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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사회평론, 1997)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자, 이제 모두 게을러집시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여름기간 동안 계획했던 중요한 일정 하나가 끝이 났다. 얼마 자지 못한 탓에 몸은 몸대로 지쳤고, 무언가 중요한 것이 끝나니 마음은 마음대로 풀어져버렸다. 방바닥에 축 달라붙은 채로 며칠을 보냈다. 잠을 아무리 자도 누적된 피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나는 햇빛이 내리쬐는 날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나무늘보마냥 그렇게 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작스레 어떤 증상이 나타났다. 나는 이것을 ‘생산 강박 증상’이라고 부르는데,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이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감이 물밀 듯이 밀려올 거라는 상상과 내가 멈춰있는 사이에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버릴 것이라는 상상 등을 하며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 증상은 언제나 내가 안락함을 즐기고 있을 때 불현 듯 엄습하여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책이라도 하나 붙잡고 누워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장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단연 나의 시선을 끄는 제목이 있엇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드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그렇게 하나의 위로이자 나를 위한 변명처럼 내 손에 들어왔다. 겉표지 뒷장에 나와있는 독자와의 문답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글귀였다.
선생님이 쓰신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떠들어 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지독한 게으름뱅이이며,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간입니다. (중략) 그 같은 게으름뱅이에게 강경하게 대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인 (중략)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그 게으름뱅이에게 제가 정말로 지지하고 동정한다는 것을 그대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도 틀림없이 저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도 날이면 날마다 잔소리만 듣고 산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버트런드 러셀
책을 펼치고 언제나 그렇듯 저자소개를 간단히 훓어보았다. 아뿔싸, 내가 속았구나. 러셀은 전혀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40여 권의 책을 쓴 철학자이자 문학가이고, 『권위와 개인』이라는 저서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수많은 저작을 남기는 와중에 수소폭탄실험 반대운동, 핵무장 반대운동, 쿠바위기,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등에 관여하며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하는 바쁜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바쁘게 살아놓고선 사람들에겐 게을러지라니, 어느 정도의 원망을 품은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으름에 대한 찬양」 부분을 다 읽고 나서 어느 정도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게을러질 필요가 있겠다고.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나타난 러셀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게을러집시다! 어떤 사람은 코웃음을 칠 테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 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중 하나는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8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렸다.(스포 주의!!) 극 중 남궁민수는 엔진을 차지하는 것 말고 열차를 탈출하자고 말한다. 현 시스템을 정복하지 말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러 가자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 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밖은 어마어마하게 춥고, 어떤 사람들은 밖에 팔을 몇 분간 내놓았다가 그대로 팔이 부셔지는 형벌도 당했고, 이미 시도했다가 그대로 얼어버린 사람도 있다며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결국 어린아이 둘이 열차 바깥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를 꾸리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며 아마 <설국열차>는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 봐라.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다. 하루에 단지 4시간만 일을 한다니. 하지만 책에도 나와있듯이,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 시간이 15시간이었고 아이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재 우리는 19세기 초보다 절반 가량인 8시간을 일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가 엄청난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여가시간이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가 러셀의 주장이 그저 허무맹랑하기만 이야기가 아니라는 변호였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다르게 그의 주장을 바라보려 한다. 그의 주장만을 떼어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이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경제적 생산성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보다는 게으름이 찬양받는 사회, 즉 생산성과 유용성에 대한 집착없이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의 주장을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그가 말하는 더 행복한 사회에 대하여 깊이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세상인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생산성이나 유용성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행복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봐라.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은 이미 게을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노벨 문학상을 탄 저명인사에게 제대로 속았구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싶다. 그의 주장은 여전히 곱씹을 만한 것이었고, 글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다지 바뀐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책장을 덮었다. 어찌됐든 방바닥에 누워있을 또 하나의 멋진 핑계거리가 생겼으니, 며칠 더 이 생활을 지속해도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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