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81건
- 2013.04.12 5. 외로움에 관하여, 그 우주적 은유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 2013.04.10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 2
- 2013.04.08 [근근한 가이드]『무기의 그늘』- 황석영 1
- 2013.04.04 [룽의EX] 황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 행복과 항복
- 2013.04.02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사라져버린 '그'를 이해하는 방법 5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외로움에 관하여, 그 우주적 은유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빙구는 우주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즐거운 일이 있었던 날이나, 꿀꿀하고 우울한 날이면 침대에 누워 우주를 상상해보곤 한답니다. 광막한 공간이나 별들이 가지는 열기나 냉기같은 것, 그 상상할 수도 없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와 중력과 표정없이 궤도를 도는 행성들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그 속의 지구와 그 지구 속의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당신도 가끔 우주를 생각하나요?
우리 은하에 있는 별들은 약 천억 개 정도라고 해요. 그리고 그 은하들이 이 우주에 약 천억 개 정도씩 있다고 하구요. 생각해보세요. 천억 개 곱하기 천억 개 분의 일이 지구라는 걸. 그 위의 육칠십 억 명의 사람들 중 하나인 저와 당신. 영원한 우주에 비하면 백년도 안 되는 초라한 이 인생과, 그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에서 아름답지 않은 우리. 우리의 존재는 그저 우주의 귀퉁이 어딘가를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우주를 꿈꾸며 살아가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죠. 평생 닿지 못할 빛을 그리워하는 거니까요. 그건 어쩌면 아주 외로운 일일지도 몰라요.
오늘 가져온 이야기는 그런 외로움이 엿보이는, 아주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소설입니다. 한때는 잘나갔으나 이제는 계약직으로 떨어진 한 세일즈맨의 팍팍한 삶을 우주적 스케일로 옮겨 놓은 한편의 풍자극, 박민규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랍니다.
팍팍한 지구의 삶
이야기에 앞서 잠시 소개를 하자면, 이 소설은 2010년 제 34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던 박민규 작가가 자선대표작으로 직접 선정했던 작품이랍니다. 덕분에 한국소설문학의 정수라고 불리우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표지를 아주 발칙하게 장식한 바 있지요. 그래서인지 늘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으로 문단의 권위를 곧잘 희롱하곤 했던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는데요. 특유의 유머감각과 재기발랄한 필치로 무장된 가운데, 우리네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날선 씁쓸함으로 독자를 찔러옵니다. 진정한 코미디는 언제나 짙은 페이소스(pathos, 비애감, 동정과 연민의 감정, 애상감)을 수반한다고 했던가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인생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것은,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해왔고 마주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부딪칠, 비루한 삶의 한계이기 때문이겠지요.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찬밥처럼 팍팍하기만 합니다. 하긴, 우주며 별이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에겐 차 한대 안 팔아주는 돌덩어리들일 뿐입니다. 한때 잘나갔던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던 그는 최근 몇년간 가파른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32평 아파트를 사기 직전에서 22평 전세로, 방 두칸 연립으로, 연립 월세로, 계약직으로..... 이제는 새파란 후배들이 있는 대리점에 그가 들어가든 말든 갑근세고지서만큼도 환영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차보다 차팔이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이제 그냥 찌끄레기가 된 거지요. 과학이 발전함의 따라 지구의 위상이 우주의 중심에서부터, 그저 천억 개 곱하기 천억 개 중 하나인, 스스로 빛조차 낼 수 없는 행성으로 전락한 것처럼요. 밥한끼 혼자 해결할 돈도 없었던 그는, 다들 점심먹으러 나간 사무실에서 주린 배를 잡고 홀로 잡지나 뒤적이다가, 한시간이 넘게 걸려 터덜터덜 집구석까지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내가 건네는 한마디를 듣곤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폭발시키고 말지요. 과부하가 걸린 그의 손에서 전자렌지며 TV며 집안의 가전들이 베란다를 지나 집밖으로 다이빙을 하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발견하고야 맙니다. 그것을요. 불시에, 하필 그 소란스러운 통에 '그것'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고야 만 겁니다. 소설 속 모든 해프닝의 씨앗이.
뭔가 더, 던지고 부술 것이 필요했다. 뭐 없나? 경대며 장롱의 서랍까지 와르르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라잇~ 하는데 툭, 뭔가가 떨어졌다. 뭐야 좆같이... 하고 보는데 과연 좆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오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당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딜도였다.
집을 나와 천하장사 소세지나 뜯으면서 그는 충격적인 그것의 비주얼에 대하여 회상합니다. '내 거보다 세 배... 굵직하고 거무틱틱한 그 놈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고...
참... 뭐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게 다 뭣같아 보입니다. 심지어는 그가 막 껍질을 깐 천하장사 소세지의 모양새조차 그를 놀리는 것 같고 말입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싸구려 소세지를 씹으며 개판인 세상, 실적을 빼앗아간 동료들에 대한 욕설까지 함께 잘근잘근 씹다가 그는 그렇게 하루를 뒤로 하고 쓸쓸히 찜질방으로 흘러듭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풍경을. 소세지를 까먹고 사우나에 축 드러누운 그의 실루엣,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 동시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가정의 가장을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고립된 사람으로 만드는지요.
그때, 그는 뜻밖에도 먼저 하향의 길에 접어든 다른 동료를 그곳에서 마주칩니다.
