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우연히도 저번 글에서 다루었던 극과 비슷한 주제의 다른 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닫힌 문>과 <젊은 후시딘 - 어 러부 스토리(이하 젊은 후시딘)>. 두 작품 모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공간에 목숨 붙이고 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매몰차게 문밖으로(혹은 영원히 관같은 방 안으로) 몰아가는 사회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두 공연의 색깔과 질감, 주제의식을 조명하는 시선과 각도와 방식이 너무나도 달라 재미있었다. <닫힌 문>이 굳게 닫아버린 문을 <젊은 후시딘>이 드릴로 뚫어버린 느낌이랄까!

 

 


<닫힌 문>이 닫아버린 문에 대하여
 <닫힌 문>에서 빙구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진부하고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였다. '문'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되는 사회의 냉혹한 소외, 관처럼 좁고 깊은 절망, 거기에 무참히 깔려죽는 인물들. <닫힌 문>은 그 절망의 무게를 성실하고 충실하게 무대에 옮겨 왔지만 불행하게도 너무 낯익고 뻔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인물들은 각각 나름의 인간으로서 세상에 맞서지만 현실의 무게는 막강했고 인간미 넘치던 인물들은 그 앞에서 쉽게 생기를 잃어버렸다. 극이 너무 일찍 그런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지루해졌다. 재미없는 비극이 어떻게 해서 파국으로 흘러갈지가 뻔한데도 꼼짝없이 앉아 어둡고 슬픈 장면을 마지못해 들여다보아야 했으니까.
 거기에 극은 인물들의 끝을 보여주는 대신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십수년 전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애매하고 답답한 부분이었다. 관객 각자가 나름의 판단을 내리도록 유보하고 있지만 그들 자신은 정작 그 '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충분히 고민했을까? 그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아닐까?


 당신은 예술에서 어떤 해답을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쉬운 문제였다면 애초에 무대에 올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많은 극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닫힌 문>은 사회의 이면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많이 우려먹은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관객에게 씁쓸한 냉소와 비관, 절망감과 피로감만 전이시킨다. 아무리 '노답'인 상황이라고 해도, <닫힌 문>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문'에 대한 새로운 방향의 접근과 탐색을 단단히 닫아놓고 있었다.

 

 

 


<젊은 후시딘>, 그 발랄한 반란
 <젊은 후시딘> 역시 <닫힌 문>만큼이나 말도 안되게 암울한 현실과 젊은 후시딘 가족의 실패를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띄게 다른 점을 꼽자면 특유의 삐딱하고 날선 유머감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과 그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극의 형식을 변형하고 파괴한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그들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저항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입장할 때부터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의 TV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주택공약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이는 월세를 내지 못해 점점 더 궁지로 몰리는 젊은 후시딘 가족의 처지를 더욱 궁색하게 한다. 상황이 절박해지는 만큼 젊은 후시딘 가족은 더 뻔뻔하고 과감해진다. 젊은 후시딘의 엄마는 무당만큼 밑천이 안드는 사업이 없다며 신내림도 받지 않고 점집을 차리는가 하면, 젊은 후시딘의 아빠는 새벽마다 동네 공원에서 실시간 야동을 펼치는 동네 커플을 위해 정자를 고쳐주고, 젊은 후시딘은 집있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며 칠십이 다 되어가는 노파를 데려온다. 내내 악에 받쳐 있는 그들 가족은 내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독특한 화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 간의 가족적 관계를 최대한 약화시키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관객이 집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극적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이톤과 큰 발성을 유지하는 것이 자칫 관객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상황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함으로써 극 전체의 흐름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말이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객석에 던져지는 말들이 더욱 날카롭게 빛난다.


"가끔 고시원에서 죽어나가는 사람 있지? 그게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깐. 자기가 살던 방에서 죽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자기가 살던 방이 자기 관이 되는 건데. 그게 어떻게 보면 참 경제적인 거야. 우리같은 서민한테는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없어. "


"물이 이렇게 넘쳐 흐르니, 화재의 위험은 절대 없을 거 아니에요. 소화기도 따로 필요 없을 테고. 제발 좋은 점을 보세요. 왜 그렇게들 다들 삐딱해서는. "

 

 

 


 극의 하이라이트는 집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야멸찬 통보에 후시딘 가족이 응하는 장면이다. 후시딘가족은 장판부터 변기, 문짝까지 통째로 뜯어가 동네 정자에 살림을 차린다.


