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재공지 [문학] 오까마 2014. 4. 29. 02:15

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잠시 휴식기를 갖겠습니다.


더 깊은 고민과 더 좋은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색관계

 

 신호등은 정지를 의미하는 빨간색과 보행이나 주행을 의미하는 녹색이 있다. 빨간색과 녹색을 신호체계에 사용한 이유는 이 두 색이 보색관계이기 때문이다. 보색이란 두 색을 섞어 하얀색이나 검정색이 나오는 색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보색관계에 있는 두 색을 나란히 놓으면 각각의 색은 더 선명하게 보이는데 이를 보색대비 효과라고 한다. 이는 단순하고도 잘 알려진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대척점에 있는 것을 곁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은 보색대비를 문학에 훌륭하게 적용시킨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서로 보색관계에 놓인 두 가지는 바로 삶과 죽음이다. 죽음은 삶으로 인해 그 색이 더 짙어지며, 그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삶은 더욱 정확하게 묘사된다. 오늘 이야기는 실존문학의 거장 사르트르의 작품 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공화파 수병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인 분쟁의 성격을 띠는 내전이다. 19362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이를 반대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군부를 이끄는 프랑코 장군은 예상치 못한 시민들의 대항으로 반란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세()를 얻는다. 인민전선 정부는 사회주의 국제 조직인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을 중심으로 스페인 정부를 도울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을 구성한다. 53개국에서 3만 명이 넘는 자원자들이 국제여단으로 나섰지만, 1937년 이후 소련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여단의 세력은 크게 줄어든다. 결국 1937년 프랑코 군대가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정권을 찬탈하고 1975년 말까지 이어지는 프랑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모두 스페인 내전이 그 바탕이다. 사르트르의 」역시 스페인 내전이 이야기의 배경이며, 프랑코 군부의 반란에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했던 주인공 파블로 이비에타는 그의 동료 라몬 그리스의 행방을 토해내도록 요구당하고 있다. 참고로 그가 갇힌 감옥을 지키는 팔랑헤 당원들은 스페인의 파시스트 운동 세력이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삶과 죽음의 보색대비

 

 이 이야기에는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날의 사형수의 심정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파블로 이비에타, 톰 슈타인복, 후안 미르발. 이 세 사람은 간결한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사람의 생사여부를 판가름하는 과정은 굉장히 쉽게 끝이 난다. 인적사항을 몇 번 묻는 재판과 사람을 살려내는 병원은 감옥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감방으로 변한 병원 지하실 앞에서 말 한마디로 사형은 선고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세 사람은 하루도 못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만약 이 때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사형까지 진행되었다면,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겠지만 지루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진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죽음을 더 선명히 보여주기 위해 생생한 삶을 감옥 속에 들여보낸다. 생생한 삶은 바로 사형수를 관찰하러 들어온 벨기에 의사이다. 당연하게 내일이 있는 사람을 사형수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사형수들의 죽음은 한층 더 선명해진다.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몸이다. 주인공 파블로는 이성은 또렷히 살아있어 주변 사형수와 대화를 하고 혼자 사색을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이다. 그가 감금된 감방은 외풍이 심해서 끔찍이 추운 곳이다. 게다가 사형수들은 옷가지를 모두 빼앗기고 셔츠와 마 바지만 걸치고 있다. 그러나 파블로는 어느 순간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감각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살아있는 몸, , 벨기에 의사의 몸을 보고난 후다.

 

여기 있으면 몸이 떨리지 않습니까?”

그는 추워 보였고, 얼굴은 보랏빛이었다.

