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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2012년 4월, 극단 연우무대의 [인디아블로그]는 서울에 막 올라온 새내기였던 빙구가 처음 본 연극이었다. 그때 마음에 일던 따뜻한 물결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잔잔한 위로가 마냥 좋아서, 너무 좋아서 나는 그 이야기를 오래도록 간직했다. 갠지스 강 위를 떠가는 촛불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듯이.
그리고 올해 10월, 그들을 [터키블루스]로 다시 만났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듯한 그들의 무대가 반가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도 컸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이야기로 건네는 위로도 그 나름대로 역시 따뜻했다. [터키블루스]다.
터키블루스
2013.09.26 ~ 10.27
대학로 연우소극장
극은 시완의 이야기가 콘서트 형식으로 주요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사이사이에 주혁의 터키 여행담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처음에는 이게 콘서튼지 연극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거기에다 스토리상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극중에서 만나지 않고 따로 전개되기 때문에, 끝으로 갈수록 각자의 모놀로그로만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니 이제는 연극이 아니라 교차 편집된 두 명의 토크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장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꾸 나레이션처럼 전달되는 대사들은 아무리 작가의 의도를 잘 숨기려고 해도 결국 배우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어 상당히 노골적으로 말하려는 바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시완과 주혁의 관계그래프는 몇개의 변곡점 사이에서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일찍부터 관객에게 결말을 예측하게끔 한다. 극의 초반부터 사실 조금 불안했다. 각자 한참을 말하다가 말끝마다 '...했던 건 시완이 형이었어요', '...하다보니 주혁이가 떠오르더라구요'로 귀결될 때면, 그 묘한 오글거림과 거북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불길한 예감! 이야기의 중후반부에야 비로소 시완의 동성애적 감정이 살짝 드러나면서 극은 급격한 경사선을 타는데, 관객의 몰입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시완이나 주혁의 상황에 있는 그대로 몰입하기보다는 대체로 '이야기가 어째 묘하게 흐르더니' 쪽에 더 가까운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주혁 한 명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터키 이야기도 몰입도가 다소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시완과 주혁이 그토록 꿈꾸던 문명의 도시 트로이가 별볼일없는 황폐한 유적지로 드러나면서, 황홀한 터키의 풍경을 기대했던 일부 관객들을 김빠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극의 스토리와 구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디아블로그]는 두 남자가 함께 인도를 여행하면서 각자의 사연을 푸는 로드무비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와 인도의 풍경이 긴밀하게 섞여들었다. 반면 주혁 한 명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터키블루스]의 터키 이야기는 설정된 스토리상 둘 사이를 연결하는 과거의 매개 이상으로 자리할 수 없었고, 터키는 여행자의 여정이 펼쳐지는 생동감있는 공간보다는 두사람의 정서적 공감대가 자리한 꿈의 공간에 더 가까워질 수밖에.
그래서 [터키블루스]는 무대조명부터 프로그램북까지 '터키쉬 블루'라는 독특한 색깔을 짙게 깔아 터키를 표현한다. 여러가지 색이 공존하는 이 오묘한 색깔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동서양의 여러 요소들을 지닌 터키를 상징하기도 하고, 동시에 서로 달랐기에 더 가치있었던 시완과 주혁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 사실마저 배우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명'되었다는 점은 다시 한번 아쉬웠다. 어쨌든 연극이라는 형식을 더 고려해서 해설보다는 좀더 일상적인 말들로, 설명보다는 장면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을까.
[인디아블로그]의 찬영과 혁진이 이제는 지난 시간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터키블루스]의 준혁과 시완은 한없이 지난 이야기의 추억으로 침잠한다. 앞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뒤를 돌아보며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열여섯과 열일곱으로, 삼십대가 되어서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시간으로. 극에서는 보여주지 않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시완은 그가 외면해 온 가슴아픈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관객은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인디아블로그]보다 좀 더 우울하고, 어쩌면 동성애라는 코드 때문에 더 낯선 이야기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터키블루스]의 인생들 역시 [인디아블로그]만큼이나 당신과 나의 얼굴을 닮아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 위에 선 우리, 어쩌면 낯익은 서로의 얼굴을 보려고 우리는 거기에 슬픔이 있다는 걸 알면서 자꾸 뒤돌아보는 걸지도. 그렇기에 [터키블루스]는 [인디아블로그]와는 또다른 위로가 된다. 아파도 괜찮으니 돌아보라고, 거기에 낯익은 슬픔이 있다고, 기꺼이 아프라고.
긴 여행의 끝에서 결국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본 오르페우스처럼, 우리는 때로 비극의 장을 예감하면서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언제쯤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또 한번 아픈 것, 또 한번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도 결국 자꾸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감히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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