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살아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변신




 안녕 당신! 빙구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벌써 이렇게 왔는데, 누군가와 함께 꽃구경이라도 한번 다녀왔는지, 마음도 그와 함께 따뜻한지요. 궁금하네요. 당신의 발걸음은 오늘도 꽃잎처럼 가벼운지, 혹은 지는 꽃의 그림자에 지난 봄의 풍경들이 겹쳐 날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는지.


 빙구는 며칠 전 길을 지나다가 관리인 아저씨가 연못 수면에 온통 떨어진 꽃잎들을 채로 건져 떠올리는 장면을 보았어요.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부시도록 만발했던 벚꽃이, 제가 채 봄을 느끼기도 전에 다 지고 없다는 걸요. 그러고보니 작년에도 이 연못가에서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건져 올리던 풍경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어요. 작년 이맘때 벚꽃이 피어나고 떨어지고, 다시 네번의 계절을 기다려 벚꽃이 피는 동안의 제가 있던 시간을 그려보려고 했는데, 그 순간 아무것도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떤 말을 건져올려야 할지 몰라, 시야에서 사라지는 벚꽃들을 바라보면서 그자리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이런 노래 가사가 흘러나오던 걸 기억합니다. 이렇게 살아지는 게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긴 해.


 살아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사실 같은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갑자기 곁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들이 한때 우리 곁에서 함께 머무르던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나요? 하물며 아무런 노력 없이 주어지는 시간과 나날들, 손쓸 새도 없이 잃어버리는 하루하루의 이 생도 늘 새삼스럽게 새롭고, 지나가면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걸요. 살아지는 것들에 대한, 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오늘의 이야기는, <변신>입니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조사원 : 깨어났는데 새벽이었단 말씀이시네요.
변신남 : 그렇다니까요.
조사원 : 쓰레기 집하장에서 말이죠.
변신남 : 정확히는 쓰레기더미 사이였어요. 사방이 쓰레기봉투였고 머리 위로도 몇 덩이 쌓여있었습니다.
조사원 : 얼마 동안이나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구요?
변신남 : 그걸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거 아닙니까.
조사원 : 그걸 알려 드리려면 저희 쪽에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변신남 : 하고 있잖아요.




 한 중년의 남성이 길을 잃고 찾아온 이곳은 변신대책관리본부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근 서울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무작위적인 변신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부랴부랴 설립한 기관이죠. 머그컵, 스티커, 자전거, 밥통 등등의 사물들로 원인을 알 수 없이 변신한 중년 남성들과, 신고를 받고 그들을 인수받으러 찾아오는 가족들이 매일같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리고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이 남자는, 스스로 두달간 어떤 사물로 변신해있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며 변신대책관리본부에 찾아와 사건의 경위와 그 사이에 이사를 가버린 가족의 행방을 밝혀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요.




변신남 : 변신이 틀림없어요. 내 기억에서 지워진 두 달 사이에 뭔 일이 생긴 겁니다. 집이 사라지고 가족들도 연락이 안 되고. 뭔가 사고가 있는 게 틀림없다구요.
조사원 : 집에서 변신했다면 왜 사모님이 신고를 안 하셨겠어요.
변신남 :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겁니다.
조사원 : 혹시 몽유병 같은 거 앓으신 적은 없으시죠?
변신남 : 지금 장난합니까?

(......)

조사원 : 조만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생님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다보니까 신고를 하지 못한 걸수도 있으니까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요. (......) 기억을 더듬어보세요.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릅니다.

변신남 : (......) 늘 가던 공원에 갔습니다. 점심은 항상 여기 와서 먹거든요. 점심값도 아낄 겸 해서요. 그런데 그 날은 어떤 양복 입은 남자와 밥을 같이 먹게 됐습니다.



 무작정 가족을 찾아 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그의 화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행방은 확인도 되지 않고, 변신기간과 기억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다는 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없는 실직자라는 점, 집 안에서 일어난 변신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 등등 그의 변신사건은 여타 사례와는 달리 유별나 조사하기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협조해 달라는 조사원의 회유에 못이겨 그는, '긴 악몽을 꾸고 깨어난 듯' 무거운 마음으로 두달 전 어떤 상태였는지 애써 떠올려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준비를 하고, 옷을 갖춰입고 나와 하염없이 서성이던 매일의 나날들과 뒤섞여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요. 그는 하루의 이런저런 일들을 쥐어짜내다가, 공원에서 만난 양복 입은 남자를 떠올리기에 이릅니다.




살아진다는 것, 그 무감각의 감각




양복남자 : (먹으며)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안 변하잖아요.
변신남 : 우리 같은 사람들이요?
양복남자 : 이치가 그렇잖아요.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 성실한 사람들이 더 많이 변신을 한다 이겁니다.
변신남 : 그만큼 피로가 쌓인 사람들이니까, 몸의 변화도 다르겠지요.
양복남자 : 우리는요? 나야말로 피로가 켜켜이 쌓인 사람인데.
변신남 :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구요.

(......)

양복남자 : 일하는 사람들 위주로만 변신한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그사람들 일자리, 우리에게 줘야하는 거 아닙니까?
변신남 : 그럼 우리도 변하겠죠.
양복남자 : 그래도 좋으니까 그 자리를 꿰차고 싶은 심정입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이렇게는 더 못살겠어요.



 그와 같이 밥을 먹게 된 양복 입은 남자는 그와 같은 처지입니다.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회사를 갈 때처럼 집을 나오지만 서류 가방 속에는 만화책들이 가득하고, 점심시간에는 '사랑의 밥' 무료 배식을 받으러 공원 벤치를 서성이는. 조용히 밥을 먹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양복을 입은 남자는 자꾸 변신 이야기를 하며 이것저것 말을 붙여댑니다. 처음부터 질병본부가 아니라 재난본부에서 나섰어야 했다는 둥, 보건당국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둥, 노숙자는 걱정이 덜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둥.

 수다스러운 양복남자의 말들에 마지못해 대답을 해도 이것저것 떠보며 자꾸 말을 붙이는 양복 남자. 말로는 짐짓 걱정스러운 듯한 말들을 하면서도 표정은 어딘가 신나 보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 양복 남자가 짜증스러운 한편 낙천적인 태도가 부러워 씁쓸하게 도시락 뚜껑을 덮고 있는데,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양복 남자가 뜻밖의 말을 해 옵니다. 처지도 비슷하고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으니 자기가 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요.