춥지 않소.” 나는 대답했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날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는 알아차렸다.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한겨울에, 바람이 이렇게 불어대는 지하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보니 역시 땀에 젖어 있었다. 동시에 셔츠도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전부터 땀을 뻘뻘 흘렸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저 돼지 같은 벨기에 녀석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뺨에 땀방울이 흐르는 걸 보고 거의 병리학적인 공포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정상적이라고 느끼며 추위를 느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18-19)

 

 신체의 이상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하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감방 안에 그저 죽음의 공포에 감각이 마비된, 사형수 세 명의 몸만 있었다면, 이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생생히 살아 추위에 정상적으로 떨고 있는 벨기에 의사의 몸이 있었기에, 몸이 표현하는 죽음은 더 선명해진다.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음이 자신 앞에 와있다는 것을 더 직접적으로 깨닫게 된 주인공은 의식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살아있었다면 자연스러웠을 감정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생의 감정들인데, 이러한 생의 감정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신체의 죽음에 이은 감정의 죽음은 이야기의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동정심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난 당신을 알고 있소. 내가 잡히던 날, 당신이 병사 마당에 파시스트들과 함께 있는 걸 보았소.”

나는 말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의사의 존재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없어진 것이다. 평소에는 한 사람을 공격하면, 결코 그를 놓치는 법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젠 말하고 싶은 욕망조차도 사라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돌렸다. (17)

 

그는 내 뺨에 땀방울이 흐르는 걸 보고 거의 병리학적인 공포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정상적이라고 느끼며 추위를 느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의사의 얼굴을 까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려 하자마자 어느새 수치심과 분노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무심코 벤치에 다시 주저앉았다. (19)

 

나는 1년 전부터 그녀와 함께 살았다. 어젯밤만 해도 그녀를 단 5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도끼로 팔이라도 잘랐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녀에 대해 얘기했고,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할 말도 없었다. 껴안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28)

 

 

담배피는 사르트르

 

 

 

 욕망, 수치심, 분노, 애정. 갑자기 이 감정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이고 완벽한 절단 앞에 일시적인 감정의 기복이 하찮은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주인공에게 벨기에 의사를 공격하여 아픈 자를 돌보러 왔다는 거의 허울을 벗겨버리고 죽기 전의 신체의 이상을 점검하러 왔다는 진의를 까발리려는 욕망이 일었다고 하자. 그 욕망을 실행으로 옮기고 나서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의사의 당혹감이나 의사에 대한 주변 사형수들의 적개심, 그리고 일종의 승리감일 것이다. 그러나 내일 있을 사형이 집행되고 나면 이러한 것들은 완벽한 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치심과 분노, 애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 죽음이라는 극단적 단절 앞에서 그는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들을 통해, 주인공 파블로는 죽음의 본질에 한층 더 다가간다. 나와 감방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죽음은 몇 시간 뒤에 찾아오지만, 그렇지 않은 감방을 지키고 있는 팔랑헤 당원들이나 벨기에 의사에게도 결국 죽음은 찾아온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에게 결국 닥치고 마는 죽음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영원한 생을 얻은 사람마냥 일시적인 감정과 헛된 노력들에 시간을 써버리다 완전한 단절을 맞아들이고야 만다. 그는 영원한 생이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갖는 망상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지금의 내 상태에서는 만약에 누군가가 와서 조용히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며, 내 목숨이 무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잃은 이상 몇 시간 기다리나 몇 년을 기다리나 다 마찬가지다. 이제는 아무 것에도 애착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온하기조차 하다. (30)

 

 결국 그렇게 날이 밝고, 사형이 집행된다. 그러나 주인공 파블로를 제외한 두 사람만이 총살장으로 끌려나가고, 파블로는 조사를 받는다. 조사를 하는 장교는 라몬 그리스의 행방을 불면, 죽음 대신 삶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블로는 끝내 불지 않는다. 그는 비록 그리스가 시내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촌 집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지만, 묘지에 숨어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삶에게 조롱을 건넨 것이다.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국) 묘지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리고 너희들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라몬 그리스는 묘지에서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그는 사촌과 말다툼을 하고는 사촌집에서 나와 묘지에 가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거짓은 진실이 되고, 동료의 삶은 죽음이 되었고, 그의 죽음은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어이없는 삶의 조롱에 조소를 금치 못한다. 주인공이 주저앉아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설이 내내 다루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마지막에서 급격히 삶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된다. 주인공에게 필연적이던 죽음이 빗나가면서 삶의 부조리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끝이 난다.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삶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건만, 결국 죽음을 변주하여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소설 은 사르트르가 내놓은 죽음이란 또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재미난 답변인 셈이다.

