listen‘은 듣는 것이죠.

이렇게 듣는 행위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지요. 클래식이든, 가요든 듣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생각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듣는 것에 집중하고,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더 풍부하게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요. 음악에 관련된 역사적 이야기도 해보고, 사회적인 의미도 이야기해보고, 너무 딱딱해지면 음악 자체를 소개하기도 하고 음악에 관련된 영화나 책 등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넓은 분야에 걸쳐 음악을 다룰 것입니다.

‘삐아오’라는 이름 아래 진행될 들리지 않는 음악. 귀 기울여 들어주세요!

 

안녕하세요. 시선블로그 편집장입니다.


2월 3일에 첫인사와 함께 시작한 블로그가 어느덧 4개월 째를 접어들고 있네요.


이제 어느덧 세자리 수를 매일 기록하는 블로그가 되었습니다.


찾아와주시는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번 공지는 6월 15일자로 새롭게 들어오게 된 집필진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롭게 음악과 관련된 글을 써주실 분은  "삐아오"입니다.


'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2주마다 여러분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이제 5명이 아닌 6명의 집필진이 운영하는 시선블로그.


앞으로도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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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와 침묵

지인이 연주회를 갖다오더니 툴툴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옆자리에 앉은 관객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 프로그램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그 관객이 그 사람들을 ‘교양없다’고 나무랐단다. 연주회가 시작되자 다른 사람을 나무란 그 관객은 1악장이 끝나자 박수를 막 치더란다. 혼자 신나게 박수를 친 그 관객을 보고 내 지인은 다시 ‘교양없다’며 약간의 실소를 섞어 툴툴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연주회장에서는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교양에 대한 상식이 없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한 순간에 ‘교양없게’ 만든 것은 관습적 타이밍이 어긋난 박수이다.

그렇게 낯선 얘기는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한 악장(樂章)이 끝난 것과 한 악곡(樂曲)이 끝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뿐. 그 분의 죄라고 하면 조금 용감한 것이었다. 음악회는 관객들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안내 방송이 대변하듯이 ‘연주 도중에는 조용히 해주시고, 휴대폰은 꺼주시고, 연주가 시작되면 입장하실 수 없으며,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말아주시길’ 요구받는 것이다. 침묵은 음악회를 바깥세상과 구별시켜주는 일종의 테두리 역할을 수행한다. 암흑과 더불어 음악회가 열리는 그 공간만 존재하게 하고, 무대 위에서 들리는 소리만 존재하게 한다. 연주회장의 바깥은 단절된 공간이고 음악이 아닌 다른 소리는 소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침묵은 관객들의 몰입을 위한 것이다. 특히 악장과 악장 사이의 침묵은 그 전 악장이 남긴 여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악장과 악장 사이의 침묵이 당연시되는 관습은 19세기 말부터 생긴 것으로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종교의 도구, 종교의 대체물

악장 사이의 박수가 금기시 된 것은 19세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원래 기독교와 음악은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왔다. 성당의 전체 벽면을 파이프로 채우고 웅장한 소리로 사람을 압도하는 파이프오르간이 그 관계를 보여준다. 예배에서 박수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된다. 예배 음악이나 연설이 아무리 좋더라도 박수를 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박수 소리와 비슷한 타악기는 예배 음악에서 배제되고 관악기로만 이루어지기도 했다. 19세기에 들면서 점차 예배와 음악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음악회가 예배라면 지휘자는 사제, 청중을 신도로 보는 것이다. 신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 박수를 치거나 질문을 하거나 깜빡 졸 수 있는 권리가 없고 경건하게 앉아서 들을 권리만이 있다. 음악회가 예배와 동일시되면서 대중들에게도 같은 행동이 요구되었다. 실제로 1865년 헝가리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리스트는 사제복을 입고 지휘를 하기도 했다. 리스트도 음악회와 예배, 그리고 자신과 사제를 동일시한 것이다.