 그 상황에서 젊은 후시딘이 야심차게 한다는 말이 참 재미있다. 전국의 집 없는 사람들에게 각지의 공원과 산의 정자를 알려주는 이른바 '집 테이크 아웃' 사업을 벌여야겠다고. 후시딘 가족은 극중 처음으로 반색하면서, 악에 받치지도 분노에 차지도 않은 상태로 자못 정답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암전으로 장면이 끝날 때까지 후시딘 가족의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데, 관객의 입가에 남는 미소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하다.


 <닫힌 문>의 인물들이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한다면, <젊은 후시딘>은 문짝을 통째로 들쳐메고 튄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도 안되는 대처를 하는 것은 그들만이 놓을 수 있는 맞불이자 나름의 저항이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에 순응하자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삐딱한 유머에도 쉽게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담겨 있다. <젊은 후시딘> 속 가족이 <닫힌 문>의 자연스러운 인물들과는 달리 과장되고 사실적이지 않게 그려지면서도 오히려 훨씬 살아있고 생동감있어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젊은 후시딘>의 윤한솔 연출은 예술이 갖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예술이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이니만큼 예술은 사회의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아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이미 단단히 배긴 굳은살을 한번 더 깎아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더 발전되고 확장된 논의와 고민이 없다면 그저 우리는 더 무감각해지기만 할 것이다. 또한, 그 사유의 수단이 연극과 같은 어떤 예술 형식이라면 이 역시 주제와 더불어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부지런한 진보를 독려하는 것은 관객의 몫, 당신과 나의 몫이다. 이야기하자고, 잊지 말자고, 절망하지 말자고 말하는 작품을 캄캄한 객석에 편안히 앉은 당신이 보았다면 말이다. 이야기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휴재공지 [문학] 오까마 2014. 3. 4. 07:00

드디어... 라섹을 했습니다.


이번 한 회를 쉬면서 건강한 눈으로 더 좋은 글을 올리겠습니다.




[팝콘 먹는 좀비]

10. 액션보다 리액션, <시작은 키스>

 

 

집을 나섰다. 오후의 겨울공기가 청량하게 뺨에 닿았다. 햇빛은 쨍하게 앙상한 나무와 녹지 않은 눈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맑은 겨울의 공기는 저절로 사람을 신선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게 만든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꼴깍 넘기는 듯했다. 무색무취의 차가운 취기에 몸이 얼었다가 이내 달아올랐다.

현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외출하기 전 거울 앞에서 한참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러느라 정작 챙겨야할 팔찌를 깜빡할 뻔 했다. 거울이라는 건 신기한 것이었다.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을 나 스스로 볼 수 있다는 것.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인류의 사고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툭툭 털며 거울을 보았다. 문득 거울이라는 건 나를 보도록 만든 것인지, 사실은 나를 바라보는 남들을 보도록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윽! …아야야야…."

 

쾅하는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들려왔… 아니,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저런 생각에 부풀어 걷다가 빙판길에서 제대로 넘어진 것이었다. 넘어진 내 옆으로 사람들이 빙판에 넘어진 나를 흘끗 보고는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아, 지금, 바로 지금 거울이 있다면 내 모습이 어땠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거울 따위가 없어도 나를 보는 사람들의 리액션만으로 상당히 우스운 표정과 몸짓이었을 거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때론 액션보다 리액션이 그것을 더 잘 보여줄 때가 있다.

현은 혜화동의 통제구역 바로 건너 편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아직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모습의 카페였다. 여기가 약속장소가 맞나 싶어 꾸물거리고 있는데, 현이 카운터에 서서 웃고 있었다. 하얀 목폴라 니트를 안에 입고 오버사이즈의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현은 이미 배우이긴 하지만, 정말로 '배우' 같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뭐 안 마시실 거예요?"

"음, 아, 네… 그러니까 저는 따듯한 아메리카노…요."

"네에- 앉아계세요."

"계산은요?"

"제가 쏘는 거예요. 첫 손님이니까."

 

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눈치를 보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무언가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에 나는 좀 전에 넘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미신 같고 결과론적인 얘기여서 잘 믿진 않지만 때때로 인생은 정말 복선과 암시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를 슬쩍 주물러 보았다. 역시 팔찌만 주고가면 되는 거였던 건가… 나를 만나려고 온건 아니었던 건가….