우주, 그 역시 팍팍한
원래 그런 놈들이 성공하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자네도 내 실적을 가로채지 않았나?
앙?
자넨 잊었나 모르겠는데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네.
(...)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겐가? 거참 서운하구만.
그땐 못했지. 자네가 무서워서.
앙? 그건 또 뭔 소린가
몰라 묻나? 영업소에서 자네 별명이 미친 문트였잖나.
(...)
어떤 건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와 조두출이를 동급으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실적이란 게 그렇다. 그건 마치 정성껏 만 김밥을 자르고, 접시 위에 보기좋게 올리는 일과 같은 것이다. 내가 빼먹은 게 있다면 그런 거다. 김밥을 자르고 남은 끄트머리... 삐죽삐죽 어차피 접시에 올리기도 뭣한... 거 왜 있잖나, 칼질을 끝낸 분식집 아줌마가 낼름 자기 입안으로 쑤셔넣는 그거, 그런 거.
동료는 한때 그가 잘나가던 시절 그에게 빼앗긴 실적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한때 그런 개판에서 그가 욕했던 동료들과 다를바없는 짓들을 해 왔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요. 그러나 그의 독백을 따라가고 있자면 그의 이러한 면모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됨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은 그를 당당하게 비난할 수 있나요? 오히려 어물쩡 변명하며 넘어가려 하는,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데에 억울해하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그가 안쓰러워지지는 않은가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만큼 말이에요. 그를 나무랄 마음보다도, 우주에 가득찬 별들 중 제 별은 커녕 제 집 하나 쉬 얻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팍팍하고 막막하고 깝깝한 마음이 들고 있지는 않나요? 어쩌다가 이지경까지 오게 된 것인지, 낭떠러지까지 몰리게 된 각자의 사연을 늘어놓다가, 그는 우연히 동료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시점부터 완전히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지요.
나 달에 갔었네, 김상호가 얘기했다.
달에 갔다고?
그렇다네.
거길 어떻게.
네비에 찍고 줄곧 가면 나온다네.
산소도 없잖나.
먹고 살아야 하는 마당에 산소 따지게 생겼나?
(...)
내가 알기론 우주엔 암흑물질인가 뭔가, 또 태양방사선이니 뭐니 겁나 위험한 곳이라던데.
여기서 돈없이 사는 것보다 위험하진 않네.
니미럴, 방사선에 뒈지면 어쩌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소설의 배경은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됩니다. 그가 사생결단으로 결심하고, 화성으로 향하는 그 때부터 말이에요. 잘나가는 동료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고급 세단을 한대 빼서, 무작정 네비를 찍고, '파리 떼 같은 인공위성을 피해'서 그는 화성으로 출발합니다. 그들의 대화대로 산소도 없고 암흑물질이니 태양방사선이니 하는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곳이라 그런 것인지, 그가 정말로 악에 받친 절박함으로 운전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마따나 차도 안 막히고 해서 수월했던 것인지 그는 생각보다 쉽게 화성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 다이내믹한 이야기는 거대한 암컷 화성인을 마주치는 데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지요. 그들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여긴 우리뿐이야. (...) NASA 친구들은 겁이 많았는데 당신은 겁이 없네?
그 친구들은 먹고살 만하거든요.
그럼 당신은?
전 가진 게 독밖에 없습니다.
난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데. (…) NASA에서 오자마자 전부 개발에 들어갔거든. 보상받은 사람들은 노가 났지, 노가.(…)
좋으시겠습니다.
좋긴 한데… 잘 모르겠어.
왜요?
외로워.
그렇습니다. 처음 마주친 화성인, 그와 단 하나의 교집합도 없었고 없고 앞으로도 없을 완전히 다른 자아,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개체가 하는 말.
외롭다고 합니다.
전우주적 외로움
에리히 프롬은 인류의 역사를 두고 ‘외로움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인류는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갈수록 역설적으로 그가 태어난 자연으로부터 유리되고 분리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곧 이러한 자연으로부터의 외로움을 극복하려 시도하는 역사, 즉 ‘외로움의 역사’라는 것이죠. 이는 외로움의 역사가 비단 각 개인만의 고독한 역사가 아님을 반증합니다. 보세요, 이러한 에리히 프롬의 말을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라도 되듯, 화성인도 결국 외롭다는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화성에서도 지구에서도, 먹고 살 만해도 그렇지 못해도, 돈벼락을 맞아 세단 세 대쯤 사 주는 사람이나 돈이 없어 화성까지 죽을 결심으로 가는 사람이나, 아무도 외롭다고 말하지 않을 뿐 다들 결국 사무치도록 외로워하는 것이지요.
그는 이 암컷화성인의 외로움을 기가막히도록 캐치하고, 엄청난 순발력과 침착함, 경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노련한 센스, 고객에 대한 배려심을 십분 발휘해 눈물겨운 세일즈에 성공합니다. 그것도 계약을 세 건이나 성사시키지요. 어떻게 한 거냐구요? 그건 여러분의 상상에 맡길게요. 그녀의 외로움과, 이 소설의 발칙한 제목과 관련해서, 오랫동안 남편의 무관심 속에 독수공방을 했던, 신장이 칠팔미터에 달하는 이 암컷화성인에게 지구인의 세단이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앞에 어디선가 이런 풍경을 본 것 같기도 하지 않나요? 단지 스케일이 우주로 확장되고, 인물과 구도가 바뀌면서 그대로 변주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이 코믹한 소설의 결말은 사실 참 비극적입니다.
