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1.
[달나라 연속극]의 팜플렛에는 이런 문구가 씌여있었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견딜만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 당신에게 나의 슬픔을 이야기했다.
2.
[달나라 연속극]의 인물들은 각자의 연장으로 슬픔의 모양을 조각했다. 은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원주율에 끝나지 않는 연속극을 짜면서, 은창은 한겨울에 추우면 춤을 추자고 외치면서. 그들의 슬픔에 점차 음영과 윤곽이 생겼다. 음푹 파인 곳에 눈이 생기고, 광대와 코뼈가 솟고, 그 아래 인중이 파이고 붉은 입술이 피어났다. 그러자 놀랍게도 슬픔은 견딜만해졌고, 견딜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너무 예쁜 얼굴이 되어서, 나는 그 얼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여전히 불편하게 하고 천착하게 하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 얼굴의 이름이 여전히 슬픔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슬펐다. 당신은 덤덤했다.
3.
당신의 슬픔은 알록달록한 돌들이 깔려 있는 어느 냇가에 있었다. 당신은 맑게 갠 하늘의 모습이나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같은 사소한 풍경들에서 자주 돌을 주워 왔다. 시냇물이 맑아서 나는 알록달록하고 반짝반짝한 돌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를 흐르고 있는 것은 맑고 훤한 슬픔이었다. 색색의 돌들을 아무리 깔아도 시내를 메울 수는 없었다. 여전히 슬픔은 어딘가에서 흘러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갔으며, 당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물 속의 파란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함께 돌을 주우러 다녔다. 돌은 보물찾기하듯 별것 아닌 것들에 숨어있었다. 함께 오르는 파란 버스 안에, 휠체어 위에서 같이 부르는 노래에, 언덕 위 돋아난 별에, 한뭉텅이가 된 그림자에. 같은 색깔의 돌을 나눠 가져 불룩해진 주머니를 품고 돌아가는 날들이 하룻밤 뒤에도 또 하룻밤 뒤에도 이어졌다. 냇물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걸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속에 넣은 돌들을 달그락거리며 언제까지고 함께 돌을 주우러 다니는 꿈을 꿨다.
4.
내게는 방 한 칸이 있었다. 그 방에 카드들을 한묶음 숨겨뒀다. 한 면은 빨갛고 다른 면은 파란 카드였다. 내 슬픔은 마음속에서 출렁거리다가 이따금 몰려와 카드들을 모두 빨간 쪽으로 뒤집어놓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바닥에 쪼그려앉아 일일이 그것들을 다시 뒤집어야 했다. 마지막 장까지 파란색으로 뒤집어놓고 뒤돌아서면 다시 온통 빨간 바닥이었다. 돌을 줍기 시작한 날부터 돌들로 카드들을 눌러놓았다. 그러자 카드들은 빨간 배를 바닥에 댄 채로 꽤 얌전히 있었다. 많은 날들이 잔잔하고 평온해졌다.
그래도 슬픔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불시에 밀려왔다. 내가 방심할 때, 괜찮을 것 같았던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이 나보다 가볍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가 아니라 그 무게도 못 업을 만큼 내게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휠체어 바퀴가 내 발을 밟았을 때가 아니라 덤덤했던 당신의 얼굴이 놀람으로 화들짝 일그러질 때, 조금 떨어져 걷자고 할 때. 맑고 훤한 슬픔이, 걸으면 걸을수록 깊어지는 물이 어느 밤 문득 견디기 어려웠다. 당신을 만나서 많이 긁혔을 것 같다는 당신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수취인 이름에 내 이름은 없고 당신 이름만 있어. 점점 크고 무거운 소포들이 오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해. 그게 슬퍼.
그말을 듣고 있을, 틀림없이 덤덤할 그 표정까지도 슬퍼서 나는 돌들을 첨벙첨벙 냇가에 내던졌다.
5.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느 날처럼 똑같이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가방에는 [달나라 연속극]의 팜플렛이 들어있었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때 견딜만해진다.'
그래서 오늘 당신은 내게 당신의 슬픔을 이야기했다.
너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야. 내 소포들은 슬프지 않아. 나는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고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테이블 앞에 붙어앉아 미뤄둔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이다. 남은 오후 나는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며 천천히 카드들을 뒤집었다. 허리숙여 카드를 뒤집는 것은 내 몫이었고 내가 뒤집은 카드를 바퀴로 한번 더 누르며 지나가는 것은 당신의 몫이었다.
슬픔에 점차 음영과 윤곽이 생겼다. 음푹 파인 곳에 눈이 생기고, 광대와 코뼈가 솟고, 그 아래 인중이 파이고 붉은 입술이 피어났다. 그러자 슬픔은 견딜만해졌고, 견딜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너무 빼닮아서, 당신 지금 아주 예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갈까?
가자.
우리는 냇가에서 일어났다.
'[연극] 빙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젊은 후시딘 - 어 러부 스토리 (0) | 2014.03.07 |
---|---|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닫힌 문 (0) | 2014.02.14 |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 테레즈 라캥 (0) | 2014.01.17 |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혜경궁 홍씨 (0) | 2014.01.04 |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목란언니 (0) | 2013.12.20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