카페는 나무로 만든 집의 오래된 다락방처럼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이곳저곳에 인형과 장난감, 향초가 놓여있었고 벽엔 영화와 연극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서 해놓은 듯한 그런 것들이었다. 잠시 뒤 현이 자기 얼굴 만한 커피 잔을 들고 와서 내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에요.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런 것 같네요. 하하, 근데 여기 뭔가요?"

"여기, 제 카페예요. 놀라셨죠? 다음 주면 정식으로 문 열거에요."

"예쁘네요. 카페. 커피도 맛있고요."

"그렇죠? 그럼 구경 좀 해보실래요? 비밀공간도 있거든요. 맘에 드실 거예요."

 

 

카페 한 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현과 나는 얼굴 만한 머그컵을 들고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현에게선 오늘도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났다. 혹여나 또 넘어질까 조심조심 내려간 그곳엔 카페와는 다른 새로운 공간이 있었다. 한 쪽 벽면엔 무대처럼 단이 놓여있었고 무대 쪽으로 빔 프로젝터가 설치돼있었다. 그리고 무대 쪽으로 향해 있는 몇 개의 소파는 마치 커다랗고 게으른 개가 웅크리고 낮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짜잔- 제 카페의 비밀공간! 지하극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극장주인까지 된 건가요?"

"네, 여기서 상영을 많이많이 할 생각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로만요."

"자주 놀러와야겠네요. 무슨 영화 좋아하는데요?"

"음…… 좀비영화?"

"조그만 지하극장에서 좀비영화라, 잘 어울리네요."

"시간 괜찮으시죠? 첫 손님이니까, 첫 상영회도 같이 해요."

 

조그만 리모컨으로 현은 불을 끄고 프로젝터를 켰다. 지하라서 불을 끄면 암실 같았다. 현은 내 옆에 앉았다. 소파는 둘이 앉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극장이나 산책이나 드라이브가 데이트로 선호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나란히 남녀가 있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란히 있으면 서로를 의식한 리액션이 아니라 본래 그 사람의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훔쳐 볼 수 있다. 그건 마주보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한다.

 

"무슨 영화예요?"

"무슨 영화겠어요? 당연히 좀비영화죠."

 

현은 화면을 바라보며 더 깊숙이 소파를 파고들었다. 목폴라를 입술까지 끌어올리는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하지만 좀비영화라니, 호감 있는 이성에게 여자가 틀어줄만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나는 체념하고 커피를 꿀꺽꿀꺽 삼켰다.

 

 

한 여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화면으로 영화는 시작했다. 묘한 배경음에 또각거리며 걸어가는 여자의 가녀린 뒷모습은 어쩐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곤 카메라가 여자의 앞모습을 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오드리 토투였다. 오드리 토투가 좀비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내 멋지게 생긴 남자와 오드리 토투가 키스를 하며 제목이 뜨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의 제목은 <시작은 키스>였다. 현은 양손으로 코까지 목폴라를 당겨 올리고 있어서 눈빛만 보였는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싶겠지만 그녀보다 남자 주인공이 더 사랑스러웠다. 오드리 토투가 연기한 나탈리는 맨 처음 나왔던 멋지게 생긴 남자와 결혼한다. 하지만 사고로 남편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고 워커홀릭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탈리는 자신도 왜인지 모르게 부하직원 마르퀴스에게 충동적으로 키스를 퍼붓게 된다. 그는 대머리에 불규칙한 치열, 멍한 눈빛, 어기적거리며 걷는 못생긴 남자다. 그러나 마르퀴스의 귀엽고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은 나탈리를 편안하게 웃게 만든다. 이 섬세하고 매너있고 따듯한 남자에게 나탈리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많은 사랑영화들이 액션영화도 아닌데도 현란한 구애와 어긋남의 액션을 눈 아프게 선보인다. 하지만 좋은 사랑영화는 구애와 어긋남의 드라마틱한 액션이 아니라, 서툴고 심심한 액션을 선보이고 섬세하고 사려 깊게 그들의 리액션을 담는다. 사랑은 원래 액션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 <시작은 키스>는 그걸 아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도 현은 불을 켜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지하극장에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게 메아리가 쳤다.

"좋죠? <시작은 키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트 주머니에서 묵주팔찌를 꺼냈다.

"이거요. 기억이 안 나네요. 왜 제가 이걸 가지고 왔는지. 미안해요."