 

 

 

담배 또 피는 사르트르

 

9. 희망 버리기



'Hoppípolla' from Sigur Rós

 

 강박장애를 '인정'하는 데에는 약 삼 년이 소모되었다. 강박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이는 데에만 삼 년이란 시간이 걸렸으므로 그리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좀 더 똑똑이처럼 굴어본다면, 남은 수명이 약 60년 정도 되겠고, 그 60년의 영광이 20대부터 30대까지의 10년 성패에 달려있다고 판단되며, 그 중 30% 해당하는 '3년'을, '강박장애의 인정'이라는 일곱 글자의 주제로 흘려보냈으니, 나는 매우 불리한 시즌 초반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빌어먹을 강박장애를 '극복' 하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이번 시즌의 우승은 이미 물 건너 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인생에는 다음 시즌 같은 건 없다.)


 '나만큼 우승트로피를 원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라고 여기에 적으면서 불현듯 생각난 것인 데, 실은 이놈의 서울바닥엔-


'나만큼 우승트로피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

라는 문장이 훨씬 더 어울린다.

 여기에는 (1) 밤이면 밤마다 만루홈런을 때리는 거포와, (2)그래미 5개부문 수상 로봇과, (3)별에서 온 그대들이 득실득실하다. 예쁜 여자는 그  (1), (2), (3)을 합한 수치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2014년 4월의 수치이다). 그들 속에서 함께 숨쉬는 것만으로도 제법 힘든 일인데, 그들을 이기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예의바르고, 패션감각이 뛰어나고, 성실하며, 아름답게 생기기까지한 이 시대의 건아요, 자유주의의 희망이다. 그들은 절망을 즈려밟고 희망이라는 현판을 가슴팍에 새겼다. 굵고 선명한 폰트여서 아주 멀리에서도 나는 그들의 티셔츠에 새겨진 'Hope' 라는 로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유를 외치는 횃불처럼 그들은 아름답게 빛났다. 그들은 희망이었다. 매우 명백히 '희망'이었다. 희망적인 단어로 표현해봐도 역시나

 '희망'이다.



 전진하는 그들의 대열에서 나는 휩쓸려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들을 따라 걸었다. 나는 뒤쳐졌다. 왜인지 설명하는 데에는 나의 강박장애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것만으로 나의 느려터진 걸음을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나는 8756개비가 넘는 담배를 태웠고, 700잔이 넘는 아메리카노(아이스를 합한 수치이다)를 들이부었다. 부족한가 싶어서 보리맛이 나는 알콜도 제법 마셨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들을 쫓아가기가 힘에 부쳤다. 뒤쳐진다고 느낄수록 나는 더 많은 강박증세를 보였고, 그런 강박증세는 도리어 나의 다리를 둔화시켰다. 이런 악순환은(그럴듯한 과학용어로는 '음의 되먹임'이라고도 한다.) 제법 오랜시간 지속되어 나를 반쯤은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절름거리는 나의 모습을 꼴도보기 싫어서 후드티를 뒤집어썼지만, 끊임없이 굴러대는 나의 눈동자로 '그들'의 모습이 계속 보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자꾸만 보였다. 'Hope' 라고 프린팅된 그들의 티셔츠가 보였다. 반짝이는 귀금속과 그들의 아름다운 입맞춤이 보였다. 견딜 수 없을만큼 희망적인 장면들이 보였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면, 나는 아마 패배의 제왕일 텐데도 나는 계속 부러웠다. 가질 수 없는 것일수록 더 반짝거리고 더 아름다웠다. 가질 수 없어서 더 희망적이었다.