변신남 : 방법이요?
양복남자 :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입니다. 쓸모있는 걸로 변신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비법이 있어요. 나 같은 경우는 금으로 된 롤렉스 시계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마누라한테 전당포에 맡기라고 하는 거죠. 밤이 되면 몰래 변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되고요.
변신남 : 그게... 가능합니까?

(.....)

변신남 : 그런 얘기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요.
양복남자 : 계속,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 나는 왜 이렇게 사나, 나는 우리 가족에게 아무 쓸모가 없구나, 차라리 금덩어리로 변해라... 그런 생각을 아주 간절히 혼신을 다해서 하는 거죠. 그러면서 나에게 주어진 많은 짐들을 머리 가득 넣고 가슴으로 우는 거에요.
변신남 : 가슴으로 울어요? (모르겠다는 표정)
양복남자 :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회적 의무 같은 것들을 가슴에 채우고... 아 이거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 (주위를 살피더니) 내가 딱 한번만 보여줄 테니까 잘 봐요. 어차피 최소 한 시간은 변신해 있어야 하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만화책 보면서 기다리슈.
변신남 : (못미덥게 쳐다본다)
양복남 : 참나. 내 기술을 무시하시네. 변신한 거 보고 놀라지나 마시라니까.

양복남자, 벤치에 앉아 양손을 맞잡고 기를 모으는 자세를 취한다. 한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만의 언어로 중얼거리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고, 미세하게 경련하기 시작한다.
공기중에 보이지 않는 불똥이 튀는 것을 느끼는 변신남.
그 순간, 눈앞에서 양복남자가 사라진다. 순식간이다.
벤치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황금 롤렉스시계.




 이게 무슨 일일까요. 마음만 먹으면 변신을 할 수 있다니.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거기에는 비어있는 벤치와, 황금으로 된 시계만이 놓여 있습니다. 조사원은 여기까지의 그의 진술을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믿을 수 없어 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그 스스로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행동 역시, 자신이 했다고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시계를 챙겨 공원을 빠져나갑니다. 양복 남자가 경솔하게 내뱉었던 것처럼, 나사 하나하나까지 황금으로 만들어진 시계를 전당포에 팔기 위해서.


 그러나 상황은 그의 맘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전당포 주인 : 신데렐라 얘기 아쇼?
변신남 : 뭔데렐라요?
전당포주인 : 12시만 넘기면 호박으로 변하는 신데렐라 말이요.
변신남 : 왜요, 금시계 보니까 금마차라도 생각나십니까?
전당포주인 : 호박이면 죽이라도 쑤어 먹지만 사람으로 변해버리면 난처해지죠. 요즘 전당포에 변신 사기가 판을 칩니다.
변신남 : ....
전당포 : 어떻게 장담하시겠소? 변신품이 아니라는 거 말이요.
변신남 : 속고만 사셨나. 사람이 이렇게 좋은 시계로 변하는 거 보셨습니까?
전당포주인 : 팔찌, 목걸이, 순금 트로피. 더한 걸로도 변할 수 있지요.
변신남 : 이건 우리 형님이 사업차 외국에 갔다 오시면서....
전당포주인 : (말 자르듯 망치를 내 놓는다) 이걸로 한번 내리쳐 보시든가.
변신남 :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전당포주인 : 증명을 해보시라구요. (......) 망가져도 제 값은 쳐 드리지.
만약 사람이 변신한 거라면, 그 사람이 다시는 못 돌아오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하쇼.
이 세상과는 영영 빠이빠이란 말이요. 저번엔 진짜로 내려친 사람이 있었는데... 어찌나 끔찍했던지. 돌아오긴 했는데 반병신이 되었습디다. 평생을 병원에 누워 사는 수밖에.
변신남 : 그럴 일 없습니다. 이건 진짜 시계니까.
전당포주인 : 그럼 쳐 보시오. (빨리 쳐보라는 시늉)
변신남 : (망설인다)
전당포주인 : (떠보듯) 형님이 주신 거라면서... 아까우면 그냥 갖고 가시든가.
변신남 : (결정한 듯 내리치려 하지만 망치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전당포주인 : 뭐해요 안 내리치고.
변신남 : 진짜 이거 망가져도 제값 쳐주는 거죠?
전당포주인 : 증명만 해 보인다면야.
변신남 : (심호흡.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얏!



 열두 시에 옷차림이 바뀌는 신데렐라라도 된 양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전당포주인은 정확하게 꿰뚫어봅니다. 그제서야 그는 그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닫죠. 누가 알았을는지요. 가정과 사회에 치여 도피하듯 다른 사물로 변하게 되는 변신 현상이, 다시 돈벌이를 위한 어떤 조건으로 둔갑하여 이름만 바뀐 채 똑같아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현상을 지속시키는 하나의 부품처럼, 그는 귀신이라도 씌인 듯이 망치를 들어올립니다. 그가 내려치려는 고급 시계가 불과 한시간 전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던, 같은 처지를 가진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잊어버리고 맙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그를 휘어감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삶이라는 틀에서 그 자신을 배제한, 이미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에 무감해진 그 어떤 감각이 그로부터 하여금 시계를 내려치라고 강한 자극으로 부추깁니다.



전당포주인 : (순간적으로 변신남의 팔목을 잡아채는) 잠깐!
변신남 : (멈칫)
전당포주인 : 됐소. 맡겠소. (시계를 종이 상자에 넣으며) 길에서 변신한 사람들 주워다 돈벌이하는 사람들 숱하게 봤지. 나도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 도리는 지키고 살아야 될 거 아뇨. 사람이 있어야 사람한테 사기도 치고 돈도 뜯고 그럴 거 아니요. (돈을 지불한다) 양심은 한번 망가지면 다시는 복귀가 안 되는 거 알죠? 당신을 믿어보리다. 형심이 주신 거라면서? 소중한 것일 테니까 꼭 찾으러 오쇼.
변신남 : ... (돈을 받아든다)
전당포주인 :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만 변신하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죠?

변신남, 대답 없이 돈을 들고 나간다. 그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자신이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을 뒤로 한 채,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합니다. 두둑한 돈봉투를 주머니에 담고,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표정은 참담합니다.




살아진다는 것, 또 사라진다는 것




변신남 : 나 왔어.
딸 : (쳐다보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
변신남 : 학원은 어떠냐?
딸 : (대답 없다)
변신남 : 요즘 대학생들은 배낭여행 많이 가던데. 넌 안가도 되니?
딸 : (아빠 말은 못들은 척하며) 엄마, 국 좀 더 줘.

