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색관계

 

 신호등은 정지를 의미하는 빨간색과 보행이나 주행을 의미하는 녹색이 있다. 빨간색과 녹색을 신호체계에 사용한 이유는 이 두 색이 보색관계이기 때문이다. 보색이란 두 색을 섞어 하얀색이나 검정색이 나오는 색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보색관계에 있는 두 색을 나란히 놓으면 각각의 색은 더 선명하게 보이는데 이를 보색대비 효과라고 한다. 이는 단순하고도 잘 알려진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대척점에 있는 것을 곁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 폴 사르트르의 은 보색대비를 문학에 훌륭하게 적용시킨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서로 보색관계에 놓인 두 가지는 바로 삶과 죽음이다. 죽음은 삶으로 인해 그 색이 더 짙어지며, 그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삶은 더욱 정확하게 묘사된다. 오늘 이야기는 실존문학의 거장 사르트르의 작품 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공화파 수병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인 분쟁의 성격을 띠는 내전이다. 19362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이를 반대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군부를 이끄는 프랑코 장군은 예상치 못한 시민들의 대항으로 반란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 세력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세()를 얻는다. 인민전선 정부는 사회주의 국제 조직인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을 중심으로 스페인 정부를 도울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을 구성한다. 53개국에서 3만 명이 넘는 자원자들이 국제여단으로 나섰지만, 1937년 이후 소련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여단의 세력은 크게 줄어든다. 결국 1937년 프랑코 군대가 마드리드를 함락하면서, 정권을 찬탈하고 1975년 말까지 이어지는 프랑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스페인 내전은 많은 예술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모두 스페인 내전이 그 바탕이다. 사르트르의 」역시 스페인 내전이 이야기의 배경이며, 프랑코 군부의 반란에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했던 주인공 파블로 이비에타는 그의 동료 라몬 그리스의 행방을 토해내도록 요구당하고 있다. 참고로 그가 갇힌 감옥을 지키는 팔랑헤 당원들은 스페인의 파시스트 운동 세력이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삶과 죽음의 보색대비

 

 이 이야기에는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날의 사형수의 심정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파블로 이비에타, 톰 슈타인복, 후안 미르발. 이 세 사람은 간결한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사람의 생사여부를 판가름하는 과정은 굉장히 쉽게 끝이 난다. 인적사항을 몇 번 묻는 재판과 사람을 살려내는 병원은 감옥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감방으로 변한 병원 지하실 앞에서 말 한마디로 사형은 선고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세 사람은 하루도 못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만약 이 때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사형까지 진행되었다면,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겠지만 지루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진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죽음을 더 선명히 보여주기 위해 생생한 삶을 감옥 속에 들여보낸다. 생생한 삶은 바로 사형수를 관찰하러 들어온 벨기에 의사이다. 당연하게 내일이 있는 사람을 사형수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사형수들의 죽음은 한층 더 선명해진다.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몸이다. 주인공 파블로는 이성은 또렷히 살아있어 주변 사형수와 대화를 하고 혼자 사색을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이다. 그가 감금된 감방은 외풍이 심해서 끔찍이 추운 곳이다. 게다가 사형수들은 옷가지를 모두 빼앗기고 셔츠와 마 바지만 걸치고 있다. 그러나 파블로는 어느 순간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감각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살아있는 몸, , 벨기에 의사의 몸을 보고난 후다.

 

여기 있으면 몸이 떨리지 않습니까?”

그는 추워 보였고, 얼굴은 보랏빛이었다.

춥지 않소.” 나는 대답했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날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는 알아차렸다.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한겨울에, 바람이 이렇게 불어대는 지하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보니 역시 땀에 젖어 있었다. 동시에 셔츠도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전부터 땀을 뻘뻘 흘렸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저 돼지 같은 벨기에 녀석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뺨에 땀방울이 흐르는 걸 보고 거의 병리학적인 공포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정상적이라고 느끼며 추위를 느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18-19)

 

 신체의 이상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하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감방 안에 그저 죽음의 공포에 감각이 마비된, 사형수 세 명의 몸만 있었다면, 이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옆에 생생히 살아 추위에 정상적으로 떨고 있는 벨기에 의사의 몸이 있었기에, 몸이 표현하는 죽음은 더 선명해진다.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음이 자신 앞에 와있다는 것을 더 직접적으로 깨닫게 된 주인공은 의식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살아있었다면 자연스러웠을 감정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생의 감정들인데, 이러한 생의 감정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신체의 죽음에 이은 감정의 죽음은 이야기의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동정심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난 당신을 알고 있소. 내가 잡히던 날, 당신이 병사 마당에 파시스트들과 함께 있는 걸 보았소.”