진짜 비극이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른다. 삼 년 전부터 좆은 안 서고, 일 년 가까이 돈도 못 벌고 회사에선 팽烹... 정신을 차려보니 마누라의 서랍 속엔 딜도가... 말하자면 그런 건 비극의 미끄덩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비극의 진짜 알맹이는 작은 살구씨처럼 그 속에 숨어 있다(그렇다고 비극이 피부에 좋다는 얘긴 아니다). 그 중심에, 작지만 아주 단단한 모습으로...그런 기분을 알까 모르겠다. 마누라의 딜도는 수입 명품도 고급 진동형도 아니었다.
일반 막대형이었다.
그는 화성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오메가3가 들어간 식단을 짜는 화목한 가정이 될지도 모른다고. 왜, 불만이라도 있느냐고. 당신도 나도 이 우주의 유명한 욕심꾸러기들 아니냐고. 그리고는 뻔뻔하고 태평스럽게 반문하지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차 한 대 팔아줬어?
'진짜 비극이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른다'고 그는 말합니다. 비극이란, 이를테면 이런 거에요. 우주 공간에 가득 들어찬 별들을 헤아려보면, 우리가 그것들을 일초에 한 개씩 평생 세어도 다 셀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별들은 대부분 우리가 평생 빛의 속도로 가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구요. 우주 공간의 넓이를 체감하면 체감할수록 우리네 삶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홀로 떠 어딘가로 빛을 보내는 별이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외로웠고, 외롭고, 앞으로도 외로우리라는 사실은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비극적인, 전 우주적 차원에서 비극적인 일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외로움이야말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공통분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진짜' 비극은 바로 여기 있어요. 우리가 지표면 위에서 모두 결국 적적하고 외로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어진 스스로의 우주와 교감과 소통을 시도하는 대신, 또다른 인생들을, 또다른 가능성을, 또다른 우주를 끊임없이 질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러나 또 동시에 우리는 단 한순간도 우리를 감싸는 이 환경, 이 우주, 당신과 저라는 자아에서 단 한발짝도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
우리가 아무리 생에 쫓기고 낭떠러지까지 몰리는 상황에 이르러도 우리는 이 지구의 대기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돈많은 화성인을 만나 대박이 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네비를 찍고 화성에 이르러 화성인에게 차를 팔 수 있는 기적같은 상황이 찾아온다고 쳐도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구요? 그러면 수완좋은 다른 차팔이들이 또 다른 별들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겠고, 그러면 누군가는 또 노가 나겠고 누군가는 또 울상을 지을 거거든요. 그리고 그 가운데 대박이 난 사원의 아내는 고급 세단 한 대 급으로, 계약직으로 밀려난 사원의 아내는 싸구려 일반 막대형 딜도 급으로 각자의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가겠구요. 자, 이제 문제입니다. 우리는 정녕 외로움마저 세단과 싸구려 일반 막대형의 차이로 무게를 재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그러면 당신의 외로움의 무게는 얼마나 되나요. 그리고 문제 하나 더. 이 이야기는 도대체 누구 이야기일까요? 모르겠다면, 글쎄요. 이 이야기가 지금 당장 제게 닥친 얘기가 아니라고 해서, 언젠가 당신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라도 있나요? 그렇다면 이는 과연 비극인가요, 희극인가요?
'[연극] 빙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살아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변신] (0) | 2013.05.10 |
---|---|
6. 완전함을 향한 우리의 시선, [완전한 항해] (0) | 2013.04.25 |
4.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뼈 도둑] (0) | 2013.03.29 |
3. 떠내려가는 순간들, [춘천, 거기] (0) | 2013.03.15 |
2.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은 이야기, [너무 놀라지 마라] (0) | 2013.02.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1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반복을 중심으로
*글의 편의상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하녀>(1960)' 또는 '원작'으로,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하녀>(2010)' 또는 '후작'으로 표기했습니다.
영화 <하녀>와 50년의 간극 : 같은 제목, 다른 영화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봤을 때를 기억한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상징과 메시지를 읽어보려 머리를 쓰고, 그래서 참담하고 슬펐으며, 종국에는 놀랐던 것 같다. 아무리봐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 <하녀>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미묘하게 비틂으로써 주제의식의 급진적인 전환을 감행했다. 딱 50년, 반세기의 간극이었다.
<하녀>(2010)는 <하녀>(1960)를 토대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약간의 기대-어떻게 재창조될 것인가-와 맹렬한 비난-답습에 불과할 것, 원작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에 맞닥뜨렸다. 사실 대부분의 ‘리메이크’는 이미 인정받은 작품을 원작으로 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원작을 뛰어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작품성의 측면에서 환영받는 장르가 아니다. <하녀>(1960)는 한국 영화사에서 흔하지 않은, 자신의 확고한 스타일을 확립한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으로서, 김기영 특유의 성악(性惡)적 시각으로의 접근과 독창적인 표현주의로의 전환이자 파격적인 상황설정, 비일상적 대사, 뒤틀린 욕망,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중산층의 심리묘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영화사적 인정을 받는 권위적 감독이자 깊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감독의 영화를 재제작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개봉 후에도 영화 자체의 찝찝한 여운에 대한 볼멘소리와 더불어 원작에 대한 모욕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어찌되었든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재제작(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하녀>(2010)를 <하녀>(1960)의 리메이크 작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전에 제작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제작 1하는 것을 뜻하는 리메이크는 대체로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며 2,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반면 <하녀>(2010)에 대한 평가는 (영화에 대한 가치-선호-판단을 별개로 놓더라도) 원작 <하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임상수 감독 역시 자신의 인터뷰에서 리메이크보다는 재해석이라는 평가에 동의하면서 "2010년 판 <하녀>는 1960년의 <하녀>와 완전히 다른 영화…원작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을 것" 3이라 말하기도 했다. 즉 <하녀>(2010)는 <하녀>(1960)와의 차이를 명확하게 강조함으로써 리메이크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무엇이 두 <하녀>의 적극적인 차이를 만드는가? 리메이크가 아니라면, 두 <하녀>의 관계는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완전히 다른 영화라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긴 한 걸까? 아, 이번에는 왠지 긴 여정이 될 것 같다. 일단 오늘은 두 <하녀>에서의 반복을 끄집어내어 두 <하녀>의 관계를 설명할 단초들을 준비해보고자 한다.