아내, 나온다. (......) 변신남이 못이기는 척 식탁에 앉자 딸이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변신남 : (돈을 꺼내 놓으며) 저번에 맡았던 공사 말야. 그 쪽 업체에서 대금이 들어왔나봐. 월급도 제때 못줘서 미안하다고.... 보너스다 생각하라면서 주더라구.
아내 : (남편을 돌아본다)
변신남 : 아파트 융자금 밀린 거 꽤 되잖아. 부족하겠지만 좀 보태라고.

아내는 남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돈을 들고 들어간다.
혼자 남아 밥을 먹 는 변신남.
공원에서 도시락을 타먹을 때마다 더 퍽퍽한 느낌이다.

(......)

식탁 위의 조명이 꺼질락말락 불안하게 깜박인다.

변신남 : 어, 이게 왜 이러지?

변신남이 일어나서 전구를 이리저리 만지며 돌려본다.
피아노소리 점점 커지다가 뚝 멈추면, 짧은 암전과 함께 변신남이 변신한다.
그가 앉아 있던 식탁의자 위엔 장난감 피아노 하나가 놓여 있다.



 그리고 진술의 끝에 이르러, 그는 집에서 변신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변신과정은 앞에서 양복남자가 했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잔잔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변신은 사실 그리 놀랍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는 마치 없는 사람인 양, 투명인간인 것처럼 취급받고,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반기지 않습니다.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구름처럼 천천히 흩어지는 시간을 느끼면서, 그는 그렇게 장난감 피아노로 변신합니다. 비극적이게도, 변신 전이나 후나 집안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TV는 여전히 혼자 변신 속보를 연신 떠들어대고, 집안은 차갑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하지요.



딸 : (장난감피아노를 발견하고) 이게 뭐야?
아내 : 그게 뭐니? (살펴보는) 하여튼 이런걸 왜.
딸 : (피아노를 눌러보며) 소리도 안 나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해. 아빠가 주워온 것들로 집안이 온통 쓰레기장이야.
아내 : 고장난 걸 왜 들고 왔대니. 점점 이상한 버릇만 생기고.
딸 : 어떻게 좀 해봐. 언제까지 아빠 저러는 거 모른척할 건데.
아내 : 우리가 이런데 아빠는 오죽하겠니.
딸 : 아빠도 힘들지만 우리도 힘들잖아. 나... 아빠가 매일 노숙자들이랑 밥먹는 거 싫어.
아내 : ...
딸 : 우리 이 집 팔고 이사 가면 안 돼? 더 작은 집으로.
아내 : 이게 어떤 집인데. 아빠가 젊을 때부터 벌어서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집이야. 여길 어떻게 나가.
딸 : 갚을 돈이 더 많잖아.
아내 : 생각 좀 해 보자.
딸 : 아빠도 참. 그냥 확 터놓고 얘기를 하든가. 거짓말도 하루이틀이지. 6개월을 뭐하는 거냐구.
아내 :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아빠야. 그거라도 없으면 니네 아빤, 죽어.
딸 : 그런 모습 더는 못 보겠어. (흉내를 내며) 삼계탕 먹었더니, 아휴 배부르다.
아내 : (장난감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거 어따 치워라.
딸 : 몰라. 고장 난 거, 갖다 버려.
아내 : 니가 버리든가. (방으로 들어간다)
딸 : (따라 들어가며) 저런 것 좀 주워오지 말라고 해 제발.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은 장난감 피아노.
옆에 서서 아내와 딸을 바라보는 변신남의 모습처럼 쓸쓸하다.
딸이 눌러보던 버튼이 뒤늦게 작동하는지 장난감 피아노에서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텅 빈 공간에 홀로 선 변신남만이 그 멜로디를 듣고 있다.
변신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회상이 여기까지 진행된 후 조사원은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을 알려 오고 조사가 진전된 것에 대해서 기뻐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지요.


어쩌면 이미 그는,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양복 남자는, 변신대책본부를 스쳐간 사람들은, 또 아직 스쳐가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물이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변신 현상의 공통점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거든요. 자신이 더이상 자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주어지 공간과 시간이 그를 투명인간처럼 꿰뚫고 그냥 지나가버릴 때, 어떤 관계도 무용해지고 아무런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않을 때 그는 사물과 다름없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때문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졌던' 그 순간부터 이미 그는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는 오래 전부터 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지는 게 어떤 의미도 갖지 않던 그 어느 때부터. 회상에서 돌아오는 그의 귓가에 남은 것은 짐노페디의 피아노 선율 뿐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변신 전과 무엇이 또 얼마나 달라질까요. 차라리 그가 없던 두달이 가족에게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가족들을 안내하는 조사원의 목소리에 조사실의 불빛이 어느 순간 깜박이기 시작하고, 그는 눈을 들어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한번 그는 조용하게 또한번의 변신을 거칩니다.



조사실의 불빛이 깜박인다.
변신남, 고개를 들어 깜박이는 불빛을 쳐다본다.
불이 꺼진다.
짧은 암전 후, 조사원 들어온다.

조사원 : 어? 왜 불이 꺼져있지?

조사원, 불을 켠다. 변신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변신남이 앉았던 자리 옆에 똑같은 의자가 하나 더 놓여있다.

조사원 : 원래 여기 의자가 두 개였었나? (주위를 둘러보며) 허영범 씨, 허영범 씨.
어디 계세요 허영범 씨. 허영범 씨.

변신남을 찾는 조사원의 목소리만 허공의 가 부딪친다.




살아가는, 혹은 살아지는, 혹은 사라져가는 당신에게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살아지고 있나요? 심연에 여기저기 엉킨 채 떨어진 기억들 중 건져올릴 만한 기억을, 관계를, 꿈을 갖고 있나요? 계절은 낙엽처럼 해마다 떨어지고 사람들은 피고 지며 우리 곁을 지나가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느껴진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미 어떤 것으로 변신해 사라져버린 걸지도 몰라요.

 또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누군가를 아무 느낌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벚꽃잎처럼 떨어진 당신 주변의 누군가를 돌아보고 건져올려줄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가 아름다울 한때에만 그와 함께 했던, 사그라드는 그의 모습에 그를 스쳐지나갔던 무수한 또다른 계절은 아니었던가요? 당신이 지금 밟고 있던 이 흙이 한때 누군가의 꽃이었으며 누군가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을 수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나요? 이 모든 질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다시 한번 당신, 잘 지내나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벌써 이렇게 왔는데, 누군가와 함께 꽃구경이라도 한번 다녀왔는지, 마음도 그와 함께 따뜻한지요. 당신의 발걸음은 오늘도 꽃잎처럼 가벼운지, 혹은 지는 꽃의 그림자에 지난 봄의 풍경들이 겹쳐 날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는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http://seesunblog.tistory.com/31)’,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2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차이를 중심으로(http://seesunblog.tistory.com/36)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글의 편의상 김기영 감독의 <하녀> <하녀>(1960)/원작으로, 임상수 감독의 <하녀> <하녀>(2010)/후작으로 표기했습니다.