나는 말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의사의 존재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없어진 것이다. 평소에는 한 사람을 공격하면, 결코 그를 놓치는 법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젠 말하고 싶은 욕망조차도 사라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돌렸다. (17)

 

그는 내 뺨에 땀방울이 흐르는 걸 보고 거의 병리학적인 공포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정상적이라고 느끼며 추위를 느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의사의 얼굴을 까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려 하자마자 어느새 수치심과 분노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무심코 벤치에 다시 주저앉았다. (19)

 

나는 1년 전부터 그녀와 함께 살았다. 어젯밤만 해도 그녀를 단 5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도끼로 팔이라도 잘랐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녀에 대해 얘기했고,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할 말도 없었다. 껴안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28)

 

 

담배피는 사르트르

 

 

 

 욕망, 수치심, 분노, 애정. 갑자기 이 감정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이고 완벽한 절단 앞에 일시적인 감정의 기복이 하찮은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주인공에게 벨기에 의사를 공격하여 아픈 자를 돌보러 왔다는 거의 허울을 벗겨버리고 죽기 전의 신체의 이상을 점검하러 왔다는 진의를 까발리려는 욕망이 일었다고 하자. 그 욕망을 실행으로 옮기고 나서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의사의 당혹감이나 의사에 대한 주변 사형수들의 적개심, 그리고 일종의 승리감일 것이다. 그러나 내일 있을 사형이 집행되고 나면 이러한 것들은 완벽한 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치심과 분노, 애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 죽음이라는 극단적 단절 앞에서 그는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들을 통해, 주인공 파블로는 죽음의 본질에 한층 더 다가간다. 나와 감방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죽음은 몇 시간 뒤에 찾아오지만, 그렇지 않은 감방을 지키고 있는 팔랑헤 당원들이나 벨기에 의사에게도 결국 죽음은 찾아온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에게 결국 닥치고 마는 죽음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영원한 생을 얻은 사람마냥 일시적인 감정과 헛된 노력들에 시간을 써버리다 완전한 단절을 맞아들이고야 만다. 그는 영원한 생이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갖는 망상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지금의 내 상태에서는 만약에 누군가가 와서 조용히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며, 내 목숨이 무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잃은 이상 몇 시간 기다리나 몇 년을 기다리나 다 마찬가지다. 이제는 아무 것에도 애착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온하기조차 하다. (30)

 

 결국 그렇게 날이 밝고, 사형이 집행된다. 그러나 주인공 파블로를 제외한 두 사람만이 총살장으로 끌려나가고, 파블로는 조사를 받는다. 조사를 하는 장교는 라몬 그리스의 행방을 불면, 죽음 대신 삶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블로는 끝내 불지 않는다. 그는 비록 그리스가 시내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촌 집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지만, 묘지에 숨어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삶에게 조롱을 건넨 것이다.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국) 묘지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리고 너희들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라몬 그리스는 묘지에서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그는 사촌과 말다툼을 하고는 사촌집에서 나와 묘지에 가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거짓은 진실이 되고, 동료의 삶은 죽음이 되었고, 그의 죽음은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어이없는 삶의 조롱에 조소를 금치 못한다. 주인공이 주저앉아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설이 내내 다루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마지막에서 급격히 삶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된다. 주인공에게 필연적이던 죽음이 빗나가면서 삶의 부조리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끝이 난다.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삶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건만, 결국 죽음을 변주하여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결국 소설 은 사르트르가 내놓은 죽음이란 또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재미난 답변인 셈이다.

 

 

 

담배 또 피는 사르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