 <The Catcher in the Rye>의 홀든 콜필드처럼 허영심과 위선만이 나를 끌어안았다. '피해의식'인지 '자격지심'인지 하는 사자성어들은 나를 곧잘 지배했다. 인간관계와 도덕 같은 것들로부터 이리저리 잘 도피했지만, 비겁한 도피의식으로부터는 도무지 도피할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간다고 느꼈다. 정말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성공하는 거라고해서 희망을 가졌다. 희망을 가지면 누구든 성취할 수 있다고해서 희망을 가졌다. 희망, 희망 환청이 들렸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민주시민으로 생존하기 위해 희망하였고, 희망에 의존했다. 희망을 가지라고, 열렬한 희망만이 나를 이끌어줄 거라고해서 '희망'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훔쳤다. 합당한 돈을 지불하지 않은 채 희망의 굴레를 입었다. 나를 희망에 가둔 채 귀를 막았다. 하얀 이어폰을 꽂고, 'Hope'라는 노래를 계속 재생했다.

'희망강박장애'라는 진단결과에 나는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이쯤되면 벌써 글자가 너무 많아져서, 나도 줄이려던 참이다(너무 재촉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물론 이쯤되면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글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참이기도 하다.


나의 근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가끔 조깅을 한다. 별로 희망에 찬 뜀박질은 아니다.

나는 요즘 제법 규칙적이라서, 도피할 틈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내 학점이 4점대이길 희망하는 건 아니고,

나의 강박적인 증세는 두 달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기분이지만, 이 장애를 완전히 극복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아직도 이번 시즌의 건승을 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섹시한 우승트로피를 열렬히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근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희망을 버렸다.

이 글을 쓰면서 세 달여만에 담배를 다시 피워 봤는데, 도저히 역겨워서 못피겠다는 기분이 들어서 18개비가 남은 담배곽을 버렸다(라이터도 함께).


나는 희망을 버렸다

(담배도 함께, 라이터도 함께).


 희망을 버리고 얻은 게 뭐냐면 nothing.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희망 말고 OO을 얻었다면 또 다시 'OO강박장애'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아! 나의 근황에서 빠트린 게 있다.

이게 제일 중요한 데 빠트렸네. 나는 요즘 자기 전에 기도를 한다.

희망을 버리게 해달라고 희망하는 기도-

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희망하는 기도를 한다.





Amen.

 

 

 

노래가 남았으니 마저 감상하길.





 며칠 전 서점을 들러 책을 구경하던 도중, 『2014 이상문학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표지에서 편혜영 작가의 얼굴과 그녀의 소설 제목인 ‘몬순’을 보았다. ‘아, 결국’ 혹은 ‘아, 드디어’라는 생각과 함께 조만간 구입하서 읽겠노라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집에 와 며칠 뒤 그녀의 전작 『저녁의 구애』를 펼쳐들었다. 지난날의 그녀를 약간 엿본 뒤, 지금의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국문학과 수업을 듣던 때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가 나의 쪽지시험 대상이었고, 나는 그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쪽지시험이라 책을 가볍게 읽고 대략의 줄거리와 핵심어들을 외우고 들어갔건만, 문제는 이러했다. ‘책에서 가장 좋은 단편 3개를 고르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쓰시오.’ 나는 집중해서 읽었던 맨 앞의 세 편을 꼽았고, 정말 형편없는 시험지를 제출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수업, 교수님은 잘 쓴 학생 몇 명의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이 쪽지시험의 출제의도를 말했다. 나이 든 자신의 ‘좋은 작품’과 요새 젊은이들의 ‘좋은 작품’ 사이의 괴리를 알아보고 싶었다는 게 교수님의 의도였다. 교수님은 자신이 꼽은 ‘좋은 단편’과 우리들이 뽑은 ‘좋은 단편’이 대체로 비슷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도 운 좋게 얼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교수님은 이어 말했다. 편혜영, 이 친구가 글을 잘 쓴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아마 조만간 이 친구가 큰 상을 하나 받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나는 서점에서 그 교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서점에서 이상문학상 책을 보았을 때, 책장을 펼쳐 심사위원 명단에서 그 교수님의 성함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진 않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편혜영을 그렇게 만났다.