반복 : 명확한 관계의 증거
나는 엄밀히 말해 리메이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지만, 당연히도 임상수의 <하녀>(2010)가 김기영의 <하녀>(1960)와 제목만 같은 것은 아니다. <하녀>(2010)는 엔딩 크레딧에 “based on original film <The housemaid> by kim ki-young (1960)”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그의 영화가 김기영의 <하녀>(1960)와 관계 맺고 있음을 분명히 알린다. 실제로 <하녀>(1960)와 <하녀>(2010)는 기본적인 서사구조에서 공통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으며,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는 전작에서 가져왔음을 알 수 있는 (어쩌면 ‘굳이’) 의도된 장치들이 몇 가지 등장하기도 한다.
평온한 가정 → 하녀 등장 → 주인남자와 하녀의 통간 → 하녀의 임신과 낙태 → 하녀와 주인과의 갈등 → 파국의 결말 4 |
우선 두 <하녀>는 동일한 서사구조를 지닌다. 위의 서사 구조는 <하녀>(1960)와 <하녀>(2010)에서 공통으로 진행되는 큰 이야기 틀이며, 명확한 반복이라는 점에서 <하녀>(2010)와 <하녀>(1960)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전형적인 불륜을 다룬 서사구조 양식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말을 제외하면 불륜 혹은 외도를 다룬 텍스트들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사구조이나, 하녀라는 특정한 인물 설정이 구성하는 갈등과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갈등의 전개 양상이 동일하다는 점을 볼 때 <하녀>(2010)가 <하녀>(1960)의 특정 서사구조를 동일하게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동일한 서사구조를 기본으로, 두 <하녀>에는 반복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한 요소들이 여러 가지 있다. 이것들은 완전히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서사구조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드러나며, 무엇보다 극의 진행과 큰 관계없이 일부러 심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원작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해석된다.
➀주인 남자의 피아노
원작의 주인 남자 동식은 공장의 음악 강사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동식의 피아노 연주는 주인 남자의 교양 있는 성격을 드러내며 여공들은 그에 대한 선망의 마음을 가진다. 후작에서도 주인 남자 훈이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첫 피아노 연주 장면에서 하녀 은이가 설렘과 선망의 눈빛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하녀 명숙이 다른 여공이 동식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며 피아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후작에서는 훈과 은이의 관계에서 잠깐의 대화 시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은이의 행동과도 어떤 연관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굳이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반복의 징표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➁주인 여자의 임신
두 작품 모두 주인 여자가 산달을 얼마 앞두지 않은 산모로 등장하며 영화 중반부에 아이를 출산한다. 원작에서는 남자 아이를, 후작에서는 쌍둥이를 낳는다. 원작에서는 새 아이의 출산이 하녀의 상실감과 극도의 광기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지만 후작에서는 새 아이의 출산이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작에서는 하녀와 주인 부부의 딸 나미의 관계가 이야기 전개에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출산을 위해 온 가족이 병원으로 간 후 저택이 하녀들의 공간이 됨으로써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상징을 표현하는 매개가 된다.
➂낙상으로 인한 하녀의 유산
두 작품 모두 하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아이를 낙태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원작에서는 주인 여자 정심이 아이를 포기하라고 하녀를 회유하고 이에 하녀 명숙은 2층 연결 계단에서 스스로 몸을 던짐으로써 아이를 포기한다. 후작에서는 하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주인 여자 헤라의 엄마가 계단 난간에 걸친 사다리에 매달려 조명 청소를 하던 하녀 은이를 고의로 밀치고 계단 밑으로 추락하도록 만든다. 후작에서는 낙상 사건이 은이의 유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유산을 목표로 하녀가 계단에서 추락하는 두 사건은 보는 이에게 유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➃유산으로 인한 상실감과 하녀의 아이 위협
두 작품 모두 하녀의 유산이 하녀의 심경 및 행동 변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원작의 하녀는 스스로 유산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태어난 주인 부부의 아이들을 보며 상실감에 휩싸이고 동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후작에서도 하녀 은이가 주인 여자의 계략 때문에 아이를 잃은 후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는 주인 가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복수에 대한 의지를 가지게 된다.