음악회는 예배의 영향을 받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방향으로는 그 자체가 종교화되기도 했다. 19세기 전통적인 종교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정면으로 공격받으면서 그 힘을 점차 잃어갔고, 영적 위안의 영역을 음악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음악에 그 자체의 신성성을 부여한 것에는 바그너의 영향이 컸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이 침묵과 엄숙함에서 연주되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은 몇 가지 연주 개혁으로 어느정도 성공했다. 그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설계할 때 객석의 중간에 통로를 놓지 않음으로써 관중들의 드나드는 빈도를 최소화했다. 그의 음악은 연주가 시작하는 시간을 엄수하고 연주 도중에는 침묵해야 했으며 악장 간의 박수도 금지시켰다. 현대 음악회의 규범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바그너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장 간 박수를 금지하는 규칙 역시 오로지 음악 그 자체에 몰두할 수 있고 음악이 거의 숭배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휘자, 그 독재의 영향

종교적인 이유로 박수를 부정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독재적인 성향이 강한 지휘자들도 박수 금지 규정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과 악기, 그들이 내는 소리를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갖는다. 하지만 무대 위를 장악해도 그 무대를 평가하는 것은 관중이었다. 당시 관중들의 박수는 단순히 끝난 것에 대한 기계적인 박수나 수고의 의미를 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중들이 무대를 평가하는 하나의 표현이었다. 박수를 친다는 행위는 음악을 판단할 수 있을 만한 능력과 그 판단을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줄 용기나 자신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음악에 대해 박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음악에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좋지 않은 음악에는 야유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휘자는 무반응과 야유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싶어했고 악장 간 박수를 금기시했다. 악장과 악장 사이의 박수를 ‘못’ 치도록 하는 규정은 반대로 박수를 ‘안’ 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침묵을 통해 침묵의 부정적 맥락을 제거해버린 것. 무대 밖의 관객 반응에 대한 지휘권까지 욕심을 낸 지휘자의 영향으로 관객들은 마치 지금의 스튜디오 방청객과 같은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체적 청중을 위하여

요즘은 지휘자나 연주자가 청중에게 ‘아직 박수를 치지 말라’는 힌트를 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청중들의 박수 타이밍을 뺏기 위한 노력이다. 지휘자의 경우 한 악장이 끝나고 나서 한참동안 팔을 내리지 않고 들고 있으면서 뒤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피아니스트는 팔을 공중으로 크게 들지 않고 건반 가까이에 손을 두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활을 오래 들고 있는 등의 방식으로 완전한 곡이 아닌 하나의 악장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악보 상으로는 휴지가 있더라도 연주에서는 휴지없이 바로 다음 악장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프로그램이나 안내로 악장 사이의 박수 금지를 알리기도 한다.

하지만 악장 간 박수를 무지한 청중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근본적으로 주체적인 청중이 될 수 있도록 악장 간 박수를 허용해야 한다는 노력도 최근에 보이고 있다. 곡 안에서 악장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면 박수는 각 악장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 음악 연주의 목표라면 그 고조된 감정을 다시 억누르게 만드는 것은 모순되어 있다는 지적한다. 또한 지휘가자 원하는 것이 절대적 침묵이지만 절대적 침묵은 불가능하고 그 공간은 다른 소리가 다시 채우게 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악장 간 박수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서서 포르테로 끝나는 곡에만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청중에게 힌트를 주려는 노력과 악장 간 박수를 허용하기 위한 노력은 모두 청중을 위한 것이지만, 청중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서는 차이가 있다. 

어쩌면 내가 쓰는 하나하나의 글들은 악장이고 전체가 하나의 곡이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하나의 악장이 끝났음을, 그리고 곧 다음 악장이 시작할 것을 발칙하게 박수로 알린다. 짝짝짝! 

