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 주의사항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연수의『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김연수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법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316)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작가의 말에서 김연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김연수는 늘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김연수는 쉽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도, 그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바람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루어져, 많은 이들이 그의 이야기가 난해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끝까지 읽는 이유는 무엇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꼽을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의 글 속에 있는 추리요소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어떤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김연수는 능숙한 솜씨로 독자들이 그 의문점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도록 한 뒤, 또 그 능숙한 솜씨로 호기심을 이어나간다. 이 글에서는 그의 작품 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서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득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관,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63-64)

 

   소설은 톱니바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톱니바퀴는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중심축이 된다.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 소설은 미리 밝혀둔다. 앞에서 인용한 문단 바로 다음 문단의 첫 문장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결국 내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게 되기까지 첫번째 톱니바퀴의 역할을 한 건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 자원봉사자의 부지런함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세계의 끝여자친구라는 생소한 단어의 결합이 궁금증을 일으키듯, ‘사랑한 자원봉사자의 부지런함이 연결된다는 말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첫 번째 톱니바퀴에 이어지는 톱니바퀴들을 소개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서서히 풀어나간다. 자원봉사자가 게시판 비는 공간에 일주일마다 시를 하나씩 소개했던 것이(첫번째 톱니바퀴), 그 자원봉사자가 그만두면서 도서관 이용자들이 그 공간에 시를 붙이기 시작했고(두번째 톱니바퀴), 그것이 발단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게시판에 붙일 시를 선정하는 시 윤독 모임이 만들어졌다(세번째 톱니바퀴).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드디어 톱니바퀴는 주인공이 연관된 톱니바퀴에 맞물리게 된다.

 

   주인공은 도서관 게시판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시가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시 속의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라는 구절을 보고, 자신이 매일 달리는 호수에 서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를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은 게시판에 붙어있는 시에 매료되어 도서관 검색대에서 메타세콰이어를 치게 된다. 그리하여 <메타세콰이어,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책을 빌려 읽게 되고, 메타세쿼이아는 최근 들어서 국내에, 그것도 주로 가로수로 보급된 나무이기 때문에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보는 일은 드문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시 속의 메타세콰이아와 주인공 집 근처 호수의 메타세쿼이아 사이의 연관성에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된다.

 

   톱니바퀴는 계속 맞물리며 호기심을 풀어나간다. 시 윤독 모임에서 만난 강사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희선 씨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게시판에 걸어놓은 장본인이자, 그 시를 쓴 시인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다. 주인공 '나'는 희선 씨로부터 시인과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시인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랑을 감히 전할 수 없었다. 시인은 차마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못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호수 끝 메타세콰이어까지 산책을 하였다. 결국 시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멀리 가본 곳이 호수 끝 메타세콰이어였으며, 그 곳이 시인에게는 세계의 끝이 된 것이었다.

 

   메타세콰이어와 관련된 궁금증은 풀렸지만 톱니바퀴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빌린 <메타세콰이어, 살아있는 화석>이란 책에서, 시인이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 밤 열시의 산책. 호수 건너편 도시의 불빛. 거기에 묻다.’라고 써놓은 낙서를 보았고, 메타세콰이어 근처 땅 속에서 시인이 묻어놓은, 그러나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한다. 우체통에 넣어달라는 죽은 시인의 부탁 대신 와 희선 씨는 편지를 직접 전해주기로 한다.

 

이제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맞물려 도착점에 거의 도달한 듯하다. 절멸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발견된 메타세콰이어처럼, 죽은 시인의 사랑의 편지는 와 희선 씨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고, 결국은 시인이 사랑했던 그녀에게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이 종착지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소설에서 중간중간에 등장하던 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결말을 맺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는 마지막 힌트를 제공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청년이 처음 도서관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시인과 닮아서. 눈썹이며, 눈매며…… 그래서 보자마자 희선씨라고 부르라고 한 거예요.”

 한참 길을 걸어가는데, 희선씨가 말했다.

 “그 말 듣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주책이었나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말했다.

 “김희선이라고 하시는 순간, 제 여자친구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정말? 여자친구가 그렇게 예쁘단 말인가요?”

 “아니요. 그 배우만큼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름은 같아요. 하지만 제 눈에는 그 배우만큼 예쁘게 보였죠.”

 “그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인데…… 얘기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 표정을 보니.”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86-87)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시인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에게는 주인공 의 사랑이야기로 끝이 나는, 심지어 시인의 편지가 전해지기 직전에 끝이 나는 이야기에 당황할 수도 있겠다. 한편 주인공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했던 독자들에게도 애매모호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난해하달 수도 있겠다. 소설은 소설의 마지막을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호기심이라는 추진력을 통해 달려온 독자들에게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추구하는 김연수의 하나의 전략일 것이다. 나의 몫으로 남겨둔 마지막장을 보며 생각해본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 가 기적적으로 한 죽은 시인의 사랑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고, 그리고 이 이야기는 주인공 가 죽은 시인의 사랑을 이해해가면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지나간 사랑과 지나간 이별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고.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무리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해도.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