또한 원작에서 명숙이 주인 부부의 새 아기를 보다가 내 아이가 죽었으니 당신들 아이도 죽어야 한다며 위협할 때 주인 부부가 매우 당황하는 장면은 후작에서 복수를 결심한 은이가 찾아와 새 아기들을 팔에 안자 위풍당당하던 훈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긴장하고 당황하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➄특정 대사의 반복
정심 : “내게 오지 마세요. 그런 더러운 몸으로 어찌 나와 동침을 했어요. 내 몸에서 구린 냄 새가 나는 것 같아요.” (<하녀>(1960))
해라 : “불결해 당신.” (<하녀>(2010)
이 대사 뒤에 정심은 늙도록 몸을 소모시키면서도 가정의 행복을 생각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하며 동식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다. 반면 해라는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고 말하며 좀 더 호전적인 태도로 훈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드러낸다. 특히 후작에서 해라의 이 대사가 있는 장면은 영화의 전체 흐름에서 크게 필요 없어 보이는데도 삽입된 듯 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원작과의 연관성을 보이기위해 의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명숙 : “자식은 마찬가지에요. 다 당신 자식인데, 내 자식이 죽었으면 당신 자식도 죽어야 해요.” (<하녀>(1960))
은이 : “당신 날 요만큼도 한 인간취급하지 않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 애기 당신 애기에요.”
“애 아버지잖아요. 이 애기도 당신 애기에요.”(<하녀>(2010))
또한 하녀의 신분이며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도 주인 남자의 아이임을 호소하며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대사가 원작과 후작 모두에서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주인남자와 하녀의 통간(@.@)이 이뤄진 날 비가 온다는 동일한 설정은 우연일까 충실함일까.
반복이 확실하다면
이제 임상수의 <하녀>(2010)가 김기영의 <하녀>(1960)를 기반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두 영화를 완전히 '다른' 영화로 만드는 것일까? 다음 포스팅에서 이 '다름'을 낳는 두 <하녀>의 결정적인(!) 차이와 이러한 차이들의 효과와 그리고 드디어 두 <하녀>의 (리메이크가 아닌)관계에 관해 말해보겠다.
기대하시라 냠냠!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 Frank E. Beaver, Dictionary of film terms, Twayne Publishers, 1994. p.294 [본문으로]
- 이미 발표된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것.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따른다. 이런 점에서 원작의 이름은 빌리지만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창조해 내는 패러디와 구분되며, 또 원작을 차용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표절과는 다르다. 그러나 원안을 빌려온다는 점 때문에 순수한 창작으로 보기 어렵다. (출처 : 지식백과, 문화예술일반) [본문으로]
- 임근호, (2010.5.14.) 임상수 감독 "1960 vs 2010 하녀…같은 제목, 다른 영화" (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831510.htm) [본문으로]
- 김혜숙, 「영화의 시대성 반영과 이데올로기적 의미변화 -<하녀>(1960), <화녀‘82>(1982), <하녀>(2010)의 서사구조에 대한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49 [본문으로]
'[영화] 샤오롱바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3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두 <하녀>의 관계 (0) | 2013.05.08 |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➄-2 <하녀> : 원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_차이를 중심으로 (1) | 2013.04.24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➃ <밀양> : 비밀의 볕, 온전히 햇볕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마주하다. (0) | 2013.03.27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➂ <North Country> : 여성영화, 그 상징에 대하여 (0) | 2013.03.12 |
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➁ <복수는 나의 것> : 몽타주와 사운드, 악의 없는 소통불가능성의 비극 (0) | 2013.02.2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무기의 그늘>>을 읽으며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 전쟁은 실로 세계사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던 미국은 아시아 변방의 소국에게 최초로 패퇴했으며, 전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미국의 자유주의는 도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국제정치는 제3세계로 무게추가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지도 어느덧 4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인식됩니다. 하나는 한국군이 최초로 해외 파병에 나서 자랑스럽게 싸웠던 역사입니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각 부대에서는 월남 나갔던 부대원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져 왔다고 하죠. 목숨 걸고 싸우며 외화를 벌었다는 베트남 파병의 이야기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의 자기서사입니다. 두 번째는 세계사적 사건으로서의 베트남전입니다. 주로 미국과 서유럽에서의 반전운동, 통킹만 조작사건, 네이팜 탄, 혁명의 지도자 호치민처럼 서구에서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방향 모두 정작 베트남전 자체는 배제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미국은 베트남에 가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혹은 서구 세계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황석영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은 독자를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데려갑니다. 무언가를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에 빠져 허우적대 보는 것이겠지요. 오늘 근근한 가이드는 여러분과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근대사를 겪었으면서도, 결국 공산주의에 의해 통일되었던 현대 베트남. 또 오늘날에는 급속한 경제 개방으로 갈수록 우리나라와 경제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현대 베트남을 만든 베트남전으로 떠나봅시다.
# 베트남의 슬픈 역사
<<무기의 그늘>>은 21세기의 독자들이 읽기에 친절한 소설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베트남전의 배경과 발단에 대해 무지한 상황에서 황석영은 무작정 독자를 전장 한복판에 떨궈놓기 때문입니다.
