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와 침묵

지인이 연주회를 갖다오더니 툴툴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옆자리에 앉은 관객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 프로그램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그 관객이 그 사람들을 ‘교양없다’고 나무랐단다. 연주회가 시작되자 다른 사람을 나무란 그 관객은 1악장이 끝나자 박수를 막 치더란다. 혼자 신나게 박수를 친 그 관객을 보고 내 지인은 다시 ‘교양없다’며 약간의 실소를 섞어 툴툴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연주회장에서는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교양에 대한 상식이 없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한 순간에 ‘교양없게’ 만든 것은 관습적 타이밍이 어긋난 박수이다.

그렇게 낯선 얘기는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한 악장(樂章)이 끝난 것과 한 악곡(樂曲)이 끝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뿐. 그 분의 죄라고 하면 조금 용감한 것이었다. 음악회는 관객들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안내 방송이 대변하듯이 ‘연주 도중에는 조용히 해주시고, 휴대폰은 꺼주시고, 연주가 시작되면 입장하실 수 없으며,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말아주시길’ 요구받는 것이다. 침묵은 음악회를 바깥세상과 구별시켜주는 일종의 테두리 역할을 수행한다. 암흑과 더불어 음악회가 열리는 그 공간만 존재하게 하고, 무대 위에서 들리는 소리만 존재하게 한다. 연주회장의 바깥은 단절된 공간이고 음악이 아닌 다른 소리는 소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침묵은 관객들의 몰입을 위한 것이다. 특히 악장과 악장 사이의 침묵은 그 전 악장이 남긴 여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악장과 악장 사이의 침묵이 당연시되는 관습은 19세기 말부터 생긴 것으로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종교의 도구, 종교의 대체물

악장 사이의 박수가 금기시 된 것은 19세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원래 기독교와 음악은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왔다. 성당의 전체 벽면을 파이프로 채우고 웅장한 소리로 사람을 압도하는 파이프오르간이 그 관계를 보여준다. 예배에서 박수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된다. 예배 음악이나 연설이 아무리 좋더라도 박수를 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박수 소리와 비슷한 타악기는 예배 음악에서 배제되고 관악기로만 이루어지기도 했다. 19세기에 들면서 점차 예배와 음악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음악회가 예배라면 지휘자는 사제, 청중을 신도로 보는 것이다. 신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 박수를 치거나 질문을 하거나 깜빡 졸 수 있는 권리가 없고 경건하게 앉아서 들을 권리만이 있다. 음악회가 예배와 동일시되면서 대중들에게도 같은 행동이 요구되었다. 실제로 1865년 헝가리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리스트는 사제복을 입고 지휘를 하기도 했다. 리스트도 음악회와 예배, 그리고 자신과 사제를 동일시한 것이다.

음악회는 예배의 영향을 받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방향으로는 그 자체가 종교화되기도 했다. 19세기 전통적인 종교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정면으로 공격받으면서 그 힘을 점차 잃어갔고, 영적 위안의 영역을 음악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음악에 그 자체의 신성성을 부여한 것에는 바그너의 영향이 컸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이 침묵과 엄숙함에서 연주되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은 몇 가지 연주 개혁으로 어느정도 성공했다. 그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설계할 때 객석의 중간에 통로를 놓지 않음으로써 관중들의 드나드는 빈도를 최소화했다. 그의 음악은 연주가 시작하는 시간을 엄수하고 연주 도중에는 침묵해야 했으며 악장 간의 박수도 금지시켰다. 현대 음악회의 규범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바그너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장 간 박수를 금지하는 규칙 역시 오로지 음악 그 자체에 몰두할 수 있고 음악이 거의 숭배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휘자, 그 독재의 영향

종교적인 이유로 박수를 부정하는 분위기와 더불어 독재적인 성향이 강한 지휘자들도 박수 금지 규정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지휘자는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과 악기, 그들이 내는 소리를 통제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갖는다. 하지만 무대 위를 장악해도 그 무대를 평가하는 것은 관중이었다. 당시 관중들의 박수는 단순히 끝난 것에 대한 기계적인 박수나 수고의 의미를 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중들이 무대를 평가하는 하나의 표현이었다. 박수를 친다는 행위는 음악을 판단할 수 있을 만한 능력과 그 판단을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줄 용기나 자신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음악에 대해 박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음악에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좋지 않은 음악에는 야유를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휘자는 무반응과 야유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싶어했고 악장 간 박수를 금기시했다. 악장과 악장 사이의 박수를 ‘못’ 치도록 하는 규정은 반대로 박수를 ‘안’ 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침묵을 통해 침묵의 부정적 맥락을 제거해버린 것. 무대 밖의 관객 반응에 대한 지휘권까지 욕심을 낸 지휘자의 영향으로 관객들은 마치 지금의 스튜디오 방청객과 같은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체적 청중을 위하여

요즘은 지휘자나 연주자가 청중에게 ‘아직 박수를 치지 말라’는 힌트를 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청중들의 박수 타이밍을 뺏기 위한 노력이다. 지휘자의 경우 한 악장이 끝나고 나서 한참동안 팔을 내리지 않고 들고 있으면서 뒤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피아니스트는 팔을 공중으로 크게 들지 않고 건반 가까이에 손을 두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활을 오래 들고 있는 등의 방식으로 완전한 곡이 아닌 하나의 악장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악보 상으로는 휴지가 있더라도 연주에서는 휴지없이 바로 다음 악장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프로그램이나 안내로 악장 사이의 박수 금지를 알리기도 한다.

하지만 악장 간 박수를 무지한 청중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근본적으로 주체적인 청중이 될 수 있도록 악장 간 박수를 허용해야 한다는 노력도 최근에 보이고 있다. 곡 안에서 악장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면 박수는 각 악장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 음악 연주의 목표라면 그 고조된 감정을 다시 억누르게 만드는 것은 모순되어 있다는 지적한다. 또한 지휘가자 원하는 것이 절대적 침묵이지만 절대적 침묵은 불가능하고 그 공간은 다른 소리가 다시 채우게 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악장 간 박수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서서 포르테로 끝나는 곡에만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청중에게 힌트를 주려는 노력과 악장 간 박수를 허용하기 위한 노력은 모두 청중을 위한 것이지만, 청중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서는 차이가 있다. 

어쩌면 내가 쓰는 하나하나의 글들은 악장이고 전체가 하나의 곡이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하나의 악장이 끝났음을, 그리고 곧 다음 악장이 시작할 것을 발칙하게 박수로 알린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