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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우연히도 저번 글에서 다루었던 극과 비슷한 주제의 다른 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닫힌 문>과 <젊은 후시딘 - 어 러부 스토리(이하 젊은 후시딘)>. 두 작품 모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공간에 목숨 붙이고 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매몰차게 문밖으로(혹은 영원히 관같은 방 안으로) 몰아가는 사회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두 공연의 색깔과 질감, 주제의식을 조명하는 시선과 각도와 방식이 너무나도 달라 재미있었다. <닫힌 문>이 굳게 닫아버린 문을 <젊은 후시딘>이 드릴로 뚫어버린 느낌이랄까!
<닫힌 문>이 닫아버린 문에 대하여
<닫힌 문>에서 빙구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진부하고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였다. '문'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되는 사회의 냉혹한 소외, 관처럼 좁고 깊은 절망, 거기에 무참히 깔려죽는 인물들. <닫힌 문>은 그 절망의 무게를 성실하고 충실하게 무대에 옮겨 왔지만 불행하게도 너무 낯익고 뻔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인물들은 각각 나름의 인간으로서 세상에 맞서지만 현실의 무게는 막강했고 인간미 넘치던 인물들은 그 앞에서 쉽게 생기를 잃어버렸다. 극이 너무 일찍 그런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지루해졌다. 재미없는 비극이 어떻게 해서 파국으로 흘러갈지가 뻔한데도 꼼짝없이 앉아 어둡고 슬픈 장면을 마지못해 들여다보아야 했으니까.
거기에 극은 인물들의 끝을 보여주는 대신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십수년 전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애매하고 답답한 부분이었다. 관객 각자가 나름의 판단을 내리도록 유보하고 있지만 그들 자신은 정작 그 '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충분히 고민했을까? 그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아닐까?
당신은 예술에서 어떤 해답을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쉬운 문제였다면 애초에 무대에 올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많은 극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닫힌 문>은 사회의 이면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많이 우려먹은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관객에게 씁쓸한 냉소와 비관, 절망감과 피로감만 전이시킨다. 아무리 '노답'인 상황이라고 해도, <닫힌 문>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문'에 대한 새로운 방향의 접근과 탐색을 단단히 닫아놓고 있었다.
<젊은 후시딘>, 그 발랄한 반란
<젊은 후시딘> 역시 <닫힌 문>만큼이나 말도 안되게 암울한 현실과 젊은 후시딘 가족의 실패를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띄게 다른 점을 꼽자면 특유의 삐딱하고 날선 유머감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과 그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극의 형식을 변형하고 파괴한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그들만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저항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입장할 때부터 연극이 끝날 때까지 무대의 TV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주택공약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이는 월세를 내지 못해 점점 더 궁지로 몰리는 젊은 후시딘 가족의 처지를 더욱 궁색하게 한다. 상황이 절박해지는 만큼 젊은 후시딘 가족은 더 뻔뻔하고 과감해진다. 젊은 후시딘의 엄마는 무당만큼 밑천이 안드는 사업이 없다며 신내림도 받지 않고 점집을 차리는가 하면, 젊은 후시딘의 아빠는 새벽마다 동네 공원에서 실시간 야동을 펼치는 동네 커플을 위해 정자를 고쳐주고, 젊은 후시딘은 집있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며 칠십이 다 되어가는 노파를 데려온다. 내내 악에 받쳐 있는 그들 가족은 내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독특한 화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 간의 가족적 관계를 최대한 약화시키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관객이 집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극적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이톤과 큰 발성을 유지하는 것이 자칫 관객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상황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함으로써 극 전체의 흐름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말이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객석에 던져지는 말들이 더욱 날카롭게 빛난다.
"가끔 고시원에서 죽어나가는 사람 있지? 그게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깐. 자기가 살던 방에서 죽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자기가 살던 방이 자기 관이 되는 건데. 그게 어떻게 보면 참 경제적인 거야. 우리같은 서민한테는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없어. "
"물이 이렇게 넘쳐 흐르니, 화재의 위험은 절대 없을 거 아니에요. 소화기도 따로 필요 없을 테고. 제발 좋은 점을 보세요. 왜 그렇게들 다들 삐딱해서는. "
극의 하이라이트는 집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야멸찬 통보에 후시딘 가족이 응하는 장면이다. 후시딘가족은 장판부터 변기, 문짝까지 통째로 뜯어가 동네 정자에 살림을 차린다.
그 상황에서 젊은 후시딘이 야심차게 한다는 말이 참 재미있다. 전국의 집 없는 사람들에게 각지의 공원과 산의 정자를 알려주는 이른바 '집 테이크 아웃' 사업을 벌여야겠다고. 후시딘 가족은 극중 처음으로 반색하면서, 악에 받치지도 분노에 차지도 않은 상태로 자못 정답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암전으로 장면이 끝날 때까지 후시딘 가족의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데, 관객의 입가에 남는 미소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하다.
<닫힌 문>의 인물들이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한다면, <젊은 후시딘>은 문짝을 통째로 들쳐메고 튄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도 안되는 대처를 하는 것은 그들만이 놓을 수 있는 맞불이자 나름의 저항이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에 순응하자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삐딱한 유머에도 쉽게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담겨 있다. <젊은 후시딘> 속 가족이 <닫힌 문>의 자연스러운 인물들과는 달리 과장되고 사실적이지 않게 그려지면서도 오히려 훨씬 살아있고 생동감있어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젊은 후시딘>의 윤한솔 연출은 예술이 갖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예술이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이니만큼 예술은 사회의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아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이미 단단히 배긴 굳은살을 한번 더 깎아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더 발전되고 확장된 논의와 고민이 없다면 그저 우리는 더 무감각해지기만 할 것이다. 또한, 그 사유의 수단이 연극과 같은 어떤 예술 형식이라면 이 역시 주제와 더불어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부지런한 진보를 독려하는 것은 관객의 몫, 당신과 나의 몫이다. 이야기하자고, 잊지 말자고, 절망하지 말자고 말하는 작품을 캄캄한 객석에 편안히 앉은 당신이 보았다면 말이다. 이야기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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