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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별의 공식, 사랑과 이별에 대한 예의
장마. 이제 한동안 우중충한 하늘 아래 비가 내릴 것이다. 돌이켜보면 요즘은, 생각보다 비 내리는 날이 적었던 것 같은데. 나만 그런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빗소리와 바람이 싫지 않다.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듣다 문득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여자, 정혜>(2005)와 <멋진 하루>(2008)를 연출한 이윤기 감독의 작품으로, 주연은 현빈(지석 역)과 임수정(영신 역)이 맡았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헤어지는 커플의 이야기, 시작부터 이미 끝나있는 커플의 이야기이다. 결혼 5년차에 접어든 지석과 영신이 조용하게, 어쩌면 지루하게 이별하는 이야기. 이 영화에는 이별의 징조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은 바로 영신의 무덤덤한 한 마디, “저기, 나 나갈 거야.”
영화 시작 후 장장 10분간 잠깐의 단절도 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의 대화. 차 안에서, 그럴듯한 표정의 변화가 없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배경만 끊임없이 바뀐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배려와 걱정으로 가득한데 뭔가 불편하다.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둘은 상대를 배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몸에 배었지만, 모두 관성일 뿐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영화 내내 두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괜찮아?”
배려와 이기심의 사이
영화 속에 드러나는 지석은 정말 배려심이 깊다. 짐을 싸고 커피를 끓여주는 사소한 친절함부터 영신이 불편할만한 질문은 최대한 피하는 인내심까지.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집을 나가겠다는 영신의 말에 대한 지석의 반응은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건가?”라는 조심스러운 한 마디, 지석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괜찮아.” 그는 참고, 또 참고, 자신보다는 상대를 걱정한다. 그게 눈에 보이는 사람이다.
영신도 그렇다. 지석에 비해 감정 변화도 크고 좀 더 직설적인 것 같지만, 지석에게 적응한 것이려나. 그러나 이런 그녀가 배려심 깊은 지석을 평가하는 단어는 놀랍게도 '이기심'이다.
지석: 연락은 해 놨어?
영신: ...그 사람이랑? 응... 자기 참 나이스해. 좋은 사람이야.
지석: 알잖아, 그런 뜻으로 한 거 아닌 거.
영신: 아니야. 나 기분 나쁘지 않아.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기분이 왜 나쁘겠어.
지석: 미안해. 난 그냥….
영신: 왜 나한테 화내지 않는 거지? 당신 나한테 화내도 돼. 봐봐. 그래도 되는 상황이잖아. ... 듣고 싶어. 난 이제 정말 모르겠거든.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화를 못 내는 사람인지. 아니면 화가 나도 정말 잘 참을 수 있는 사람인지.
지석: 어떻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잖아. 왠지 그냥, 자기 마음이 정해진 이상, 어떻게 해도 바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분명히 나한테 문제가 있으니 또 이렇게 된 거고.
영신: 그래서, 왠지 마음에 걸려서, 바람난 와이프 짐 싸는 거 도와주고, 근사한 식당가서 마지막 저녁 식사 같이하면서 나이스한 모습 남기고 싶은 거야?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모르지, 자기는?
사실 그렇다.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짐 싸는 걸 돕고, 정성스레 커피를 끓여주고,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해놓는 지석의 모습이 쉽게 이해될 만한 것은 아니다. 영화 프레임 속 지석의 모습은 착하고 친절하고 젠틀하지만, 영신이 분출하는 감정들은 그녀가 지난 시간들 속, 프레임의 이면에서 어쩌면 오래 외롭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다 짐작하면서도, 아내의 새 남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원망조차 하지 않는 지석에게 체념하면서. 그래서 그녀는 굳이 지석에게 도발하듯 묻는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안 궁금해?”
영신에게서 갑작스레 분출된 약간의 감정, 그간의 답답함.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려는 영신, 그리고 영신이 라이터를 찾지 못하자 가스렌지 불로 친히 담뱃불을 붙여주는 지석. 그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콧김을 내면서 고개를 숙이는 영신은 결국 지석의 가슴을 세게 내리친다. 끝까지 친절하고, 그래서 이기적인 그에게.
망설임과 미련 그리고 비
영화의 첫 장면, 차 안에서의 대화에서 짤막하게 흘러나오는 일기 예보는 영화를 가로지르는 중심 소재, 비에 대해서 살짝 힌트를 준다. “지금 전국적으로 맑은 날씨고요, 이번 주말까지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 되겠습니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부터는 (비가 내릴 예정입니다.)…” 이제 영화는, 끝나는 순간까지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는다. 꽤나 오랫동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면서 영신과 지석은 각자 이런 저런 상념에 빠지는 듯하다. 그리고 비는 영신의 발을 묶어‘주고’ 둘의 이별을 유예시키는 명분이 된다.
