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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프로메테우스.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인간의 형상을 빚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불을 가져다준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에 인류는 사회를 만들고 문화를 일구며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문명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그는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이 빚은 인류의 수퍼맨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자신을 구원할 때까지.
연극 [살]은 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으로 옮겨왔다. 러닝타임 두 시간동안 연극은 몇 개의 질문들을 불씨처럼 관객에게 던져준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불이 이 순간 어떤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으며 이를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우리의 불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지 아니면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는지.
이 극이 관객에게 얼마나 뜨거운 불길로 다가왔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좀 더 손봤더라면 훨씬 크게 타오르는 멋진 횃불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촛불 하나 정도는 켤 수 있을 정도의 그 불씨로,그 온기로 또 이렇게 끄적끄적 글을 써본다. 이해성 연출, 극단 고래의 연극 [살]이다.
2013.11.06. - 2013.12.01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살
[살], 좀더 잘 빠진 이야기로
재공연이 결정되면서 극본 [살]은 상당히 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고 한다. 이해성 작가 본인이 직접 연출을 맡으면서 불분명한 인물들은 분리해내고 장황한 대사들도 과감히 쳐냈다. 그 결과 초연보다 확실히 날씬해졌다는 호평이 있었다. 하지만 극이 끝났을 때 빙구가 했던 첫 생각은 아직도 여기저기 군살이 많다는 것이었다. 중심인물 신우의 내적 갈등이 큰 변화 없이 제자리를 맴도는데 비해 별 의미 없는 주변인물들은 지나치게 많아 초점을 흩뜨려놓았다. 공간의 변화도 잦아 텅 빈 커다란 무대가 계속 분할되고 전환되었던 것도 상당히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초중반까지는 음향과 영상, 코러스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타이트하게 진행되었으나, 중반을 넘어가도록 중심인물 신우의 태도는 여전히 미적지근했고 갈등은 지지부진한 채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지루했다. 그런 가운데 몇몇 대사들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 다소 부담스러웠다.
아쉬운 점들은 꽤 있었지만, 그럼에도 프로메테우스라는 신화적 모티브를 잘 녹여내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촛불이나 살, 간이식 등의 이미지들은 쉽고도 적확했다. 다소 산만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극이 던지고 있는 화두가 비교적 명확하게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 욕망일까 사랑일까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무대 위에서 두 가지 다른 얼굴로 타오른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근저를 이루는 욕망의 불꽃,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온기로 잇는 촛불.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사랑을 의미한다고 외쳤던 청년 최신우는 이제 자본주의의 꼭대기에서 수십억을 주무르는 고도비만 중년 남성이 되었다. 한때 ‘먼저 생각하는 자’라고 스스로를 칭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먼저 더 많이 욕망한다. 그는 차고 넘치는 자신의 살에 파묻혀, 간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사랑했던 옛 애인 유선의 마음에 상처를 남겨 떠나보낸다.
이후 많은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살을 빼려는 노력에도 그는 점점 비대해지면서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뒤뚱뒤뚱 달려가기 시작한다. 한번 도태되자 세상은 무섭도록 그의 삶을 파먹어오고, 그는 자신이 이미 많은 것들을 놓쳤음을 깨닫는다. 극의 막바지에서 욕망으로 일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뒤 그에게는 군더더기없는 몸뚱아리만 남는다. [살]은 스스로 살덩이를 한겹한겹 벗겨내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이는 그간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불필요한 욕망의 축적물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뒤쳐진 그가 뒤늦게 본 것은 자신이 모두가 수퍼맨인 레이스 위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가 영웅 헤라클레스라고 믿으면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의미하는 것은 욕망이라고 외치면서. 그 욕망으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살을 만들어내고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산에 묶여 매일매일 새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낳은 헤라클레스들은 그를 구하러 오는 대신 애먼 바위산의 정상에서 혈투를 벌이는 중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간암으로 죽어가던 신우의 어머니는. 죽은 제자를 위하여 다시 촛불을 든 유선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여전히 희망이며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들은, 욕망을 불태우며 달려가는 신우의 이야기 뒷켠에 여전히 자리하며 촛불처럼 조용히 타오른다.
무대의 불빛이 건네는 불씨
연극의 기능에 대하여 가끔 고민한다. 보여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지. 관객은 그저 앉고, 극을 보고, 일어나서 가버리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연극은 프로메테우스의 불빛을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하나는 욕망의 불꽃으로 하나는 희망의 촛불로. 그 불에 비치는 자기 몸을 돌아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관객은 막이 내리면 무대를 떠난다. 때문에 아무리 가치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연극이라도 기껏 두 시간쯤 빛나는 조명불빛이 누군가의 마음에서 활활 타오르는 큰 불이 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그 불을 가볍게 외면하거나 꺼 버린다고 해도 조명이 꺼진 무대는 침묵한다.
그 잠깐의 불씨를 내어주겠다고 두 달 치의 피땀을 쏟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맥 빠지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객인 빙구의 입장에서는,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땀흘리는 당신들이 있다는 게 적어도 촛불 하나만큼의 온기로 다가온다. 그래서 빙구는 당신들이 건네는 불씨가 소중하고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꺼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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