“백오밀리 포가 계속해서 강 건너편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했고, 비어 있는 모래벌판과 철조망과 선인장 숲 위에는 새하얀 햇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물 위에 뜬 조각배처럼 정글의 일부분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사이로 양쪽에 철조망과 낮은 모래주머니의 벽으로 막힌 좁다란 군용도로가 여러 중대와 대대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도로의 교통통제소마다 설치된 높다란 마루에서 밀림 쪽을 향해 가끔 위협사격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에도 황석영은 베트남 전에 대한 아무런 배경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지엠 정권과 해방전선은 누구인지, 미국과 한국이 왜 베트남에서 싸우고 있는지, 왜 종종 프랑스어가 등장하는지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이 지어진 1992년에는 베트남전이 얼마간 알려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읽기엔 쉽지 않은 셈입니다. 일단 베트남전의 배경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은 19세기 이래로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1884년부터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완전한 식민지 상황이었죠.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엄밀하게 말하면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동남아로 진출해 프랑스와 싸우게 됩니다. 식민지에 저항하려는 베트남인은 일본인과 힘을 합쳐 프랑스를 격퇴해야 할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일본도 하나의 식민주의 세력입니다. 일본과 프랑스를 모두 격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마침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반식민주의 세력인 중국군이 있습니다. 특히 중공군의 영향을 받고 서로 연대하면서 베트남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점차 힘을 모으게 됩니다. (호치민도 중국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에 가담했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프랑스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프랑스가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로 쪼개지자 베트남 식민정부는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비시 프랑스를 따르려면 일본과 협력해야 하고, 자유 프랑스를 따르자면 일본과 싸워야 하는 겁니다. 결국 세부적 군사 조치를 둘러싼 갈등은 봉합대고 일본군과 프랑스군, 중국군이 공존하는 상태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베트남 반식민주의 운동은 계속해서 지지세력을 늘려가는 중이었죠.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자유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북부에는 공산당이 기반이 된 반식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해버린 후였습니다. 결국 베트남을 재식민화하려는 프랑스와 해방을 원하는 베트민 사이에 오랜 전쟁이 시작됩니다. <<무기의 그늘>>에서 종종 등장하는 프랑스는 베트남의 전 식민국이었던 셈입니다.
그럼 미국은 도대체 왜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일까요?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된 후 전 세계에서 공산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프랑스에 엄청난 군비를 지원해 간접적으로 전쟁을 도왔습니다. 그러다 프랑스가 반전 여론 등 국내정치적 문제로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하려 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프랑스와 바톤을 터치해 전쟁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수십 년간 독립을 바라 온 베트남인들에게 달가울 리 없는 존재였지요. 결국 베트남인들에게 미국은 공산세력과 맞선다는 명목으로 베트남땅에 들어온 또 다른 식민세력일 뿐이었습니다.
# 미국의 신제국주의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를 쓰고 베트남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요? 특히 동남아시아 변방의 소국이라는 베트남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면 미국이 자신의 식민지도 아니었던 곳에 엄청난 부담을 들여가며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유세력을 수호하겠다는 언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무기의 그늘>>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황석영의 대답입니다. 미국은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베트남에 들어왔는가. 엄청난 군비 지출을 해가며 주둔했던 주월미군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인가.
황석영의 대답은 ‘달러’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달러의 확산’이지요. 미국식 자본주의를 동남아에 이식하고, 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착취해내고자 기회를 엿보던 미국이 베트남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나아가 황석영은 바로 그런 것이 ‘미국의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한국에서도, 남미에서도, 심지어 유럽에서도 미국의 위대함은 달러를 통해 확산됩니다.
“PX란 무엇인가. 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 라는 표어가 적힌 방패를 들고 로마식 단검을 들고서, 성조기의 옷을 입고 낯선 고장마다 나타나는 엉클 쌤의 지붕밑 방이다. (...) 그리고 PX는 바나나와 한줌의 쌀만 있으면 오순도순 살아가는 아시아의 더러운 슬로프 헤드들에게 문명을 가르친다. 우윳빛 비누로 세수하는 법과,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코카콜라의 맛이며, 향수와 무지개색 과자와 드롭스와, 레이스 달린 잠옷과 고급시계와 보석반지를 포탄으로 곤죽이 되어버린 바라크 위에 쏟아낸다. (...) 한 번이라도 그 맛과 냄새와 감촉에 도취된 자는 결코 죽어서도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이른바 ‘신제국주의론’으로 알려진 이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고전적 제국주의는 정치적으로 식민지를 점령합니다. 반면 신제국주의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유지시키면서 경제적으로 대상을 종속시켜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무기의 그늘>>은 미국이 베트남에 미국적 자본주의를 이식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사실 제목부터가 그렇습니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의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의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은행의 번창 등의 결합 위에 핏빛 꽃은 피어난다.”
그리하여 베트남 전쟁은 부정한 전쟁unjust war이 됩니다. 미국은 자유세계를 위한 수호자도, 세계의 경찰도 아닌 그저 총기를 앞세운 달러 장사꾼인 셈입니다. 그것도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며 돈을 버는. 좀 과도한 주장이 아니냐고요?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설득당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 베트남으로 떠나고 싶소
<<무기의 그늘>>은 잔인한 소설입니다. 경제적 이익 앞에서 전쟁과 살육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베트남에서 문제가 됐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기에 더욱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아오자이’일 것입니다. 아... 하얀 아오자이
“그가 공허한 마음으로 뒤뜰에 갔을 때, 칸나 향내로 가득 찬 그 방공호에는 하얀 모시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뚜렌지방 여자들은 옛적부터 한 사내만을 사랑한다. 그들은 정인이 멀리 떠날 때 아오자이 속바지 자락을 찢어서 수건을 만들어준다. 팜 민은 흠칫 놀란다.”
제가 2년 전쯤 베트남에 갔을 때에도, 여전히 베트남 여학생들이 새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매력은 아오자이만이 아니지만, 그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요.