영화 전체에서 영신과 지석은 짐을 싼다. 그런데 사실 영신을 보고 있으면, 영화 시작 전에 거의 다 싸서 그렇겠지만) 짐은 싸는 둥 마는 둥, 느긋하고 미적지근하다. 짐을 싸는 와중에 괜히 담뱃재가 떨어진 의자를 꼼꼼히 청소하기도 하고, 메모가 붙여진 요리책을 보며 추억을 상기하기도 한다. 그건 그녀가 쿨한 성격이라 짐을 별로 안 챙겨 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서둘러 집을 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침 이웃 주민의 고양이가 집으로 들어와 숨어버리기도 하고, 마침 서울로 가는 다리가 물에 잠겨버리기도 하고. 물론 이 소극적인 유예는 결코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럼 오늘은 안 되겠네. 내일 나오는 게 낫겠다.”라고, 영신의 애인이 말한다.
이렇게 집 안에서, 떠날 준비를 성실히 (함께) 하면서도 이따금씩 망설이고 멈춰버리는 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별의 과정을 유비하고 있다. 왜 소중한 것들은 끝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일까. 마음을 정하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괜시리 애틋해지는 과거와 그로 인한 미련과, 미련을 안고 갈 것인가 버릴 것인가의 갈등과, 결국에는 미련을 털어버리기로, 털어내야 한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까지. 아주 점잖은 이별의 공식. 영신은 소중히 다시 보수한 요리책을 가방에 담았다가 다시 꺼내놓고, 빗물이 찬 지하실을 청소하던 지석도 버릴 물건들을 한가득 내놓는다.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
지석: 걔들은 다 버리려구.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
영신: 쓸모없는 건데 왜 이렇게 놔둔 건데.
지석: 그러게.
영신: 나는 열심히 버리고, 자기는 늘 열심히 모으고.
지석: 버릴 건 미련 없이 버려야하는데, 그게 잘 안 돼.
영신: 의미심장한 말이네, 그거?
이별의 순간. 헤어짐을 인정하기
영신: 이상하다, 내가 하면 왜 잘 안 되지?
지석: 이게 그렇게 어렵나? 다음에 또 여기서 걸리면 뒤로 한 번 이렇게 빼서 내려. 그리고 다시 닫으면 닫혀. … 힘으로 하려니까 그렇지 요령으로 해야 하는데. 이제 적응할 만도 한데.
여느 연인들의 이별장면처럼 눈물을 쏟지도,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지도 않지만 이 둘에게도 이별을 체감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베란다 문이, ‘다음에 또 여리서 걸릴’ 일은 없을 텐데.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며 지석은 결국 이 집, 둘의 결혼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한 영신에 대해서, 그런 ‘우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지석이 집에 들어온 고양이에게 긁힌 상처를 영신이 걱정하며 소독약을 발라주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손이 닿고, 상처와 걱정이 자아내는 묘하고 긴장되는 분위기가 돈다. 하지만, 보통의 멜로 영화라면 분명히 나왔을, 자연스레 기대되는 키스신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이별하는 법, 그러니까 헤어짐을 인정하는 법을 알고 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가스렌지의 담뱃불에서 영신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면, 지석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곳은 황당하게도 양파이다. 양파를 썰다 눈이 매워서 흘러내리는 눈물. 서서히 느려지는 지석의 칼질을 보며 저건 이별의 슬픔 때문이라고 싶지만, 그는 끝까지 신중하다. 실제로 양파 때문에 눈이 매우면 저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눈을 씻으며 쉽사리 물을 끄지 못할 때, 그제야 그의 고조된 감정을 확신해도 되겠다 싶어진다. 쉽게 멈추지 않는 눈물은 너무 오래 참아온 탓이리라.
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 드디어 집에 숨어있던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의 집이라는 낯선 환경이 두려워 숨어 있다가 마침내 적응하고 먹을 걸 찾아 나온 고양이. 그런 고양이를 보며 영신이 나지막이 타이르는 말.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정말.” 이 말은 더 이상 고양이만을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 중간 중간 비치는, 비 갠 후 잘 정돈된 집의 전경들은 ‘괜찮아 진’ 미래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래, 다 괜찮아지기 마련이니까. 비는 그치기 마련이니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이별은 잔잔하고, 조용하고, 담담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의 이별이 정말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절제되고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아프고 현실적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영신의 말처럼 결국 다 괜찮아진다는 것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원작은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라는 제목의 일본 소설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비오는 날 그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제목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바뀐 것은 어쨌든 아카시아 꽃잎과 관련이 있으려나.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외부의 판단에 맡기는 꽃잎 뜯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내가 그를.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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