"…전혀 기억 안 나세요?"

"음… 네."

"전혀요? 실망이네요. 참."

"그게 제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래도 조금 기억나는 것도 있긴 한데…"

"그거 제가 행운의 묵주팔찌라고 작가님 빌려드렸던 건데. 소설 팍팍 쓰실 수 있게 될 거라고. 에이 이거 뭐 기억이 안나니 효과도 없었겠네."

"아, 그런 거였구나."

 

현이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리액션이었다. 나는 어떤 리액션을 하고 있을까. 현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을까.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거울이 있었다고 해도 그 리액션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현이 하이힐 앞코를 툭툭 부딪치며 딴소리를 꺼냈다.

 

"근데… 저 솔직히 작가님 소설 하나도 안 읽었어요."

"원래 제가 읽은 사람보다 읽은 척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작가거든요. 괜찮아요."

"그래서 앞으로 나오는 소설부터 읽어보려구요."

"언제 나올 줄 알고요?"

"여기 어때요? 제 카페 오셔서 소설 쓰실래요? 그렇게 읽어보면 안 되나?"

"으음…"

 

갑작스러운 제안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공간이긴 하지만…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나는 방금 본 영화의 제목을 되뇌었다. 시작은 키스, 시작은 키스, 시작은…

 

빔 프로젝트마저 꺼지고 지하극장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현의 옆모습이 흐릿해진 크로키처럼 경계가 모호하게 보였다. 톡톡 하이힐 앞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흐릿한 크로키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래, 시작은 키스.

그렇게 현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 뒤 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말했다.

 

"네, 여기서 쓸게요. 이번엔 제정신입니다."

어둠 속에서 작게 메아리가 울렸다.

 

 


 

BY  룽  

영화와 음악, 책을 사랑하고픈 기자지망생. 

행복과 항복 사이에서 글을 쓰는 중. 


 

 

※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연수의『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김연수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법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316)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작가의 말에서 김연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김연수는 늘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김연수는 쉽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도, 그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바람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루어져, 많은 이들이 그의 이야기가 난해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끝까지 읽는 이유는 무엇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꼽을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의 글 속에 있는 추리요소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어떤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김연수는 능숙한 솜씨로 독자들이 그 의문점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도록 한 뒤, 또 그 능숙한 솜씨로 호기심을 이어나간다. 이 글에서는 그의 작품 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서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득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관,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63-64)

 

   소설은 톱니바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톱니바퀴는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중심축이 된다.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 소설은 미리 밝혀둔다. 앞에서 인용한 문단 바로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내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게 되기까지 첫번째 톱니바퀴의 역할을 한 건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 자원봉사자의 부지런함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세계의 끝여자친구라는 생소한 단어의 결합이 궁금증을 일으키듯, ‘사랑한 자원봉사자의 부지런함이 연결된다는 말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첫 번째 톱니바퀴에 이어지는 톱니바퀴들을 소개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서서히 풀어나간다. 자원봉사자가 게시판 비는 공간에 일주일마다 시를 하나씩 소개했던 것이(첫번째 톱니바퀴), 그 자원봉사자가 그만두면서 도서관 이용자들이 그 공간에 시를 붙이기 시작했고(두번째 톱니바퀴), 그것이 발단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게시판에 붙일 시를 선정하는 시 윤독 모임이 만들어졌다(세번째 톱니바퀴).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드디어 톱니바퀴는 주인공이 연관된 톱니바퀴에 맞물리게 된다.

 

   주인공은 도서관 게시판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시가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시 속의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라는 구절을 보고, 자신이 매일 달리는 호수에 서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를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은 게시판에 붙어있는 시에 매료되어 도서관 검색대에서 메타세콰이어를 치게 된다. 그리하여 <메타세콰이어,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책을 빌려 읽게 되고, 메타세쿼이아는 최근 들어서 국내에, 그것도 주로 가로수로 보급된 나무이기 때문에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보는 일은 드문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시 속의 메타세콰이아와 주인공 집 근처 호수의 메타세쿼이아 사이의 연관성에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된다.

 

   톱니바퀴는 계속 맞물리며 호기심을 풀어나간다. 시 윤독 모임에서 만난 강사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희선 씨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게시판에 걸어놓은 장본인이자, 그 시를 쓴 시인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다. 주인공 '나'는 희선 씨로부터 시인과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시인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랑을 감히 전할 수 없었다. 시인은 차마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못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호수 끝 메타세콰이어까지 산책을 하였다. 결국 시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멀리 가본 곳이 호수 끝 메타세콰이어였으며, 그 곳이 시인에게는 세계의 끝이 된 것이었다.