*



 편혜영의 단편모음집 『저녁의 구애』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꼽자면 ‘반복’과 ‘섬뜩함’을 들 수 있겠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을 이야기하고, 그 반복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섬뜩함’ 또는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편혜영을 수식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그리면서 섬뜩함을 이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책의 제일 처음에 위치한 「토끼의 묘」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



 ‘토끼였다’라는 문장으로 글은 시작한다. 파견지에 나간 주인공은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를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충혈 된 눈처럼 빨간 눈을 가진 토끼에게 연민을 느끼고 집에 데려온다. 그리고 그는 파견나간 6개월간 하루하루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그리고 파견근무가 끝나는 날, 그는 주워온 곳에 다시 토끼를 버리고선 파견지를 떠난다.



 이야기는 계속하여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을 다룬 이야기가 지루하기 보다는 섬뜩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소설의 구성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평평한 평지를 끊임없이 걸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보다 더 지루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그 길에 끝에는 그 남자의 생명을 앗아갈 살인범이 있다고 해보자. 그 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도시에서 그의 생활은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퇴근길에 무단결근 중인 선배의 집에 들러 습관처럼 문을 두드려보고, 집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며 다행히 괴상한 냄새도 풍겨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오는 게 전부였다. (23)



 편혜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소멸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모두가 반복되는 일을 한다면,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삶 속에서 대화를 지워나간다. 이 이야기는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이자, 의사소통이 부재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어느 틈에 말없이 홀로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도시로 온 후 그가 나눈 가장 긴 말은, 담당자와의 대화를 제외하면, 상점 주인에게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정미된 쌀의 가격을 물은 게 다였다. (26)



 대화라는 것은 적어도 두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목소리로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대화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해도 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혼자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은 점차 소멸되어 간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이 소멸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는 무단결근으로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반복되는 삶의 끝에는 결국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한 주체의 소멸이라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소멸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한층 더 섬뜩하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면 아침에 등교해서 저녁에 하교하고, 회사원이라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생활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는가. 소설에는 그 답변도 살짝 보여주고 있다. 편혜영은 그 답변을 사냥개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주어진 것과 시키는 것만 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냥개. 이 사냥개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비유이자, 우리에게 건네는 작가의 충고가 아닐까.



도대체 어떤 정보를 모아야 하는 겁니까? 그가 선배에게 물었다. (중략) 어떤 정보라도 괜찮아. 뜻밖에도 선배는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보를 선택하고 유용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라 다른 담당자 몫이니까. 자네는 단지 수집만 하면 돼. 말하자면, 선배가 덧붙였다, 일종의 사냥개라고 생각하면 돼. 어떻게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시하는 사냥감을 단지 잡아오기만 하면 되거든. 무엇을 잡을지, 잡은 후에 구울지 삶을지 버릴지 박제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숲을 달리는 사냥개가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서서 구경하는 주인이지. 그러니까 개는 잡을 때까지 죽도록 초원을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뭐, 듣기 좋은 비유는 아니군요. 그가 선배에게 대꾸했다. 하하하, 그렇겠군. 미안하네, 사실 자네가 아니라 내가 그런 심정이라서 말이야. 선배가 쑥스러운 듯 사과했다. 그는 이해했다. 그 비유를 따르자면 어차피 선배도 사냥개의 주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15-16)


  마티스의 그림 한 장을 보여주고,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이라는 의아한 결론만 툭 내던진 채 2주 뒤에 알려주겠다던 삐아오가 2달만에 돌아왔다.^^; 제대로 된 휴재 공지도 없이 궁금해하는 독자를 남겨둔 채 늦게 온 걸 사과하며, 다시 마티스의 <피아노 레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음악에 주목하기에 앞서 그림의 기하학적인 부분에 주목을 하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삼각형이다. 그것도 비슷한 모양의 직각 삼각형이 반복되고 있다. 그림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 그림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연습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다시 <평균율 피아노곡>이 구성되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은 푸가 형식의 대표적인 곡이다. 푸가 형식부터 설명하자면 핵심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부’인데 중요한 것은 성부가 하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합창에서 모두가 하나의 선율을 부르기보다 좀 더 풍부한 노래를 위해 성부를 나누어 화음을 넣는 예를 생각하면 쉽다. 이렇게 성부가 여러 개인 것은 ‘폴리포니(polyphony)’라고 하는데 ‘여러 개’를 뜻하는 라틴어 ‘poly'와 ’소리‘를 뜻하는 라틴어 ’phony'가 합쳐져서 말 그대로 여러 소리라는 뜻이다.