하녀 (2010)

The Housemaid 
8.9
감독
김기영
출연
김진규, 주증녀, 이은심, 엄앵란, 안성기
정보
스릴러 | 한국 | 111 분 | 2010-06-03



하녀 (2010)

The Housemaid 
4.9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박지영
정보
스릴러 | 한국 | 106 분 | 2010-05-13



장장 3편까지 이어지는 이 글의 출발점은 영화 <하녀>(2010) 성격 규정의 논란성이다. 모두가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리메이크라고 명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원작 <하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선을 해결하기 위해 두 <하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보았고, 이제 그 둘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에 원작original text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개념으로서 린다 허천[각주:1]패러디 이론의 적용을 검토해볼까 한다.

영화 <하녀>(2010)<하녀>(1960)의 패러디 작이라는 주장과 이의 근거가 되는 패러디 이론에 따르면, 두 영화가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다름에도 그 관계를 규정함에 있어 패러디가 아닌 리메이크라는 용어가 선호된 이유는 우리가 패러디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 패러디와 풍자의 혼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패러디는 풍자 그리고 은유, 모방, 표절 등과 명확한 개념적 차별성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정의에서부터 지난한 혼동의 역사를 지닌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따라서 패러디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이를 <하녀>(2010)에 적용할 때 두 텍스트 간의 관계는 명백해질 것이며, 이는 <하녀>(2010)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새로운 비평의 틀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패러디의 개념


조이스의 <율리시즈>20세기의 패러디라고 내가 명명해야 할 범주와 계획에 있어서 차이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등장인물이나 플롯의 차원에서는 호머의 모델과 확장된 의미에서의 유사성이 있지만 이는 아이러닉한 차이점을 가진 유사성이다. <오디세이>는 분명히 형식적인 후경이 되었고 패러디된 작품인 반면 결코 조롱되거나 희화되지는 않는다.[각주:2]


이 부분을 통해 우리가 추출해낼 수 있는, 또한 린다 허천의 서술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패러디의 정의 및 특징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1)차이 및 비평적 거리를 내포한 반복 : 반복은 패러디의 기본 전제가 되는 요소로서, 인지할 수 있는 원작과의 유사성이 없다면 그것은 패러디라 불리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패러디 정의에서 유사성이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패러디를 모방이나 표절처럼 차이보다 유사성이 강조되는 개념들과 구별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작용한다. 2)패러디는 패러디의 후경後景이 되는 원작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는 식으로 희생 또는 훼손시키지 않는다. 패러디가 조롱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가 제시한 여러 패러디의 예시를 통해 입증되며, 패러디의 어원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뒷받침된다.

패러디의 어원학적 뿌리인 ‘paradia’는 대응노래를 뜻하는 희랍어로 접두사 ‘para-’는 대부분의 패러디 이론에서 대응하는(counter), 반하는(against)’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어 패러디란 원작에 반하는 어떤 것이라는 통념을 형성하는 것에 기여했다. 그러나 린다 허천은 ‘para-’‘~와 나란히(alongside of)’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 패러디에 의 의미를 적용하면 기존의 것에 반()하는 대조가 아닌 일치와 친밀성에 기반한 차이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패러디의 정의는 의 의미를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패러디가 풍자와 조롱, 원작을 희생 혹은 훼손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parodia’에는 조롱이나 풍자의 개념을 포함할 필연성이 전혀 없다. 


 



혼란의 이유 : 패러디와 풍자의 관계


하지만 패러디를 정의하고 특징짓는 데에 가장 큰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풍자이다. 전통적으로 패러디 정의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던, 그리고 린다 허천이 패러디 이론을 구성할 때 중점적으로 전복시키고자 했던 것이 풍자와 조롱적 의미의 내포였던 것을 기억할 때, 이 둘의 구별은 패러디 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린다 허천은 풍자와 패러디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두 개념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권내적(intramural) 목표과 권외적(extramural) 목표라는 뚜렷이 구분되는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목표로 번역되는 단어는 ‘target’이다. 그렇다면 패러디의 목표target는 권내적이며 이는 패러디가 자신의 원작을 타겟으로 하고 그것의 변형을 통해 목적을 완수함을 뜻한다. 풍자의 목표target는 권외적이며 이는 풍자의 타겟이 어떤 (원작)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밖의 어떤 것에 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패러디는 그것의 전신이 되는 텍스트(원작) 없이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며 이와 달리 (패러디를 사용하지 않은nonparodic)풍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겨냥할 수 있다.

그런데 패러디와 풍자가 혼동되는 이유는 이 두 개의 장르가 자주 함께 사용된다는 데 있다. 린다 허천이 패러디적 형식과 풍자적 의도 간의 밀접한 상호작용”(80p)이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 의도의 측면에서 풍자를 추구하고 형식의 측면에서 패러디를 사용하는 경우는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만연해 있다.[각주:3] 한편 패러디적 풍자는 풍자라는 장르의 한 형태로서 그 목적은 텍스트 밖의 어떤 것에 있으며(권외적 목표) 풍자적, 수정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매개로서 패러디를 사용한 것을 말한다.[각주:4] 이 두 갈래의 예시에서 주목할 차이는 풍자적 패러디는 원작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은 반면, 패러디적 풍자라 불리는 것은 풍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원작이 되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공격,(브레히트 <마하고니시의 흥망>에서는 그의 원작이 되는 성경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즉 두 개의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목표target에 대한 태도로서, 패러디는 목표-원작에 이중적 태도(경멸과 경외)를 가진다면 풍자는 목표target에 오직 조롱과 희화의 태도를 가진다. 바로 여기에서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역설-패러디의 이중적 속성이 도출된다.

패러디는 원작에 대한 경멸ridicule과 경외homage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패러디는 그 본질 속에 권위와 위반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패러디는 원작과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원작에 대한 경멸의 뜻을 표출하면서도 반복이라는 필수 조건에 의해 원작에 대한 경외를 표한다. 공인된 기준의 위반이라는 모든 패러디 담론의 내면적 원칙을 언급할 때, 위반은 그 자체로서 위반을 가능하게 하는 제한된 존재의 인정을 수반한다. 패러디는 기존의 것의 연장선에서 그것과 단절을 시도하는, 보수적 힘과 혁명적 힘의 충돌이다. 패러디는 원작과 명백히 포괄적으로 연루하면서도 그것과의 배제적 거리를 설정한다. 패러디의 이중적 속성은 앞서 살펴본 패러디의 어원 ‘para-‘의 두 가지 의미-’~에 반하는’~와 나란히‘-에도 암시되어 있다.

