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➅ <왕의 춤> : 역사와 영화_고증과 상징에 대하여


왕의 춤 (2001)

The King Is Dancing 
7.6
감독
제라르 코르비오
출연
이밀 타딩, 자크 프랑소아, 브누아 마지멜, 세실 브와, 콜레트 엠마누엘
정보
드라마 | 벨기에, 독일, 프랑스 | 108 분 | 2001-11-10




  


제라르 꼬르비오 감독의 <왕의 춤Le Roi Danse>(2000)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 루이14세를 다룬 영화다. 절대군주, 태양왕 등 루이14세를 설명하는 수식어의 함축성을 상기할 때 루이14세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적 인물을 다룬 역사적 영화 <왕의 춤>은 루이14세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최대한 잘 ‘고증(考證)’하고자 한 노력이 보인다. 최대한의 고증을 위한 노력은 등장인물의 의상과 헤어, 배경이 되는 건물과 소품, 나아가 음악과 춤을 망라한 모든 요소들에서 충실히 이루어지며 당대의 문화와 세계관을 반영한 인물들의 행동거지와 대사는 루이14세 시대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빛을 발한다. 이렇듯 태양을 형상화한 루이 14세의 화려한 시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이 영화. 그렇다면 명백히 ‘역사’를 다루는 이 영화의 목표는 ‘최대한 똑같이 재현하기’일까? 상대적으로 팩트의 성격이 강한 역사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이 영화 안에 역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일까? 여기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가지는 필연적 숙제가 도출된다. 바로 픽션으로서의 영화의 본질적 속성과 사실로서의 역사 고증의 관계이다.
이 영화가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한 역사, 그에 대한 고증은 매우 흥미롭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긴장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리고 그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로서 기능하도록 만든 영화 전체의 완결성. 이 철저한 고증의 목표는 무엇인가? 철저한 고증을 수행하면서도 그 안에 심어놓은 ‘상징’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고증 : <왕의 춤>에서 재현되는 역사의 모습
영화 <왕의 춤>의 시대 : 바로크(Baroque) 
먼저, 루이14세의 시대는 바로크의 시대이다. 화려함과 장식성, 사치와 향락 등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바로크는 영화 <왕의 춤>의 배경으로서 완성도 높게 재현된다.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한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며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18세기에 걸쳐 문화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로크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루이13세, 14세로 대표되는 군왕주의의 절대주의 시대이며,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의 지배에서 벗어난 계몽사상시대이다. 바로크 예술은 절대주의의 궁정과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모체로 하여 궁정 양식의 장중한 취향을 기반으로 활력과 움직임, 표현의 강렬함, 현실주의적인 경향과 균형의 파괴에서 오는 부조화가 특징이다. 이러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적 특징은 회화 뿐 아니라 건축, 패션, 음악, 음식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고, 17세기 중엽 광대한 국토, 우세한 국민,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지배체제를 갖춘 프랑스가 영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함에 따라 절대왕정 사상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강화되어 왕좌 중심 문화가 유럽 전역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 불리며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는 등 프랑스를 바로크 양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예술과 미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장식미술 등에 있어서 바로크 양식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사실적 재현 : 의복과 건축




영화 <왕의 춤>은 루이14세의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건축, 패션, 음악 모든 분야의 시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의상은 바로크 문화 그 자체이다. 먼저 바로크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 남성 복식인 쥐스토코르(justaucorps)는 루이14세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몸에 꼭 맞는 남자 코트로 점점 아랫단이 넓어지고 길이가 무릎까지 닿았으며 후에 허리가 가늘어져 날씬한 S실루엣으로 변화했다. 앞 중심에는 단추가 촘촘히 달렸고 단춧구멍을 따라 금․은사로 만든 근 장식을 했는데, 이 끈 장식은 지위와 경제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바로크시대 여성의 복장인 로브(robe)는 몸을 강력하게 조여 몸의 실루엣을 살리는 코르셋과 가슴 또는 등 부분을 깊게 팜으로써 몸의 노출을 만드는 데콜테 네크라인, 그리고 층층이 화려하게 장식된 풍성한 페티코트(petitcoat)와 허리를 조이는 판판한 보디스(옷의 몸통 부분)인 코르발레네(corps baleine)로 완성되었다. 이 때 속에 입은 옷의 주름이 목 밑에까지 오게 하거나 많이 파진 네크라인에 레이스나 프릴을 달았고, 심지어 유두가 보일 정도로 대담하게 가슴을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패션이었다. 