다른 하나를 더 추천하다면, 저는 역시 ‘분짜’를 추천합니다. 아 분짜 먹고 싶당
아무튼 이번 주 베트남 여행은 이걸로 갑작스럽게 끝! 근근!
'[영화] 김근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근한 가이드] 울부짖음(HOWL) -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3) | 2013.05.05 |
---|---|
[독서에세이]『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 후안 룰포 (1) | 2013.04.21 |
[근근한 가이드]『더버빌 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 토머스 하디 (3) | 2013.03.25 |
[근근한 가이드]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0) | 2013.03.11 |
[근근한 가이드] 『이방인』 - 알베르 카뮈 (7) | 2013.02.25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Ex 5. 황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 행복과 항복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만난 친구의 말이다. 술잔을 내려놓더니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친구의 사연은 이렇다. 재수를 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점수에 맞춰 들어갔던 학과에서의 생활이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결국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행복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후 친구는 여행도 다녔고, 책도 읽었고, 사랑도 했고, 일도 했다. 어쩌다보니 그게 4년이나 되었다. 내 딴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산다고 내심 부러워하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니.
나라고 답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삶은 ‘살아지는 것’이라지만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답이 있다.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입에 올려 식상한 단어, 손에 넣으려 하면 슥 빠져나가고 마는 단어. 생각해보니 ‘행복’이 들어간 영화 제목도 수두룩하다. 영화는 결국에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각각의 대답이다. 그러니 많을 수밖에.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행복>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황정민의 영화다. 행복의 섬 하와이의 휴양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4인조 밴드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출장밴드와 나이트클럽 연주를 하는 삼류밴드이다. 떠돌던 그들은 리더인 '성우'의 고향에 있는 와이키키 호텔에 일을 받아 내려간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성우는 고교시절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을 만난다. 순수했던 친구들은 각각 돈 밝히는 약사, 직장이 괴로운 시청 공무원, 투철한 환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성우를 부러워한다. 성우가 음악을 배웠던 학원의 원장은 이제는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성우의 첫사랑이었던 인희는 억척스러운 야채장수가 되어있었다. 누구도 행복해보이진 않았다. 색소폰을 부는 '현구'는 밴드를 접고 고향으로 가 일을 하겠다며 나간다. 키보드를 치는 '정석'은 여기저기서 여자를 꼬시며 문제를 일으킨다. 드러머인 '강수'는 도박과 대마초에 빠져 밴드를 탈퇴한 뒤 버스기사가 된다. 멤버들이 바뀌면서도 성우는 밴드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다. 삼류더라도 더럽고 추하더라도 꿈꾸던 삶에서 너무 멀어져왔더라도 그는 무대에 선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성우를 중심으로 멤버들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행복은 너무나 멀다.
나는 가끔 누군가 '행복'이라고 말하면, '항복'이라고 잘못 듣는 경우가 있다. 안 좋은 나의 청력 때문이 아니라도 행복과 항복은 종종 혼동된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한다. 각종 책과 티비에서는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고 앞다투어 말한다. 그걸 보면 나는 질식할 것만 같다. 행복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잘나야 하고, 집도 사야하고, 차도 좋아야 하며, 결혼도 잘 해야한다. 건강해야 하며, 꿈도 이뤄야 하고, 봉사도 해야한다. 행복의 조건들은 마치 나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것 같다. '행복'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을 위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 어떻든 행복의 조건을 받아들여 열심히 살아간다 해도, 삶은 우리에게 번번히 항복을 요구한다. 행복의 뒤통수만 좇다가 죽을 것만 같다. 꿈 많고 순수하던 고교밴드는 각자에게 놓인 삶을 따라갔다. 누군가는 돈의 행복을 좇았고, 누군가는 안정의 행복을 좇았고, 누군가는 이상의 행복을 좇았다. 성우는 남아 꿈의 행복을 좇았다. 시청 공무원이 된 성우의 친구는 성우에게 묻는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넌 행복하니?" 성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멤버는 꿈의 행복을 좇은 사람들이다. 남들 보기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도 행복하지 않았다. 퀸과 비틀즈를 꿈꿨던 그들의 무대는 나훈아 대신 너훈아가, 이영자 대신 이엉자가 서는 무대였다. 와이키키를 꿈꿨지만 현실은 와이키키 호텔에서마저 그들을 내쳤다. 누군가는 고향에서 일을 하러 갔고, 누군가는 버스기사가 되었다. 그들 역시 행복에 항복했다. 행복의 조건은 '행복하지 않음'을 기어코 말하게 하는 형사였고, 그건 '항복의 조건'이었다. 웃기게도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걸까.