이러한 패러디의 이중적 속성은 패러디와 풍자를 구별하고 패러디를 패러디로 만드는 조건이 된다. 정리하자면, 패러디는 경멸의 성격 때문에 종종 풍자와 혼동되지만, 동시에 경외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풍자와 달리 목표(target:여기서는 원작) 그 자체를 온전히 훼손하고 깎아내리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풍자는 목표(target:풍자는 본래 작품 바깥 어딘 가에 존재하는 권외적 목표를 가진다는 것을 기억하자.)가 되는 것 자체를 조롱하고 훼손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달성한다. 그리고 패러디적 풍자는 풍자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패러디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원작에 대한 공격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하녀>(2010)<하녀>(1960)의 패러디라면


그렇다면 <하녀>(2010)가 패러디라는 형식을 활용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차이를 통한 주제의식의 전환이다. <하녀>(2010)<하녀>(1960)의 플롯 및 갈등 전개 양상을 반복하되 그 위에 새로운 변형들을 추가함으로써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 즉 주제의식의 적극적 전환을 가져왔다. 원작 <하녀>(1960)가 불륜과 치정관계를 중심 화두로 두고 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이 영화의 배경으로서 자연스레 반영되고 있다면 후작 <하녀>(2010)는 영화의 전체 구조 자체가 한국 사회의 계급 구도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기능한다. 원작의 초점이 하녀와 주인 부부의 갈등과 그 과정에서 표출되는 하녀의 욕망과 광기에 맞추어져 있다면 후작의 초점은 극명한 계급 구도와 그 안에서 소외되는 인간성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전환은 같은 제목의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된다. (패러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권외적(사회적도덕적) 맥락과 결부된 새로운 주제의식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하녀>(2010)는 풍자적 패러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풍자적 패러디로서 <하녀>(2010)가 얻는 것은 둘째, 사회적 영향력의 강화이다. <하녀>(2010)는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김기영 원작의 작품을 재제작한다는 것만으로 큰 화제-특히 필연적인 비판과 우려-였다. 부정적 반응의 선도가 아류작에 대한 비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한다 해도 이는 그 자체로 동시에 관심과 주목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녀>(2010)<하녀>(1960)의 명성에 편승하여 자신의 존재에 주목하게 만든 것이고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풍자적 패러디의 목적-권외적 맥락의 효과 극대화를 유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린다 허천 역시 작가들이 일차적 충격을 증강하고 아이러닉한 대조를 강화시키기 위해 그 매개로 가장 친숙한 텍스트들의 패러디를 선택 사용한다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패러디스트가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변형-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특히 그 목적이 권외적 맥락에 있을 때, 그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것도 요구되는 능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작과는 다른 주제의식을 가진 <하녀>(2010)가 취한 전략은 영민한 것이었다.

 

 



영화 <하녀>와 패러디, 새로운 평가


패러디는 옹호자를 필요로 한다.”[각주:5]

 

오랫동안 패러디는 기생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이러한 통념은 패러디가 현대 예술의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패러디와 풍자의 여전한 혼용은 패러디를 원작의 부산물로 치부하고 풍자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표절과 달리 동일한 기반을 부정하지 않고, 모방과 달리 차이, 즉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패러디의 가치는 옹호될 수 있다. 주어진 텍스트의 제한성을 뛰어넘어 분명히 새로운 또 하나의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패러디의 가치와 창조성을 인정할 때, 패러디스트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새롭게 전환시킬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기존의 소스들을 발굴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이다영화 <하녀>(2010) 역시 감독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매개로서 원작 <하녀>(1960)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대중이 예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패러디함으로써 전환된 주제의식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이번 글을 통해 <하녀>(2010)<하녀>(1960)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패러디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 패러디라 생각하지 않아도 영화를 관람하는 데 지장은 없다. 다만 패러디임을 인지하고 유사성과 차이에 주목하여 원작과의 상호작용을 포착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작품 해석의 지평이 열릴 것이라 기대한다. 이렇게 패러디의 예술적 가치는 인정되며 그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1. Linda Hutcheon, O.C. (born August 24, 1947) is a Canadian academic working in the fields of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opera, and Canadian Studies. Hutcheon describes her herself as "intellectually promiscuous", as she brings a cross-disciplinary approach to her work[1] She is University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English and of the Centre for Comparative Literature at the University of Toronto, where she has taught since 1988. In 2000 she was elected the 117th President of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the third Canadian to hold this position, and the first Canadian woman. She is particularly known for her influential theories of postmodernism. [본문으로]
  2. 린다 허천, 『패로디 이론』, 김상구 윤여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2. pp.13-14 [본문으로]
  3. 풍자적 패러디의 예시를 보자. 호쿠자이의 <후지산의 36경>을 패러디한 마사미 테라오카의 <후지산의 새로운 광경들 : 쾌락보트의 침몰>의 인물들은 에도시대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지만, 각 인물들에 카메라와 삼각대와 골프클럽을 새로이 추가함으로써 이 시대의 ‘골프광’이라는 새로운 풍자적 의미를 확실하게 부여한다. [본문으로]
  4. 패러디적 풍자의 예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마하고니 시의 흥망>을 보자. 브레히트는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인들의 탈주와 지도자 모세, 구세주 예수의 스토리를 풍자적 의도를 가지고 패러디하며 새로운 세계의 계율은 패러디된 성서의 규범적 기호들이다. 이 모든 패러디는 기독교적 맥락을 거부하고 풍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본문으로]
  5. 린다 허천, 『패로디 이론』, 김상구 윤여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2. p.11 [본문으로]

[근근한 가이드] 울부짖음(HOWL) -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19551013일 밤 11시경, 샌프란시스코의 식스 갤러리에서 와인에 적당히 취한 긴즈버그가 연단에 올랐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지식인, 보헤미안들을 바라보며 긴즈버그는 가볍게, 그러나 격정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굶주린 벌거숭이들,

몸을 끌고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아 흑인가를 방황하며,

천사 머리의 비트족들이 별빛 가득한 밤에 고대의 성스러운 하늘과의 연대감을 기대하지만 오직 기계의 움직임만이 가득할 뿐

  10쪽 가량의 긴 시를 20분이 넘게 낭독하는 동안 군중은 점점 그의 말에 몰입해 갔다. 시대적 절망과 상실감이 긴즈버그의 입에서 시적인 언어로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휘파람을 부는 이도 있었고 입으로 맞아’, ‘그래그래맞장구를 치는 이도 있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이도 있었고, 슬며시 옆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이도 있었다. 모두의 가슴에 눈물이 흘렀다. 시라는 것이 본래 성스러운 제의로부터 출발했다면, 그 자리는 가히 종교적 신성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즈버그의 정제되지 않은 야성적 언어는 대중이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분노와 절망을 찌르는 것이었고, 동시에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낭독이 끝나고 나서도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위대한 시의 탄생을 목도했음을 알았다. 그 자리에 있던 로렌스 펠링기티(Lawrence Ferlinghetti)는 바로 긴즈버그에게 전문을 보냈다.

