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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단편모음집 『꿈을 빌려드립니다』(하늘연못, 2006)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환상, 욕망, 사실, 허구
가블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본 곳은 일본 나라 지방의 어느 공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길을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뭇 여성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꿈과 같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친 것이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보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고 입술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옆에 친구에게 읊조리고 있었다. 머릿결은 저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한껏 머금었다가 그 일부를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있었고, 발걸음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경쾌하게 지면을 내딛고 있었다. 채 3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동안 그녀는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갔지만,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았지만, 3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스쳐간 그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늘 다룰 소설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은 그 남자가 죽은 시신으로 바다에 두둥실 떠서 내려왔다는 점이다. 환상적 사실주의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6장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뽐내 보이고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번역의 문제를 살짝 언급해야겠다.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The handsomest drowned man in the world」이다. 이 소설은 마르께스 단편집 『꿈을 빌려드립니다』와 플레이보이 잡지에 수록된 단편소설 엄선작을 모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각각 담겨있다. 전자는 이 소설을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번역하였고, 후자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라고 번역하였다.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 한 남자가 물에 빠져 죽는 과정이 아니라, 익사체를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이므로, 후자의 번역이 더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어감상으로도 후자의 번역이 더 낫지 않은가!)
본문이 굉장히 짧기에 다시 요약하기도 그렇지만,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러하다. 어느 외진 마을에 익사체 하나가 떠내려온다. 그 익사체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몸집이 굉장히 큰 거구였다. 익사체에 묻어있는 진흙과 해초를 걷어내자 훌륭한 외모가 드러났다. 마을의 여자들은 그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다. 익사체는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얻고, 장례식도 치르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족이 되었고, 결국 그 마을은 에스테반의 마을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환상과 욕망의 관계’이다. 바다를 건너온 익사체는 삶이라는 현실을 초월한 환상이다. 시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있으며,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기에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마을의 여인들은 시체에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에스테반의 삶을 재구성한다. 여인들의 욕망 속에서 에스테반은 강인한 육체적 힘을 지녔지만, 한없이 착한 마음씨를 지닌 남성으로 탈바꿈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상상 속 에스테반에 대하여 동경을 표하기도 연민을 표하기도 한다.
익사체는 삶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환상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수가 있었고, 욕망이 투영된 익사체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욕망은 환상 속에서만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현실 속에서도 욕망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욕망의 일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현실을 뛰어넘은 환상 속에서 비로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의 전부를 구현해낼 수 있다.(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3분도 채 보지 못한 사람인 것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빈자리들을 나의 욕망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에스테반이라는 존재는 텅 비어있는 존재이기에 여인들은 그 안에 무엇이든 채울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여인들의 수만큼 다양한 여인들의 욕망은 에스테반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아무 무리 없이 투영될 수 있었다. 개인 각자의 욕망이 투영된 에스테반은 이제 집단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되어주며, 보통의 시체 처리 방식과는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시체를 바다로 보낸다. 급기야 이 마을은 ‘에스테반의 마을’로 명명되기 시작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저기 좀 봐. 저곳은 바람이 너무 잠잠해서 침대 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마을이군. 저기 좀 보란 말이야. 너무 태양이 빛나서 해바라기들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지도 알 수 없는 곳 말이야. 그래 바로 저곳이야. 저곳이 에스테반의 마을이야.”(159)
자신이 규정지은 존재로 인해 자신이 규정된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러한 의문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제 에스테반이라는 존재는 허구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허구를 뛰어넘은 실재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존재한다고 믿어지고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단지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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