Ex 10. 브래드 피트의 <머니볼>

- Just Enjoy The Show

 

 

  몇 해 전, 르느와르 작품전에 다녀왔다. 행복을 그린 화가라는 르느와르. 그는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이미 어둡고 불쾌한데 또 다른 어둠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념대로 그의 그림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입김을 후 하고 불면 그림에서 환한 빛이 먼지처럼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둑한 미술관에 창문이 나 있는 듯 했다. 전시회를 보는 내내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나는 인상파 화가들을 좋아한다. 그 중 르느와르에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그림들이 너무 엽서그림처럼 예쁘고 행복한 풍경을 담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직접 그림을 보니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나무들은 잎바닥 뒤집으며 온몸을 흔들었고, 100여 년 전의 빛은 여전히 살아서 그림 위를 기어 다녔다. 분명,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빛과 미소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건 르느와르가 그린 '그림자'였다. 그의 그림에는 빛만큼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제야 보니, 그는 '그림자를 기가 막히게 그려내는' 화가였다.

 

  낡고 낡은 얘기지만, 삶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나는 '행복총량의 법칙'을 믿는다. 그래서 빛이 강하면 반드시 그림자도 짙어지리라 생각하곤 한다. 영화는 삶을 이야기하는 움직이는 그림이기에 역시 빛과 그림자가 있다. 주로 그림자에서 빛으로 나가는 영화가 가장 많고, 빛에서 그림자로 들어오는 영화가 조금 있고, 그림자 속에 파묻힌 영화가 그보다 아주 적게 있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그보다 더 적은 영화다. 르느와르의 그림처럼 빛만큼의 그림자를 황홀하게 그려주는 영화. 행복총량의 법칙의 영화. 브래드 피트의 <머니볼>이다.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각본가라고 하면 누굴 꼽을까. 많은 걸출한 사람이 있겠지만 나에겐 아무래도 '아론 소킨'이다. <소셜 네트워크>에 이어 <머니볼>을 보면서 확신이 생겼다. 그는 두 영화에서 모두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사람의 성공담을 보여준다. 보통의 영화라면 컴컴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며 감동적으로 끝날 이야기들. 하지만 아론 소킨의 성공담은 다르다. 그의 성공담 속 주인공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며 나아가고(I don't know where to go-Lenka <Show>), 그러면서 너무나 두려워하지만(I'm so scared-Lenka <Show>), 그것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But I don't show it-Lenka <Show>). 아론 소킨은 할리우드에서 성공담을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불려 지지만, 그는 실은 '그림자'를 기가 막히게 그려내는 사람이다. 르느와르처럼.

 

  르느와르. 'Renoir'라고 쓴다. 프랑스어로 느와르(noir)는 검다는 뜻이다. 유치한 말장난을 해보자면 Renoir는 '다시 검다'가 되는 것이다. 나만의 상상 속 르느와르의 그림은 이렇게 탄생한다. 하얀 캔버스 위에 검은색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검은색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검은색을, 다시 또 다시. 그렇게 계속하다보니 어느 순간! 환한, 눈이 시릴 만큼의 빛이 검은 캔버스 위에서 쏟아져 나온다. 마치 검은 우주에서 일순 빛줄기가 폭발하며 생겼던 것처럼. 아론 소킨이 이야기를 쓰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성공의 꼭대기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그림자를 덧대어가며 쌓아 올라가는 것. 그의 영화를 그러니까 '느와르 영화'가 아니라 '르느와르 영화'라고 불러도 될까.

 

 

  메이저리그 만년 최하위에 그나마 실력 있는 선수들은 다른 구단에 뺏기기 일쑤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돈 없고 실력 없는 오합지졸 구단이란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은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요나 힐)’를 영입, 기존의 선수 선발 방식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머니볼’ 이론을 따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머니볼 이론이란 경기 데이터에만 의존해 선수를 쓰는 것. 사생활 문란, 잦은 부상, 고령 등의 이유로 다른 구단에서 외면 받던 선수들을 팀에 합류시킨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며 그를 비난하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결국 전설적인 20연승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줄거리만 본다면 그렇고 그런 뻔한 스포츠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만, <머니볼>은 그런 식의 감동에는 관심이 없다.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르느와르 기법'이 잘 드러난다. 단장 빌리 빈은 어린 시절 야구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으나 부진을 거듭하며 사라진 선수다. 그의 실패는 영화 곳곳에 삽입된다. 그러나 빌리 빈의 어둠은 단지 나중에 있을 성공을 더 빛나게 하려는 도구가 아니다. 그건 빌리 빈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이자 성공의 순간 이후에도 그에게 남을 어둠의 기억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를 보여주는 대신, 경기를 보지 못하고(자신이 경기를 보면 진다는 생각에) 혼자서 앓는 빌리를 비춘다. 스포츠 영화라면 으레 보일 장면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하이라이트가 될 20연승을 달성하는 순간에도 영화는 짧고 간결하게 그 순간을 묘사할 뿐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부분은 예상과 다르게 하이라이트는 20연승 이후다. 보통이라면 20연승은 주인공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어야 하지만, 빌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한다. 여전히 어디로 가야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어쩌면 더 무서워하고,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는다. 성취의 감동이 아니라 고독과 방황과 두려움에 대한 공감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박진감 넘치고 관객으로 찬 야구장이 아니라, 텅 빈 객석과 고민하는 빌리의 야구장이 깊이 마음에 남는다. 거기서 위로의 빛이 쏟아진다. 참 이상한 경험이다.