 

   메타세콰이어와 관련된 궁금증은 풀렸지만 톱니바퀴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빌린 <메타세콰이어, 살아있는 화석>이란 책에서, 시인이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 밤 열시의 산책. 호수 건너편 도시의 불빛. 거기에 묻다.’라고 써놓은 낙서를 보았고, 메타세콰이어 근처 땅 속에서 시인이 묻어놓은, 그러나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한다. 우체통에 넣어달라는 죽은 시인의 부탁 대신 와 희선 씨는 편지를 직접 전해주기로 한다.

 

이제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맞물려 도착점에 거의 도달한 듯하다. 절멸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발견된 메타세콰이어처럼, 죽은 시인의 사랑의 편지는 와 희선 씨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고, 결국은 시인이 사랑했던 그녀에게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이 종착지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소설에서 중간중간에 등장하던 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결말을 맺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는 마지막 힌트를 제공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청년이 처음 도서관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시인과 닮아서. 눈썹이며, 눈매며…… 그래서 보자마자 희선씨라고 부르라고 한 거예요.”

 한참 길을 걸어가는데, 희선씨가 말했다.

 “그 말 듣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주책이었나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말했다.

 “김희선이라고 하시는 순간, 제 여자친구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정말? 여자친구가 그렇게 예쁘단 말인가요?”

 “아니요. 그 배우만큼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름은 같아요. 하지만 제 눈에는 그 배우만큼 예쁘게 보였죠.”

 “그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인데…… 얘기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 표정을 보니.”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86-87)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시인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에게는 주인공 의 사랑이야기로 끝이 나는, 심지어 시인의 편지가 전해지기 직전에 끝이 나는 이야기에 당황할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했던 독자들에게도 애매모호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난해하달 수도 있겠다. 소설은 소설의 마지막을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호기심이라는 추진력을 통해 달려온 독자들에게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추구하는 김연수의 하나의 전략일 것이다. 나의 몫으로 남겨둔 마지막장을 보며 생각해본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 가 기적적으로 한 죽은 시인의 사랑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고, 그리고 이 이야기는 주인공 가 죽은 시인의 사랑을 이해해가면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지나간 사랑과 지나간 이별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고.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무리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해도.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6. 가능하다면,


Lyrics

-

Sunlight comes creeping in
Illuminates our skin
We watch the day go by
Stories of all we did
It made me think of you
It made me think of you

Under a trillion stars
We danced on top of cars
Took pictures of the stage
So far from where we are
They made me think of you
They made me think of you

Oh lights go down
In the moment we're lost and found
I just wanna be by your side
If these wings could fly
Oh damn these walls
In the moment we're ten feet tall
And how you told me after it all
We'd remember tonight
For the rest of our lives

I'm in a foreign state
My thoughts they slip away
My words are leaving me
They caught an aeroplane
Because I thought of you
Just from the thought of you

Oh lights go down
In the moment we're lost and found
I just wanna be by your side
If these wings could fly
Oh damn these walls
In the moment we're ten feet tall
And how you told me after it all
We'd remember tonight
For the rest of our lives

-



가능하다면.

지금, 너의 빛나는 피부에 닿을 수 있다면.


너에게 이 노래를 부를 거야.


만약 <La Boum> 속의 소피마르소처럼, 네가 눈앞에 서 있다면.

오늘 너의 귓바퀴 속으로

이 노래를 재생할 거야.




아램디의 <<지속 가능한 음악>> with 'Wings' from Birdy


가능하다면,

나는 포르쉐 911을 타고 싶어.

가능하다면 Zegna의 원단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수제로 맞춘 10년도 더 된 페니로퍼를 신고 있다면 좋겠어.

나의 트렁크에는 펜더사의 아메리칸 스탠다드 텔레케스터가 하드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다면 좋겠고,

내가 달리는 길에 차가 너무 많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집에는 언제나 나를 반겨줄 강아지 한 마리가 있으면 좋겠어. 슈나우저면 더 바랄게 없겠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위닝 일레븐으로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할 때까지는 꼼짝하지 않을 거야. 밤을 새서라도 다 깰거야.