바로크의 헤어장식 또한 바로크의 정신성-절대왕정 이념에서 나오는 위엄의 확립-을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요소이다. 남성의 헤어스타일은 1660년대 이후 풀 버텀 위그(full bottom wig)는 매우 거대하고 무거운 형태로 활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으나 상류사회에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들에게도 퐁탕주(fontange)가 유행했는데, 리넨이나 레이스를 주름잡아 철사로 층층이 세워 부채를 핀 것 같은 형태를 했고, 치맛자락이 길어짐에 따라 퐁탕주의 높이도 더 높아져갔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머리 장식들은 과장되어 불편하고 육체적인 노동에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으나, 오히려 노동과 거리가 먼 의복 양식은 자신의 귀족계층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여겨졌으며 이런 경향으로 인해 과장된 장식의 불편함마저도 충분히 감내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은 원, 직선, 곡선의 조화를 극대화하여 주변의 길, 나무, 분수 등이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조화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크 건축은 다채로운 색상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벽면의 입체 장식과 정교한 도금 장식을 많이 사용하여 그 화려함을 더했다. 교회는 물론 궁정이나 저택 모두 이와 유사한 스타일로 브로케이드와 벨벳 등으로 벽면을 장식하고 여러 가지 색의 드레이퍼리와 호화로운 장식 프레임의 거울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영화 <왕의 춤>의 충실한 바로크 고증에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눈요기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확립이라는 상황이 바로크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문화적 선호의 뿌리가 되며 이는 절대군주로서 자임하기 위한 루이14세가 취한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군주’ 루이14세의 전략으로서 바로크 궁정문화    
<왕의 춤>의 모든 것에는 당시의 역사가 녹아있다. ‘근대’국가의 모델로서 언급되는 절대왕정은 이전의 중세왕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특징으로 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빠르게 나타나 루이14세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평가된다. 절대적인 왕권과 함께 종교로부터 정치의 독립성을 갖고자 하는 루이14세의 강한 의지는 절대왕권 확립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왕의 춤>에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어머니와 추기경 신분의 재상, 그리고 이들의 행동기제로서 종교로부터 독립해 서서히 절대군주로 성장하는 루이14세의 모습이 드러난다.

루이14세 “I’ll work things out with Him.”(여기서 Him은 GOD을 의미)
루이의 모친 “Without sacred values, no reign can endure.” (42)
     


당시 프랑스는 강력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을 수립하고 이를 하나의 국가관으로서 확립시키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루이14세는 그가 9세가 되던 시절 세습 귀족들과 파리 고등법원이 왕에 대항한 귀족 중심의 프롱드의 난을 겪으면서 강력한 왕권 확립에 특히 필사적이었다. 추기경의 죽음을 계기로 친정을 하게 된 루이14세는 신이 내린 절대 권력을 왕이 가지고 있다는 왕권신수설에 의거하여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는 인물로 자처했다. 그러나 루이14세는 여전히 강력했던 봉건적 특권의 세습 귀족층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연금의 수여나 어떤 처벌이라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만든 것이 베르사유 궁전과 그곳의 문화였다. 즉 베르사유 궁전에 귀족들을 자의적/타의적으로 억류시켜 그들이 지방에서 권력 기반을 쌓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그 길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것이 루이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우아한 감옥’이라 칭할 수 있는 근거이다. 루이14세는 귀족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끌어들여 방탕한 생활에 흠뻑 젖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운명이 왕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주문은 효과를 발휘해 귀족들은 몰리에르의 저렴한 풍자극을 즐기며 바보처럼 생각 없이 웃고 떠들기 바쁘다. 
   

루이14세 “I buy my old enemies with the pleasures at court. Gathered around me. Intent on pleasing me, the forget about plotting.” (56)
     
   


