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뼈 도둑

 

 

 

 

 구멍이 없는 공간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문이 없는 방주둥이가 없는 병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빙구는 가끔 지구의 표면에 고이는 시간을 생각해봐요지구는 둥글어서 들어올 구멍도 빠질 구멍도 없을 텐데 다들 어디로들 들어오는 건지나날들은 어디에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버리는 건지우리에게 주어진 신체와 마음은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와 같아서 시간이삶이사랑이 거기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하는 건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것그것이 그리 슬픈 것일까요오늘 가져온 이야기는 황정은의 단편소설, <뼈 도둑>이랍니다.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

 

그는 오른쪽 벽에 돌출된 수도꼭지 아래 묘한 시멘트 구조물을 발견하고 다가가보았다허리높이로 수도꼭지가 달렸으니 용도는 개수대인 듯했는데 개수구멍이 없었다기울어진 방향으로 양배추 조각이 몇 점 모여 있었다오래되지는 않은 듯 가장자리만 시든 채로 개수대 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여기 누가 살고 있습니까그가 묻자 중개인이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흘려본 뒤 삐걱삐걱 잠갔다거친 녹물에 잠긴 뒤 작은 조각 몇 점이 수면으로 떠올랐다물은 고인 채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겨울이었다고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고그는 소설의 첫머리를 담담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동성 애인을 차사고로 잃고 애인명의로 되어있던 집을 빼앗긴 뒤 교외에 낡고 황량한 집을 구한 그는그 집의 개수대를개수구멍이 없어 물이 빠지지 않는 이상한 개수대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 이상한 개수대 이야기는 황정은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녀의 또다른 단편 <낙하하다>에는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가 있는 방 안에서 오후를 기다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죠남자는 오랫동안 오후를 기다려왔다고 하지만 이야기에는 그 벽에 시계가 걸려있다는 문장도방에 문이 있다는 문장도 없습니다이처럼 황정은의 소설에는 무한한 속성을 지닌 것들이 자주 출현하고그로 인해서 시공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무한히 그 틈새로 뻗어가는 어떤 풍경들이 자주 연출되곤 합니다이 소설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장과 함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이었다장과 그는 뒷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선명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하고 그들의 버스가 어딘가에 충돌했다천장으로 창으로 많은 양의 모래가 쏟아져 들어왔다매우 많은 양의 모래그는 모래에 쓸려 구르고 뒹굴다가 목전에서 연인의 노란 얼굴을 발견했다그 얼굴은 그와 다름없이 모래에 묻혀가는 중이었다눈을 감고 있었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양쪽 귀는 가망 없이 묻혔고 이제 입을 향해 모래가 닥쳐오고 있었다그는 장을 불렀다입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한다이미 숨을 쉬지 않는 듯한 연인의 얼굴을 덮어가는 모래를 쓸어내고 쓸어내며 흐느꼈다.

 

 



 구멍이 없는 개수대 위로 고이는 물버스의 천장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모래의 꿈기상이변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기온과 내리는 폭설의 이미지 등 한정된 배경 안에 무한히 쏟아지는 것들의 이미지는 이렇듯 계속해서 변용되어 그녀의 소설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경은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바로 구멍이 없다는 것입니다외부로부터는 끝없이 어떤 것들이 들어오거나 생성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탈출구가 없다는 말이죠들어오는 것은 끊임없이 있는데 빠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질문이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이 또다른 질문을 낳는데 답은 하나도 없는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낯설게 바라보고 비정상적인 것어그러진 것질서를 벗어난 것기형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잘못된 질문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혹시 잘못된 질문 때문에 간데없이 실종된 답을 억지로 짜내 담으려 하는잘못된 틀에서 기인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아닐런지요구멍이 없음은 정말로 기형적인 상태인가요그렇다면 기형적이지 않은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요어딘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고여있다는 것이 그저 또다른 상태일 수는 없는 것인가요?

 

 



구멍이 없는 


 


 

 

 아침에 그는 생선뼈만도 못한 무게감으로 외양간에 서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았다세수를 한다출근준비를 한다라고 생각하며 물이 고여가는 가망 없는 개수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장의 얼굴을 분명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어쩔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일 년이나 되었는데사람은 잊는다일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

 

분명 밟히는데 밟히는 것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발을 몇 차례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그는 가느다란 것들을 알아보았다고불고불하거나 짧거나 길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매우 많은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로 바닥을 덮고 있었다.