위대한 문인의 길에 들어선 것을 환영하오. 원고는 언제 보내주겠소?”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출현을 알린 시, “울부짖음(HOWL)”은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태평한 시대, 1950년대 미국의 평화로운 외양을 찢고 나온 청년들의 반문화 선언이었다. 그것은 위선적인 평화로 가득한 아이젠하워 시대에 청년들이 던진 폭탄이었고, 60년대 혁명세대의 탄생을 예비한 서곡이었다. 누구나 청년 문제를 말하고 세대 갈등을 걱정하지만, 누구도 혁명적 선언을 포효하지 못하는 오늘, 시원한 울부짖음으로 젊은이의 심장을 뒤흔들어놓고 미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된 앨런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을 들어보기 위해 1950년대 미국으로 떠나자.

 

# America in 1950s

  1950년대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의 긴박하던 세계정세와, 68혁명을 포함한 60년대 후반의 격동의 시절 사이에 낀 일종의 과도기이자 평화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1950년대는 전후질서를 재건하는 시기이면서, 68혁명가 태동하는 시기로, 요컨대 50년대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전후의 역사와의 연관성을 통해 이해되는 시기인 셈이다.

  그래서 모순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평온한 나날이었다. 파시즘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미국은 자유의 수호자이자 세계의 경찰로 등극해 명실상부한 슈퍼파워가 되었다. 포드주의적 법인자본주의는 영원한 인류의 번영을 보장하는 듯 했다. 미국이 바라본 세계는 낙관적인 희망에 춤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번영의 보증서를 확인하듯 공산품을 구매해댔다. 냉장고, 세탁기, 오븐, 라디오 등 공산품으로 방을 채울 때마다 사람들은 한층 더 자유로워졌고, 마이홈과 마이카가 표준적인 미국적 삶이 되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유로운 미국의 번영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가 춤을 추던 아메리칸 드림의 장단은 이상화된 것이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미국의 번영 아래에는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미국이 수호한 지구적 평화는 소련과의 갈등을 감추고 있었다. 마셜플랜과 트루먼 독트린 이후 파시즘에 공동으로 대항했던 두 세력은 점차 멀어져갔다. 이에 따라 국내적 자유도 점차 좁아져 갔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미국이 자랑하던 정치적 자유마저 제약하며 아메리칸 드림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메리카 핵가족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평화로운 삶은 빈곤과 차별에 직면한 흑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남부에서는 투표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직시하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후 미국의 화려한 번영은 거대한 하나의 위선이었다.

 

# BEAT Generation

  침묵과 위선을 뚫고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이른바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이라는 일련의 문학·예술가 집단이었다. 중심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었지만, 유사한 움직임이 미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비트 세대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주류 문화에 대한 거부, 성의 개방, 영적인 체험 등을 탐구했다.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퍼링게티 등이 내놓은 작품들은 대개 혼란스럽고 외설스러운 표현 투성이였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장황설도 많았다. 마약과 재즈, 섹스, 선불교의 수양 등으로 생기는 고도의 감각적 의식을 통한 개인의 해방을 주창했다. 밥 딜런과 히피들과 모든 미국 산 반항아들의 선구자가 등장하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곧이어 올 히피라는 거대한 해일의 시작이었다.

  매카시의 억압과 허울 좋은 아메리칸 드림 속에 신음하던 동시대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비트족은 출세교육도덕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했고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직업 역할이나 가족 외부에서 정체성을 추구했다. 한 마디로 규율이 없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허무주의에 전념하고, 동방적 신비주의, 재즈, , 약물, 문학 등에 집착했다. 정치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대개 정치와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내면에 천착했다. 그러나 기성 세대가 추구하던 가치에 대한 비트세대의 반감, 위선적 삶에 대한 경멸, 물질주의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는 이후의 세대에게 물려줄 거대한 유산이었다. 비트 세대는 짧은 유행에 그쳤지만, 그 저변의 사고는 분화하고 훨씬 더 급진화될 것이었다.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은 그 자체로 비트 세대의 선언문이었다.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해방을 얻고자 했던 비트 세대의 삶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긴즈버그의 장편 시는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격렬한 탄핵이며, 동시에 비트세대를 향한 통절한 애가(哀歌)였던 것이다.

 

# HOWL

이제 본격적으로 울부짖음을 파헤쳐 보자.

시는 그가 잠시 정신병원에 있을 때 만난 칼 솔로몬(Carl Solomon)을 위해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도 동시대의 좌절한 청년들 모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시작은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인내를 갖고 읽어보자. 그럴 가치가 있다.)

“I saw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destroyed by madness, starving hysterical naked,

dragging themselves through the negro streets at dawn looking for an angry fix,

angelheaded hipsters burning for the ancient heavenly connection to the starry dynamo in the machinery of night,

who poverty and tatters and hollow-eyed and high sat up smoking in the supernatural darkness of cold-water flats floating across the tops of cities contemplating jazz,

who bared their brains to Heaven under the El and saw Mohammedan angels staggering on tenement roofs illuminated,

who passed through universities with radiant cool eyes hallucinating Arkan- sas and Blake-light tragedy among the scholars of war,

who were expelled from the academies for crazy & publishing obscene odes on the windows of the skull,

who cowered in unshaven rooms in underwear, burning their money in wastebaskets and listening to the Terror through the wall, who got busted in their pubic beards returning through Laredo with a belt of marijuana for New York,

who ate fire in paint hotels or drank turpentine in Paradise Alley, death, or purgatoried their torsos night after night with dreams, with drugs, with waking nightmares, alcohol and cock and endless balls, (후략)”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불안하고 굶주린 벌거숭이들,

몸을 끌고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아 흑인가를 방황하며,

천사 머리의 비트족들이 별빛 가득한 밤에 고대의 성스러운 하늘과의 연대감을 기대하지만 오직 기계의 움직임만이 가득할 뿐인

  이후는 who로 시작되는 어구가 반복되며 긴즈버그가 목격한 비트세대의 모습들이 표현되어 있다. 문장은 끊길 듯 끊길 듯 다시 who로 되돌아오며 좌절과 허무주의, 분노에 휩싸인 채 광기로 스스로를 파괴해가는 동시대인들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who로 시작하는 어구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된다.