한편으로 당대의 전통적인 귀족층 역시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으니, 바로 생활력 획득과 신흥 시민계급출신 귀족관료들과의 차별성 획득에 관한 문제였다. 오래 전부터 돈 있는 시민계급에게 귀족 칭호를 판매해왔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돈을 주고 관직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차 프랑스 사회에서 어떤 관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곧 귀족 계급으로의 진입을 뜻하게 되었다. 시민들이 계속 귀족 계급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17세기에는 이들이 이미 전통적인 세습 귀족의 수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오히려 세습 귀족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내란으로 인해 사멸하거나 파산하여 경제적 능력을 잃은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안정적으로 연금을 얻을 수 있는 궁정에 기거하는 편을 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시민 계급 출신의 신흥 귀족층과 자신들을 구분할 수 있는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해 이들 귀족들만의 행동 규율이 생겨나고 예법서 같은 것들이 출간되기 시작한다. 루이14세는 바로 이러한 세습 귀족층의 수요에 착안하여 귀족들을 궁정에 머물게 하며 귀족층의 세련된 예법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상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은 귀족층을 완벽하게 궁정 안으로 위치시킴으로써, 동시에 귀족층에게 부과되는 특정한 예절로서의 문화적 소양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한 찬란한 궁정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 프랑스 궁정문화의 종합적 표출은 단연 춤이었다. 당시의 예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상적인 사람의 모델을 차용했는데, 그렇기에 이러한 이상들의 반영에 의해 창조된 궁정 무용들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공인된 예절의 반영이자 예법의 대표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복잡한 사회 예법 교육에서 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무용교사(ballet master)들은 세련된 예법을 소화하고 있는 자로서 중요한 예절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상징 : 루이14세와 춤_정치권력과 예술, 문화의 관계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는 ‘춤’은 바로크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예술 장르다. 무용이란 그 자체의 동작뿐 아니라 음악, 의복, 시대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수행되는 종합예술이다. 바로크시대의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의도아래 자리 잡은 궁정 문화와 그 중심으로서 궁정무용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의복, 무용, 음악 등의 다양한 분야가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했다. 루이14세의 시기인 17세기는 춤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성을 가진다. 비록 궁정 무용이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왕과, 신흥 귀족 세력과의 차별성을 획득하려는 전통 귀족층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발생하였으나, 춤을 사랑하고 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궁정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궁정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정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춤>에서 춤은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루이14세가 권력 확립의 매개로서 춤을 이용하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춤이 루이14세의 상징적 힘 그 자체였음을 시사 하는 상징 또한 심어놓은 것이다.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왕의 무대는 그가 성장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춤의 상징성과 카리스마 역시 강해진다. 마치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은 의상과 분장, 소품, 무대장치, 그의 권위를 찬양하는 나레이션이 한 곳에 어우러진 춤은 루이14세를 태양왕-절대군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 기제로 활용된다.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을 직접 무대에 등장시켜 태양왕의 자비로 용서함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무대는 명확한 함의를 가짐과 동시에 왕의 권위에 무릎 꿇는 귀족의 초라함을 강조한다. 다음과 같은 대사들에서 당시의 춤이 루이14세의 명확한 의도아래 정치적으로 활용되었음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루이 “the Music,… it has a political function in the order I wish to establish. It serves me. It servers the state of a God.”(54)
쥴리 “your music made him immortal.”(1:41)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음악과 춤은 루이14세의 힘 그 자체가 된다. 루이14세가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왕과 대립하는 권력자 사촌 콩티가 륄리에게 경고하듯 던지는 말은 “No more dancing.(26분)”이다. 즉, 춤은 루이14세의 가장 큰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병마를 극복하는 묘약은 바로 륄리의 음악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은 음악과 춤, 예술이 루이14세에게 가지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륄리 “we are the instruments, the hands. Instruments are broken, hands cut off.“(39)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던 무용예술은 그 역할을 다 했을 때 쉽게 버려지는 존재가 된다. 춤을, 그리고 재능 있는 륄리를 사랑한 루이14세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견고한 왕좌가 중요할 터, 왕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막을 내리는 륄리의 예술. 왕은 더 이상 춤추지 않고 광활한 궁전은 배경음악도 없이 신하들의 발소리로 메워진다. 이제 왕이 춤을 추지 않아도 될 만큼 왕좌는 충분히 튼튼하다.
     
     



고증의 목표로서 영화의 메시지 
지금까지 풀어놓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 <왕의 춤>은 자신의 배경이 되는 바로크문화를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루이14세의 절대왕정확립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영화 구석까지 재현된 바로크의 특징들은 루이14세가 예술-문화를 매개로 의도한 왕권강화로의 이행을 몸소 드러내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화려한 의복과 장식품, 화려한 건물들 그리고 궁정에서의 유희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들은 모두 지방 영주들의 관심을 뺏어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하기위한 절대군주의 기획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 안에서, 그러니까 역사와 영화 안에서 정치와 예술의 관계, 정치와 종교의 관계 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물음이 관객에게 던져진다. 이를 위해 영화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역사의 사실적 재현에 신경을 몰두했는지 모른다. 단지 화려한 것을 좋아한 왕의 시대로 생각되는 우연이 아닌, 인과관계와 맥락의 결정체로서 해석돼야할 역사로서 절대왕정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로써 몇 백 년 전 다른 공간의 역사를 다룬 영화가 오늘날 이 곳의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좀 더 확장될 수 있다. 오늘날의 역사, 원인과 결과를 가지는 의도된 모든 것에 대한 질문으로.
     






**********************************************************************************************BY 샤오롱바오

대책 없이 사는 만년 졸업반. 영화와 미술, 그리고 춤에 빠져있다.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한 관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