 

  <머니볼>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스캇 해티버그가 20연승을 확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칠 때다. 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따로 있다. 20연승 후 '레드 삭스'로부터 단장을 제안 받고 빌리는 고민한다. 그에게 피터는 한 마이너리그 선수의 영상을 보여준다. 잘 뛰지 못할 정도로 뚱뚱한 선수가 타석에 들어선다. 투수의 공을 쳐낸다. 이후 그는 전력을 다해 1루로 뛰어간다. 뒤뚱뒤뚱 뛰다가 멈추지 못하고 1루를 지나 넘어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와 1루 베이스를 밟는다. 하지만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그는 홈런을 쳤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멋쩍게 일어나 베이스를 돈다. 모든 선수와 관객의 격려를 받으며.

 

 

  아마 피터는 빌리에게 '당신은 큰일을 했어요. 당신이 이뤄낸 일을 봐요'라고 영상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에 빌리는 "이러니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라는 말을 하곤 나간다. 그런데 빌리는 결국 오클랜드에 남기로 결정한다. 빌리는 그 영상을 보고 무엇을 느낀 걸까. 아마 그 선수의 마음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어찌됐든 필사의 힘을 다해 1루를 밟겠다는 단순하고 간절한 마음. 홈런을 쳐냈건 안타를 쳐냈건 아웃을 당했건 그건 나중 문제다. 결국 야구란 홈런을 쳐내는 것이 아니다. 간절히 필사적으로 진루해 나가는 것이라는 걸. 삶 역시 그렇다는 걸 빌리는 보았을 것이다.

 

  '난 잠시 중간에 멈춰있을 뿐이에요. 인생은 미로 같고, 사랑은 수수께끼 같죠. 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시도는 해봤지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머니볼>의 주제가 격인 Lenka의 <Show> 가사다. 르느와르가 그림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세상이 너무 어둡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인생은 참 미로 같다. 빛만 있지도 그림자만 있지도 않다. <머니볼>은 그런 인생을 보여준다.

 

 

  당신의 타석에 공이 날아오고 있다. 홈런일까? 2루타? 플라이? 헛스윙? 글쎄, 알 수 없다. 하지만 홈런 이후에도 우린 다시 타석에 들어가야 하며, 아웃 이후에도 우린 다시 타석에 설 수 있다. 잘 모르겠고 무섭지만 필사적으로 쳐내고 진루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인생이란 Show이다. 이러니 야구를, 영화를, 인생을 사랑할 수밖에. Just Enjoy The Show!

 

※ 브래드 피트의 <월드워Z> 2013년 6월 20일 개봉(심지어 내한)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제임스 설터 단편집 어젯밤(마음산책, 2010) 속의 단편 포기」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욕망과 이성