“What sphinx of cement and aluminum bashed open their skulls and ate up their brains and imagination? Moloch! Solitude! Filth! Ugliness! Ashcans and unobtainable dollars! Children screaming under the stairways! Boys sobbing in armies! Old men weeping in the parks! (후략)”

어떤 시멘트와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스핑크스가 스스로 두개골을 부수고 자신의 뇌와 상상력을 먹어버렸는가? 몰로크! 고독! 쓰레기! 추함! 재떨이와 얻을 수 없는 달러들! 계단 아래서 비명지르는 어린이들! 군대에서 훌쩍이는 소년들! 공원에서 우는 노인들!”

  이후로는 계속해서 Moloch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Moloch는 기계, 물질, 자본, 위선 등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몰로크에 대한 분노로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던 긴즈버그는, 세 번째 파트에 와서 완전히 목소리를 바꿔 우리를 위로한다.

“Carl Solomon!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re madder than I am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 must feel very strange

I'm with you in Rockland

where you imitate the shade of my mother

I'm with you in Rockland (후략)”

칼 솔로몬!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나보다 더 미친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몹시 이상하게 느끼고 있을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내 엄마의 그늘을 흉내내는 그곳에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칼 솔로몬을 만났던 정신병원을 암시하는 록랜드(Rockland)’에 함께 있음을 반복하면서 긴즈버그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내민다. 너만 고독한 게 아니야. 너만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 미친 세상에,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어. 나는 록랜드에서 너와 함께 있어. 마법처럼 계속해서 주문을 되뇌이면서, 긴즈버그는 비절한 애가(哀歌)로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해방시킨다.

  그의 시는 신화적이며 웅변적이다. 기본적으로 눈으로 읽기 위한 시가 아니라 마음을 담아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반응하는 시다. 음유시인이나 고대 예언자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이다. 비트 시인들은 시를 까다로운 강단에서 해방하여 '거리로 돌려보내자'고 말하곤 했다. 긴즈버그는 시를 청중 집단의 종교적 체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나가며

  1950년대 미국과 비트세대, 그리고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이제 직접 뛰어들어 보는 일만 남았다. 놀랍게도 긴즈버그가 직접 낭독한 울부짖음의 여러 버전들은 인터넷으로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 중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현대의 음유시인 긴즈버그의 목소리에 빠져 있다보면, 아마도 비트세대가 느꼈던 울림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멀리 떨어진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시 낭독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우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던 옛 명언을 긍정할 수 있을까. 여전히 갈 길을 모르고 혼란스럽기만 한 오늘, 긴즈버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본다. 나에게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읽기 전 주의사항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인용 쪽수는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창비, 2007) 속의 중편소설 몽고반점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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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그리고 원시성

 

 

 


   한강의 중편소설 몽고반점은 인위적이고 이성적인 현대사회에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원시성을 동경하는 주인공이 파멸을 겪는 과정을 적어놓은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조금 특이한 점은 현대사회와 원시성이 등장인물이 되어 등장했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현대사회를 대표하고, 주인공의 처제 영혜는 원시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주인공의 처제인 영혜는 어른이 되어서도 엉덩이에 푸른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 자연스레 사라지는 몽고반점은 순수했던 시절의 징표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몽고반점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혜가 문명의 시대를 살면서도 아직 원시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몽고반점뿐만이 아니다. 예술가인 주인공은 영혜를 처음 본 순간에서도 어떤 원시성을 감지한다.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78)

 


   그런가 하면 주인공의 아내와 장인은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내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굉장히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내는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솔직한 감정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아내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갑갑함을 느끼며 비인간적이라 생각한다. 아내가 현대사회의 이성적인 면을 보여준다면, 장인은 현대사회에 감춰진 폭력성을 나타낸다. 장인은 소설을 통틀어 몇 줄의 분량만을 차지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이다. 가장 이성적이라는 현대사회의 폭력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이 소설의 독특한 면은 원시성이 동물적인 모습이 아니라 식물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강 작가 특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시성을 나타내는 영혜는 채식주의자의 모습으로, 꽃을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원시를 떠올렸을 때, 우리는 야생의 동물과 같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만큼은 원시를 야만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것으로, 폭력적인 모습이 아닌 평화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현대사회를 나타내는 장인의 모습이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본 원시가 아닌, 새로운 원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난 부분 중 하나는 현대사회가 원시성과 맞닥뜨렸을 때의 모습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는 현대사회가 원시성을 다루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매끄럽게 보기 위하여 소설 속 순서와는 다른 배열로 장면들을 살펴보겠다. 처음으로 볼 장면은 주인공이 온몸에 꽃을 그린 뒤에 영혜와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

 


   그는 섹스 도중 "어디선가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을 계속하여 듣게 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것이 자신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지금까지 섹스할 때 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교성은 여자들만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8) 이 장면은 현대사회가 원시성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영혜와의 섹스를 통해 그동안의 섹스는 이성의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섹스의 순간은 한 개인이 가장 본능적이고 원시적으로 변하는 때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섹스는 어떠해야 한다와 같은 이성의 통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볼 장면은 원시성을 맞닥뜨린 아내의 반응이다. 며칠 전 영혜의 집을 다녀온 주인공은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아내와 격렬하게 섹스를 하게 된다. 평소와는 다르게 격정적인 섹스가 끝난 후 그는 돌아누운 아내의 중얼거림을 듣는다. ‘무서워요.’ 아내는 조금 흐느끼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원시의 모습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만다. 원시의 모습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잊혀진 모습, 이성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한다.