나에게는 TV가 세 개 필요해. 하나는 MLB 하나는 NBA 하나는 프리미어리그를 틀어놓고 동시에 봐야 하거든.

방 중에서 한 개는 반드시 나의 서재로 만들거야.

거기에는 민음사와 열린책들과 문학동네에서 발간된 <세계문학전집>을 빼곡히 모을 거야.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집들은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할 거야.)

물론 서재 한 편에는 내 이름으로 출간한 책들도 있어야 겠어. 하하.

건물의 지하에는 스튜디오를 만들거야.

나와 밴드 멤버들이 마음껏 연습하고, 녹음하고, 창작할 장비들을 구비하고 싶어.

앰프는 진공관 식의 Marshall이 아니라면 사양하겠어. 그러고 싶어.

나의 첫기타는 버리지 않고 팔지도 않을 거야.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채로 삭아가도

억지로라도 내 자식놈한테 물려줘야지.


가능하다면.

마당에는 농구 골대를 놓을 거야.

마음이 답답할 때면, 슛을 쏴야지. 슉슉

그물 소리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넣고 또 넣어야해. 슉슉

수영장은 되도록이면 지붕있는 실내 수영장으로 만들고 싶어. 눈 펑펑 오는 거 보면서 수영하고 싶거든.

집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잘 되어있으면 좋겠어.

나무도 많고, 유월이 되면 파란 수국이 여기저기 피면 더더욱 좋겠지.

이웃들과 항상 인사를 했으면 좋겠어.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정도는 하면서 살면 좋잖아.


이것저것 요리를 하고 싶어. 알리오올리오나 된장찌개 정도만 맛있게 할 수 있으면 되겠지.

지금보다는 한자를 좀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고.

취미로 수학문제를 푸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순수하잖아. 건전하고.

사진기는 따로 필요없어. 나는 핸드폰에 달린 사진기면 충분해. 다만 좋은 핸드폰을 써야겠지.

핸드폰이니 노트북이니 같은 건 지금처럼 애플 제품이 좋아. 뭐 앞으로는 바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앱등이니까- 사과가 좋은 걸. 편하고.

아 나는 실제로 과일도 사과를 제일 좋아하니까, 이따금 마트에 가서 사과를 사올 거야.

한 번에 많이 사서 썩는 건 질색이니까, 귀찮아도 조금씩 사서 먹을 거야.

그러니까 집가까이에 질 좋은 물품을 파는 마트가 있으면 좋겠어!

아, 마트의 과일 쪽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생들한테는 특히나 친절하게 해줄 거야.

내가 과일 나르는 알바 했었으니까. 뭐, 편애하는 거 맞아.


가능하다면-

나는 규칙적으로 살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하고, 책이랑 신문도 읽고.

일은 오후 6시 전까지만 하고, 이후에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겠지.

이럴려면 일찍 자야되는 데, 빌어먹을 재밌는 건 항상 늦은 밤에 일어난단 말이지.

'마녀사냥'처럼 핫한 프로그램은 항상 밤늦게야 하고,

재밌는 가십은 늦은 밤 술집에서 해야 제맛이고.

젠장할 일찍 잔다는 건 이렇게도 힘들어...

그래도, 제발, 좀, 잘 되었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나는 이제 진짜로 자야겠어. 내일도 일찍 일어나고 싶거든.

알람을 8시로 맞췄다가는, 아니야 7시 59분이 더 낫겠어. 좀 더 사람 냄새 난다.


알람음은 내 핸드폰에 있는 음악 중에 하나로 택했어.

나는 구식이라 스트리밍 같은 거 안해.

아직도 다운받아서, 앨범 사진까지 이쁘게 정렬해서 핸드폰에 넣는 게 좋아.

아이팟 클래식이 심어준 몹쓸 습관이지만, 난 이런 편집증이 은근히 좋더라.


Birdy 'Wings' <Fire Within>





이걸로 했어. 좋아.


이거라면 아침에 잘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거든.






아 정말로.

가능하다면-


이 중에서

진정 하나만의,

오직 하나의 소원만이 허락된다면.


Jeff Buckley (1966~1997)


이 녹이 슨 철제날개로라도 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너의 빛나는 피부에 닿을 수만 있다면.


뭐 어떡하겠어, 휴- (아쉽지만)

포르쉐911이랑 싱싱한 사과는 싹다 갖다 버려야지.






대신에.

너에게,

'이 노래'를 불러야지.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불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