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정말 좋은 연극을 얘기할 땐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빙구에게 좋은 연극은 이런 거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연극이 생겼고, 함께 봐서 즐겁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게 기쁜. 그게 전부다. 

 하지만 빙구가 아직 많이 모자란 건지, 괜히 이것 넣었다 저것 넣었다 하다가 결국 또 늦어지고 길어졌다. 말들은 늘 주렁주렁 새끼를 쳐서 종종 쓰는 것보다 잘라내는 게 더 오래 걸리곤 한다. 그래도 연극을 보고 당신에게 해줄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모처럼 아주 설레고 즐겁게 느껴졌으니, 변명은 이쯤 하고 뒤에 남겨둔 말들로 어물쩡 저물쩡 스무스무스무스하게 넘어가보도록 하겠다. 빙구에겐 좋은 연극이었는데, 당신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목란언니>다. 



2013.11.19(화) ~ 12.29(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목란언니



 

해솟는 백두에서 사랑의 미로까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조목란. 유복한 평양 엘리트였던 그녀가 한순간에 탈북자가 되어 남한 땅을 밟았다. 그리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천만원을 마련하려 죽을 둥 살 둥 무대를 누빈다. 그녀는 왜 돌아가려 할까? 과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목란언니>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서 물꼬를 터 120분의 러닝타임동안 줄기차게 뻗어 나간다.

 극은 내내 명랑하고 경쾌한 톤을 유지하는데, 그 희극성은 대부분 조목란의 순진함에서 기인한다. 피아노 치는 사람 찾는다는 문구에 순진하게 룸살롱을 기웃거리고, 옷을 벗으며 관계를 요구하는 태산에게 "갑자기 바지를 빨란 말입네까!" 하고 울먹이며 바지를 들고 뛰어가는 우리들의 목란언니. 남한의 조대자 가족은 난데없이 나타난 그녀 덕분에 예상치 못한 지각변동을 겪는다. 큰아들 태산은 우울의 깊은 터널에서 빛을 찾고, 작은 아들 태강 역시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며, 막내딸 태양은 애인의 시나리오를 빛낼 결정적 모티브를 얻어간다. 조대자 여사는 목란을 맏며느릿감으로 점찍고 그녀에게 선대의 유품인 쇠망치를 건네주며 오천만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조대자가 공들이던 사업이 꼬이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빨라진 스텝과 호흡에 인물들은 서로의 밟을 밟으며 넘어지기 시작한다.  

 분단현실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무거운 주제들은 조목란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 안에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빈틈없이 스며들어 있다. 그 사이로 부패한 남북의 모습과 그 사이의 괴리, 변질된 사상과 이들 모두를 쥐락펴락하는 자본의 논리가 언뜻언뜻 드러날 때면, 극은 더할 나위 없는 명랑함으로 한층 서늘하고 뼈아프게 물어 온다. 우리들의 목란 언니는 어디로 가야 하나. 목란언니만큼이나 나약하고 힘없는 당신과 나는 갈 데가 있나. '해솟는 백두'를 낭랑하게 부르던 목란언니는 이제 대답이 없다. 다만 중국의 어느 홍등가에서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중국어로 '사랑의 미로'를 구슬프게 부를 뿐. 





사면무대와 조명 전환, 빠른 장면 호흡

 <목란언니>의 재미를 톡톡히 살린 것은 무대였다. 사면무대를 아주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는데(사면무대란, 한가운데에 정사각형의 무대를 배치하고 각 면에 관객석을 두어 벽 없이 배우들을 사방의 관객에게 노출시키는 무대형식이다. 레슬링 경기장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야기 진행이 빠르고 장면 전환이 무척 잦은 <목란언니>의 구성에 딱 들어맞았다. 배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고, 암전 대신 색색의 조명 전환이 무대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바꾸면서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는다. 거기에 맞춰 텀 없이 빠른 템포로 통일된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한 완급조절을 가미하여 이야기에 쫄깃쫄깃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무대와 조명, 연출이 삼박자를 맞추어 이야기를 주무르니, 자칫 산만하게 흩어질 수도 있었던 색색의 장면들을 한줄기로 모아 밀어붙이는 뚝심이 돋보였다.