푸가를 정의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모방’이다. 앞에서 살펴 본 성부들이 시작 부분에서 나오는 주제를 계속해서 모방하는 것이다. 성부가 여러 개라는 것은 음의 높이가 상이하다는 것이므로, 각각 다른 음을 가지면서도 주제는 똑같이 모방하는 식의 진행이 곡 전체에 걸쳐서 되풀이된다. 개인적으로 푸가의 ‘모방’이라는 특징을 알게 된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바흐의 협주곡을 좋아하는 편인데,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게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새롭고 예상하지 못하는 음악보다 익숙하고 안정된 느낌의, 어느정도 예상 가능한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인데 바흐는 모방을 통해 이런 내 취향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그림에서는 직각 삼각형이 바로 도입부에 제시되는 주제가 된다. 도입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차지하는 면의 넓이나 회색 벽에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초록의 색 때문에 가장 먼저 인식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책상 옆면의 직각 삼각형과 피아노 위의 메트로눔, 심지어는 소년의 앞머리까지 직각 삼각형이 여러 번 등장하면서 서로를 모방하고 있다. 대신 책상 옆의 삼각형은 색이 다르고, 메트로눔은 직각 삼각형에서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삼각형이고, 소년의 앞머리에 있는 삼각형은 아래쪽으로 선대칭이 되어있다. 즉 감상자가 삼각형이 주제인 것을 알 수는 있으나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주면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이런 특징은 원래 2차원이 아닌 것을 2차원으로 그려내는 것에 고민을 많이 해왔던 작가 마티스가(삐아오의 들리지 않는 음악 [Op.16] 참조) 푸가 풍의 음악적 작곡기법 역시 2차원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노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실 위에서 말한 폴리포니와 각각의 성부가 선율을 모방한다는 두 가지 특징은 대위법적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위법(counterpoint)은 ‘점대점(point count point)’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대위법은 하나의 선율에서 시작되어 각각의 성부가 그 시작되는 선율을 모방하는데 이 때 성부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되면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대표적인 작곡 기법이다. 기악음악에서 대위법이 사용된 악곡 형식이 바로 위에서 살펴 본 푸가인 것이다. 바흐는 푸가 작곡가로 가장 잘 알려져있는데 바흐가 활동하던 당시에 푸가는 독립된 형식으로 쓰이기보다는 흔히 다른 악곡의 한 부분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주제 삼각형으로부터 선대칭 되어있는 삼각형의 앞머리를 단 채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무표정하다고까지 표현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즐기고 있는 느낌을 주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앙리 마티스는 대위법적인 푸가 형식의 엄격한 구성을 그림에서의 엄격한 구성으로 이조시켜서 표현함으로써 <평균율 피아노곡>의 음악으로서의 한계를 꼬집고 있다. 그에게 <평균율 피아노곡>은 연주하는 곡이라기보다 기술처럼 숙달해야하는 대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사실 회화는 아무것도 말해주지도, 들려주지도 않는다. 침묵하는 대상을 두고 특정한 곡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위험한 시도이다. 그림의 구도를 조금 다르게 음악적 구성으로 읽어보면서 감히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이라고 이야기해보았다.(바흐에 관한 글이라 작품번호도 살짝 바꿔보았다. 독일의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바흐에게 특별한 음악적 지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반적인 작품 번호 ‘Opus’ 대신 바흐만의 작품번호로 ‘BWV’를 쓴다.) 결국은 조용한 회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지만 그래도 음악이 같이 들린다면 좀 더 새롭고 재밌는 감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