 

(……)

 

장의 누이가 가장 크게 울었다그녀는 장의 뺨에 손을 얹었다가 섬뜩 놀란 듯 손을 거두며 차가워라고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구멍이 없는 상태들은 무수히 존재합니다그 틀에 담겨 흡수되거나 어딘가로 가버리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것들 역시 생각보다 흔히 존재하는 것들인지도 모릅니다가령 우리 유한한 인체가 경험하는 시공간우리가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들덧없이 스쳐간 인연들기억들하다못해 고불고불하거나 짧거나 길거나 검거나 노랗거나 붉었던 머리카락들까지도 그런 흘러넘쳐버린 것들입니다이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이전에는 일상이나 내 몸의 일부였다가 문득 낯선 것이 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구멍이 없는 우리의 틀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무질서한 것비정상적인 현상낯선 광경으로 변하고 배제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사실 그의 담담한 서술을 잘 들여다보면 이러한 구멍이 없는 상태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속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의 지난 사랑은이를테면 구멍이 없는’, ‘불쾌하게 사내새끼들끼리’ 하는 거시기한’ 것이었거든요이는 그의 삶에서 거대하고 무거운 무게추로 자리해 그의 인생을 우묵하게 만들고그 홈으로 떨어지는 인생의 다른 문제들은 자꾸 어디론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그의 삶을 이곳까지 몰아넣었습니다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이상한 개수대가 설치된 외딴 방구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도록 말이죠마치 구멍이 없는 개수대에 고인 물처럼 그는 이제 갈 곳이 없고시간은 자꾸만 그에게로 흘러듭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닥치는 것보다도 나쁘다특별히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 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랑받지 못하도록 태어난 당신도 있다는 의미일까그런 당신은 누구고 저런 당신은 누굴까.

 

(...) 

 

 어느 쪽에서 들려왔는지는 몰라도 거시기한 관계라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다시 왈그락 덜그럭장은 입에 든 것을 꼼꼼하게 다 씹은 뒤 장과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부부를 향해 돌아앉았다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나한테 넣고 내가 이 새끼한테 넣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당신들에겐 조금도 넣고 싶지 않습니다

 

 


 

 


 거시기한 관계그렇습니다그들의 사랑은 말하자면 참으로 거시기한 것이죠. 그야말로 구멍은 없고 거시기들만 있을 뿐이니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그 자체로 참 거시기한 것이 아니던가요참으로 규정하기 어렵고도 복합적인누구도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그 복잡미묘하고 애틋하고 따뜻한 관계에 있어서거시기들만 있고 그것들이 들어갈 구멍은 없다는 사실은 왜 그토록 문제적인 일인가요이것이 문제가 되면 될수록우리네 사회에서 사랑이란 결국 거시기한 것을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남녀만, 넣을 것이 있는 사람과 무언가 넣어지는 구멍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가질 수 있는 관계에 불과한그렇고 그런 것에 불과한 관계 말이죠.

 

 

 그런 것만이 사랑은 아닐 겁니다넣을 것이 있고 넣어지는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그런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닐 거에요어차피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이면서도 둘이고둘이면서도 하나인당신이 내쉬는 날숨을 내가 들숨으로 마시면서 연명하는 것인데요결국은 그래서 서로의 모태에 몸을 묻고 기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요서로의 마음을 모태로 삼고도 그것조차 영원할 수 없어서언젠가는 구멍이 없는 그 방을 찢고 나와야 하는 것이 사랑의 숙명입니다그러한 사랑에서 서로의 몸에 구멍 하나가 없다는 그 상태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인지요따지고 보면 태아가 모태에서 보내는 열 달의 시간도 구멍 없는 개수대에 고이는 물과 같은 것이라서자궁을 가진 사람 역시 구멍없는 방을 몸에 지닌 사람이 아니던가요구멍 없는 방을 가지지 못한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혹은 슬픈 일일까요.

 

 

 

 

없는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살 수 있었고 갈 수 있었다.

 

(……)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눈사람과도 같은 거인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체온의 냄새한발 한발 전진해갈 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살 수 있었다.

.

.

.



*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는 소설의 결말부에서 장의 뼈가 보관되어있는 납골당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섭니다이렇다할 동기부여도 딱히 없이 그는 문득 납골당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고 걸릴 시간을 가늠한 후 담담히 짐을 쌉니다죽을 것이 뻔한 눈 속으로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할 기록을 그 눈 속에 남기고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한발그는 걸음을 뗄수록 점점 더 완전으로 수렴해 갑니다모태를 찢고 나오는 태아처럼 공간을 깨고 스스로 구멍을 만들면서요.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죠삶은 더할 나위 없이 영원하다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사실 둥근 우리네 삶에 시간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의 표면 위에서 움트고 꽃피고 시드는 것일지도 몰라요시간은 우리 속에서 많은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고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다시 사라지지요당신과 나의 얼굴은당신과 내게 주어진 것들은 사실 그 표면에 있는 껍질의 일부에 불과합니다껍질을 틀로 삼아 영원한 삶과 시간과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된 일이죠. 그래서 가끔은 이런 말들을 쓰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 때가 있나 싶도록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를 보는 일처럼요.



 다만 저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이름도 얼굴도 어떤 날들을 살아왔으며 어떤 날들을 살아갈지도 모르지만요. 그 순간이 하루의 어떤 때이건, 맑은 아침이건 비내리든 저녁이건 눈내리는 정오이건, 이 순간만큼은 당신과 제가 나누는 시간의 무게가 평등하다고 믿습니다. 영원을 스쳐가는 당신의 이 순간이 안녕하기를 빌어요. 당신이 이 기록을 언제 발견하든, 어디서 발견하든. 눈 속에서 발견하든, 제가 없는 순간에 발견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