밴드 멤버와 일자리를 잃은 성우는 가라오케에서 반주를 한다. 돈 많은 사장님들과 아가씨들은 벌거벗고 놀고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노래를 하고 있는 성우에게도 옷을 벗으라 한다. 참담한 표정으로 벌거벗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성우의 옆으로 와이키키 해변이, 그리고 고교시절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슬프고 처연한 장면이다. 꿈과 현실은 그렇게도 멀다. 이를 영화는 냉정하게 꿋꿋하게 보여준다. 행복한 사람들보다 항복한 사람들이 세상에 더 많으리라. 그 차가운 진실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있다. 첫사랑 인희가 밴드에 합류해서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영화의 엔딩신보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사실상 전혀 나아지지 않은 현실임에도 인희의 노래와 밴드의 연주는 묘한 울림과 위안을 준다. 인생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는 것이 아프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들은 이제 행복을 놓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항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느껴졌던 것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도 나는 동의하지 못 하겠다. 내 생각에 인생은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해가는 것이다.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돈이 많던 적던, 꿈을 이뤘던 못 이뤘던,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럴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확인한 삶의 진실이 섭섭하지만 위로를 주는 이유다. 그러니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우리 항복하지 않고 살다보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p. s. 황정민, 류승범, 박해일의 풋풋한 모습들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영화라는 꿈을 위해 달려가던 그들이었기에 이 영화가 그들에게도 더 울림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 황정민 <끝과 시작> 2013년 4월 4일 개봉 ※ 황정민 <전설의 주먹> 2013년 4월 10일 개봉
'[영화] 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룽의EX] 송해성의 <파이란> - 만약이라는 두 글자 (2) | 2013.04.25 |
---|---|
[룽의EX] 현빈, 탕웨이의 <만추> - 사랑은 충돌의 몽타주 (4) | 2013.04.18 |
[룽의EX] 조 라이트, 키이라 나이틀리의 <어톤먼트> - 저마다의 속죄의 길 (0) | 2013.03.21 |
[룽의EX]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갱스 오브 뉴욕> - 뉴욕은 낡지 않는다, 사람만 낡아갈 뿐이다 (1) | 2013.03.07 |
[룽의EX] 홍상수의 <북촌방향> - 벗어날 수 없는 찌질함의 섬뜩한 얼굴 (1) | 2013.02.2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연수 소설집『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 속의 중편소설「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④ 이 글은 2013년 4월 2일에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고, 4월 7일에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습니다.
사라져버린 '그'를 이해하는 방법
김연수의 중편소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러하다. 여자친구의 자살을 이해하려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여자. 이 소설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모티프는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소설 안에 두 개의 소설이 등장한다. 하나는 여자친구의 갑작스런 자살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쓴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쓴 ‘나’의 소설이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이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소설은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왕오천축국전>은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본래는 3권으로 생각되지만, 현재에 남아있는 것은 1권짜리 축약본이다. 이 약본 역시 찢어지거나 내용을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완전하지 못하다.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의 화자인 ‘나’는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달았다. 결국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주석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이해인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그럴듯 하지만,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추측은 정답이자 오답이 된다.
이제 다시 두 사람의 소설로 넘어가보자. 먼저 '그'의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그는 갑작스레 여자친구의 자살을 맞게 된다. 여자친구는 짧은 유서를 남겼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122) 그는 유서 속의 ‘없었습니다’라는 존칭과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간극을, 자살이라는 그녀의 선택을,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로부터 아홉 달 동안, 그는 소설을 쓰는 데만 몰두한다.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중략)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으로 남길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됐다. 하여 둘이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가 쓰는 소설에서 사라졌다. 결국 그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등반일지에 적는 것과 같은 것들, 식사의 시기와 장소와 종류, 혹은 그날 불어온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것도 아니라면 만난 장소와 대화를 나눈 시간 등이 다였다. (124-125)
그는 인과관계에 따라 '여자친구의 죽음'에 부합하는 사실들만을 모아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객관적 사실들만으로는 어떠한 이해도 얻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과관계라는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비합리적인 인생을 설명해줄 수 없으며, 객관적인 사실만으로는 여자친구의 특수함을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소설을 완성하면 할수록 그 사실을 깨달아갔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124)
결국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자친구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빌렸던 <왕오천축국전>, 그 책에 나와있는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곳,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세계의 끝으로. 그는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나서게 된다. 그는 세계의 끝에서 이해에 도달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악천후 상황에서 제4캠프를 떠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우리는 그저 상상할 뿐이다.
이쯤에서 또 다른 소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번엔 '나'의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인 그녀는 우리가 방금 던졌던 '그는 이해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소설을 썼다. 그가 남긴 일기와 등반일지를 종합하여 쓴 그녀의 소설이 우리가 읽은 『설산』이다. 그녀는 본래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을 단 인물이다. 부재하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에 이미 능숙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주석이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채택하는 일에 불과”(151)하다는 것과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143)다는 것을.
그녀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를 다룬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그 기사는 그의 실종에 대해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가 B조 대원을 구조하기 위해서 낭가파르바트를 올라가다가 히든 크레바스에 빠졌을 것이라고'(153). 이 추측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이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154) 다른 추측을 내놓는다. 그는 서늘한 달빛을 받으며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였을 것이라고.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사라진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추측해야 한다. 대부분의 추측의 과정에서 이해의 대상은 가장 보편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대상에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이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비합리적이고, 우리의 존재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소설은 말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가장 개별적이고 특별한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책에 주석을 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냐고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설산』에 대한 또 다른 글 "세계의 끝을 넘는다는 것" : http://seesunblog.tistory.com/22
'[문학] 오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고반점] 현대사회 그리고 원시성 (3) | 2013.04.30 |
---|---|
[토니 다키타니] 고독: ‘孤(외로울 고)’와 ‘獨(홀로 독)’의 만남 (2) | 2013.04.16 |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세계의 끝을 넘어선다는 것 (1) | 2013.03.18 |
[저녁의 구애] 일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섬뜩함 (3) | 2013.03.05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무의미가 갖는 의미 (0) | 2013.02.19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