   제임스 설터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그리고 그것을 간략하지만 적확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이다. 작가의 통찰은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지금 살펴볼 단편 「포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포기」는 주인공의 아내가 서른한 번째 맞는 생일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원래는 서른 번째 생일이었을 테지만, 미국의 나이 체계와 한국의 나이 체계가 달라 번역자가 한 살을 더해 번역한 듯하다(원서를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나이를 환산하는 것보다는, 서른 번째 생일로 번역하는 것이 아내가 철없는 20대를 갓 지났다는 것을 더 잘 표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글에는 ‘아내는 막 서른한 살이 되었다. 철없는 짓을 할 땐 지났지만 아직 감정이 무뎌지진 않은, 여자의 나이였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주인공의 집에는 주인공 잭, 아내인 안나, 아들인 빌리, 그리고 잭의 친구인 데스가 함께 산다. 주인공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은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데스에 대하여는 조금의 설명이 더 보충되어야겠다. 데스는 시인이다. 잭은 데스를 만나기 전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잭을 그전의 자신으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주는 시였다. 잭은 우연히 파티장에서 데스를 만났고, 둘은 대화를 통해 수많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금세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자유분방하게 떠돌아다니던 데스는 그렇게 잭과 함께 살게 되었다.



   다시 아내의 생일날로 돌아오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포기’가 나오는 대목이다. 생일 축하가 끝난 뒤 아내는 그를 따로 불러 ‘포기’를 요구한다. ‘포기’란 잭과 안나의 부부생활을 영위해주는 일종의 법칙이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한 ‘포기’를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주로 지나치게 사용하는 문구나 식습관, 혹은 제일 좋아하는 옷이 ‘포기’의 대상에 속했다. 그들은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99)



   그들은 상대방에게 ‘변화’가 아닌 ‘포기’를 요구한다. 남편을 따로 불러낸 안나는 놀랍게도 잭에게 데스와의 섹스를 ‘포기’하라고 부탁한다. 아내는 남편과 남편의 친구가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잭은 화들짝 놀란다. 그러고는 곧바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며 제발 믿어달라고 한다.(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아내는 그의 말을 믿겠노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데스가 집을 나가야만 한다고 끝에 덧붙인다. 결국 그 날 오후 데스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난다. 잭은 아내의 처사가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포기」는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굉장히 짧은 이야기다. 꽤나 얇은 분량이지만 이야기의 깊이까지 얇지는 않다. 나는 ‘욕망’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이야기를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이 키워드를 적용할 대상은 데스와 안나이다.



   소설 속에서 데스는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는 그에 대한 묘사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데스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거리 한복판을 나체로 돌아다닐 만큼 자유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욕망의 모습이 이러하다. 욕망은 거짓 없는 순수 그 자체인 것이며, 그러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의 모습은 아이의 모습을 닮아있기도 하다. 아이는 욕망을 통제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욕망인 데스와 어린아이 빌리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데스로 인해 잭은 변화한다. 욕망으로 인해 주체는 변화한다고 쓸 수도 있겠다. 잭은 데스의 시를 읽는다. 데스의 시는 잭을 시를 읽기 전의 자신으로부터,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가 품고 있는 ‘성적 욕망’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후에 우연히 잭은 파티장에서 데스를 만나게 되고, 그 둘은 한 집에서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데스의 시로 잭은 내재된 욕망을 인식하게 되고, 데스를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하게 된다.



   이 즈음에서 안나가 등장해야 한다. 데스가 욕망이라면 안나는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욕망을 통제한다. 통제의 방법은 욕망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억압’이란 ‘불쾌한 경험이나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욕구, 반사회적인 충동 등을 무의식 속으로 몰아넣거나 생각하지 않도록 억누르는 방법’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따르자면 데스는 집을 떠났지만, 잭은 데스를 완전히 떠나보내진 못하였을 것이다. 데스는 잭의 무의식 속에 있다. 이는 그가 데스의 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는 모습으로 소설 속에 나타나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욕망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내재된 욕망이 인식되었다가 다시 축출되는 이야기. 욕망을 이야기의 소재로 선정했을 때, 욕망에 휩싸인 주체가 점차 파멸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떠오르는 예로 『은교』를 들 수 있겠다), 제임스 설터처럼 주체의 욕망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같은 소재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소설을 읽어도 가지각색의 감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설이 단지 여섯 장, 열두 페이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제 다 읽은 책을 베개 삼아 눕고 당신의 감상을 나누고 싶다. 이것도 하나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