 사실 연출적으로 사면무대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아무리 동선을 잘 짜도 결국 어느 면의 관객은 배우의 등과 뒷통수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러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면 무대의 무게중심은 정사각형의 안쪽으로만 쏠리기 십상이고, 자칫하면 관객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의 시야가 어느 면에서도 확보되지 않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나 <목란언니>는 기존의 사면무대에 약간의 변용을 주어 사면무대의 한계를 보완하는 동시에 사면무대만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사면무대 이외에 객석 사이의 양면에 별도의 무대공간을 배치해 공간의 활용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관객에게 무척 밀착되어 있는 사면무대의 장점 자체는 유지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양옆으로 트여 동선이 획기적으로 커지면서 훨씬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덧붙여, 별도로 배치된 두 무대는 각각 남과 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 극의 진행 내내 두 국가의 대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한쪽 무대에는 김정일의 초상화가, 한쪽 무대에는 썩어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실상이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마주한다. 그런데 때때로 두 나라의 일그러진 얼굴은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두 무대는 데칼코마니처럼 자주 겹쳐지곤 한다(그리고 이건 같이 보러갔던 당신이 짚어준 부분인데, 적어도 절반의 관객이 오른쪽에 북한을 왼쪽에 남한을 두고 극을 본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었다!). 




입체적인 캐릭터들

 생동감 넘치는 무대에 살아있는 인물들이 들어가면서 극은 활기차게 꿈틀댔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각 인물들이 남한과 북한, 근현대를 제각기 반영하는 장기말처럼 쓰이고 있음에도 전형적인 인물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제각기 충분히 찌질하고 가여웠으며, 짠하고 인간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목란 - 조목란 - 조대자의 연결 지점에 시선이 갔다. 브로커들 사이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유목란의 앳된 얼굴은 극이 시작할 때의 조목란의 말간 얼굴과 어찌나 닮았던지. 또, 매정한 세상에 쫓기듯 내달리는 조대자와 조목란이 쇠망치를 주고받으며 어찌나 짙고 깊은 연대를 형성하던지. 조목란을 가운데 두고 교집합을 공유하는 세 인물은, 남북상황과 시대의 간극을 초월해 공존하며 목란의 삶이 어떻게 흘러왔고 어떻게 변해 가고 이제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극의 결말이 다소 비극적인 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갔음에도 빙구는 감히 그녀의 미래를 낙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조대자의 박력 못지 않게 단단하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제 살을 깎고 찬 땅에 삶을 박아넣으며 맑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태산, 태강 형제들도 자꾸만 눈이 가는 캐릭터들이었다. 태산은 극중에서 가장 의욕이 없는 인물이지만, 모두가 벼랑끝에 몰렸을 때 가장 먼저 절망을 털고 일어난다. 가장 생에 대한 희망이 없던 인물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말한다는 역설적인 설정이 흥미로웠다. 반면 태강은 캐릭터보다 배우 자체에 호기심이 갔다. 좋은 말일지 나쁜 말일지 모르겠지만 배우같지가 않았다. 어느 대학교에나 한명씩 있을 법한 특이하고 젊고 무기력한 교수 한명을 정말로 데려다가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특하면서 자연스러웠다. 잘 들여다보면 구부정하고 힘없는 자세나 묘한 딕션이 무대언어로 충분히 포용될 수 있을 만큼 다듬어져 있어,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배우가 가진 고유의 특성인지 모를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선을 끌었다. 그 외에도 브로커, 자객, 독립열사 등으로 등장하는 조연들도 깨알같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며 재미를 더했다. 




 이 여러 이야기의 결론은, 빙구한테 <목란언니>는 좋은 연극이었다는 말이다. 좋더라는 말을 이토록 덕지덕지 길게 좀 써 봤다. 음, 당신이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사실 정말로,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래서 좀 어떻게 매력적인 글을 써서 당신이 연극을 보려는 마음이 생기게끔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도 마음뿐이다.

 거 참, 그래도 보러 갈 마음이 병아리 새끼발톱만이라도 생기면 기쁠 텐데 말이다. 왜냐하면, 빙구는 이 연극이 정말 좋았고, 당신도 좋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이 연극을 보러 가면 참 좋겠으니까!

 허허. 뜬금없고 느닷없는 빙구의 수줍은 고백을 귀엽게 봐주시길 바라며. 그리고 당신의 <목란언니>는 어떨지, 이 리뷰를 읽고 두산아트센터를 방문할지 말지는 당신의 판단에 맡겨 두며. [빙구의, 당신의 이야기]는 이주 후에 다시 찾아오련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