 


   첫 번째 대응방법은 원시의 모습을 자신과 같이 문명화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지만, 주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해진다. 소설은 채식 문제로 처제와 다투는 장인의 모습을 통해 이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처가 식구들은 고기를 유난히 즐기는 편인데, 처제가 어느 날부턴가 채식을 한다면서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장인을 비롯한 모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처제가 딱할 만큼 말라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녀를 심하게 나무란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의 장인이 반항하는 처제의 뺨을 때리고, 우격다짐으로 입 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은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81)

 

한강의 소설에서 육식은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장치이다. 오로지 먹기 위한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고 포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상징인 듯하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멈추지만 장인은 이를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는 원시성을 마주한 현대사회가 힘의 우세를 통하여 원시의 대상을 문명화하려는 모습이다.

 


   또 다른 대응방법은 원시의 모습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내의 행동은 이러한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내는 자신의 동생과 자신의 남편이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남편에게 침착하게 말한다. “구급대를 불러놨어요.”,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소설은 그 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은 베란다에서 햇빛과 교접하려는 듯 서있는 영혜를 묘사하며 끝난다. 그러나 그 후에 앰뷸런스가 도착하여 그들을 태울 것이고, 그들은 정신병원에 감금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보낼 것이고, 원시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격리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잿빛 도시에서 우리는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낀다. 갑갑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시의 자연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길가를 따라 빼곡이 가로수를 심고, 비싼 땅 한 가운데 넓은 공원을 만든다. 아름다운 색을 머금은 꽃과 높이 뻗은 나무를 보며 갑갑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트인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들이 자연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일렬로 수놓은 가로수와 계획적으로 조성된 공원은 그야말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 누군가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날 것의 원시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Ex 7. 송해성의 <파이란>
- '만약'이라는 두 글자
 
 

 
  어떤 단어들은 문득 굴러들어와 마음에 콕 박혀버리곤 한다. 사랑, 상처, 청춘 따위의 말들. 그러나 언제나 내 맘에 아프도록 꽉 박혀 한동안 빼내지 못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바로 '만약'이라는 단어다. 언제 어떻게 박혔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무릎이 꺾이고 왈칵 뜨거워지는 순간. '만약'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비오는 봄밤에 술집은 '만약'으로 앓는 사람들로 꽉 찬다. 
 
  만약에 우리 집이 부자였다면, 만약에 네 맘을 알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이라는 단어엔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무망한 바람 그리고 아픈 오늘에 대한 한탄이 있다. 그러니 어디 이만한 안주가 또 있을까. 찰랑찰랑 술잔을 가득 채우고, 찬란찬란 생을 쓰게 들이키는 것. 우리가 '만약'을 마음에서 빼내는 분투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들을 때마다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콕 박혀 빠지지 않는 영화. '만약'이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무너지는 남자의 영화. 송해성 감독, 최민식·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 '만약'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굴러가게 만드는 연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같은 질문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만약'의 장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리 그려보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 조각을 맞춰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 역시 굴러가려면 '만약'은 필수다. 영화 <파이란>은 그러나 '만약'이라는 희망의 연료도 가져보지 못했던 남녀의 빗나간 사랑이야기다.
 
  강재(최민식)는 비디오방에서 동네 학생들에게 불법포르노를 유통하는 삼류 건달이다. 강재의 유일한 낙은 오락실에서 동전을 뜯어내 하는 오락이 전부다. 친구이자 건달 동기인 보스 용식(손병호)에게 무시당하고, 심지어 건달 후배들에게도 대우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강재는 불법포르노 유통으로 열흘 간 구류를 살다가 돌아오는데, 용식이 상대 조직보스를 살해하는 현장에 휘말리게 된다. 용식은 강재에게 배 한 척 사서 고향으로 돌아갈 돈을 줄 테니, 대신 감옥에 들어가 달라고 부탁한다. 삶에 어떤 희망도 없었던 강재는 용식의 부탁을 승낙한다. 
 
  그때 마침 1년 전 서류로 결혼을 해줬던 중국 여자 파이란(장백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던 강재지만, 남편 자격으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를 찾아간다. 
 

 

 
  되는대로 살아온 강재에게 삶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에겐 '만약'이라는 단어가 들어와 박힐 수가 없다. '만약'은 가능성의 단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상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만약'이라는 단어가 굴러들어와 콕 박히게 된 것은 죽기 전 파이란이 남긴 편지 때문이다. 
 
  파이란은 순수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곁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강재 외에 아무도 없다. 그녀는 직접 얼굴도 보지 못한 강재에게 위안을 얻고 조금씩 사랑하게 된다. 암흑 같던 그녀의 삶에 희미하지만 새로운 빛을 준 것이 강재의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파이란 역시 강재 때문에 '만약'을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툰 한국어로 '당신이 가장 친절하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파이란의 편지는 강재에겐 처음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다. 그 순간,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순간. '만약'이라는 단어가 강재의 마음에 박히게 된다. 그때부터 삶은 전과 다르게 나아간다. 만약 내가 건달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파이란과 만나서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만약 편지를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었더라면,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강재의 삶을 변화시킨 마법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뒤였다. 무도회가 끝난 뒤에 나타난 마법사처럼 그것은 아픈 마법이 된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뻘쭘히 선 그의 모습이, 시체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편지를 읽으며 떨리는 어깨가 그래서 더 슬프다. 파이란의 장례식을 통해 강재는 비로소 진짜 그녀의 남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강재는 용식의 제안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의 삶이 가능성을 향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재는 용식의 복수로 고향으로 떠나기 직전에 죽음을 맞는다. 꿈처럼 봄바다에 선 파이란의 모습을 보며. 
 
  영화에서 강재와 파이란은 끝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파이란이 강재를 찾아왔을 때 강재는 경찰에 끌려갔고, 강재가 파이란을 찾아왔을 땐 파이란은 차갑게 식은 뒤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더더욱 '만약'이라는 단어를 품게 된다. 그들이 만났더라면, 파이란이 살았더라면, 강재가 살아서 고향에 갔더라면, 그랬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며칠 술을 마셨다. 마음 속 돌멩이를 빼내는데 한참이 걸렸다.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강재의 짧은 답장을 대신 전해보기로 한다. 강재와 파이란이 봄바다에서 만날 수 있길.
 
 
파이란에게,
 
당신은 나를 몰라요. 나는 친절한 사람도 사랑할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나도 당신을 몰라요.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떻게 웃는지 나는 몰라요. 
 
그래도 파이란. 
나를 알아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가장 친절한 사람이에요. 
 
'안다'는 것이 정보를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라면, 
나는 당신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당신이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알아요. 다 알아요. 
알아요. 다 알아요.
 
만약 당신을 본다면 안아줘도 될까요?
만약 당신이 봄바다에 여전히 서있다면, 그리로 갈게요.
만약, 만약에….
 
 
 




 
※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가족> 2013년 5월 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