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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9.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칼날의 방향
외국인들에게 한국영화의 특징을 물으면 많은 이들이 ‘폭력적이다’라고 답한다고 한다. ‘그래, 한국영화가 좀 폭력적이긴 하지’라고 쉽게 수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참 이상한 일이다. 외국영화의 폭력수위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한국여화에 비해 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한국영화를 유독 ‘폭력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한국영화가 가지고 있는 폭력의 성향에 연유한다.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과 정서적 폭력이 있다. 육체적 폭력은 고어물이나 슬래셔 무비 등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러한 장르는 한국영화보다 외국영화에 더 많다. 육체적 폭력은 일종의 쇼이며 시각적 쾌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폭력은 정서적 폭력(주로 하위계층을 향한)이며, 이에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는 복수의 폭력이다. 이는 광기이고 정서적 불편함을 준다. 김기덕·봉준호·박찬욱을 비롯한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폭력성은 그래서 더 폭발적이고 감정적 소모를 유발한다.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이러한 정서적 폭력성이 투박하지만 날것의 모습으로 살아있는 영화,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1. 김복남
복남은 무도라는 작은 섬에 살고 있다. 주민이라고는 복남의 딸과 남편, 시동생 그리고 할머니 넷이 전부다. 이곳에서 30여년을 살며 복남은 태어나 지금껏 뭍으로 나가본 적 없다. 평화로워 보이는 무도에는 학대와 억압이 가득하다. 복남은 남편의 폭력과 폭언, 시동생의 성폭행이라는 두 남자의 가학을 견디며 산다. 이러한 학대는 남성들의 신체적 우위와 섬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남성들에 의한 학대를 더 확고하게 하는 것은 동일한 여성인 할머니들의 동조이다. 그들은 폭력적 남성주의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여성들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복남에 대한 자발적 감시와 훈육을 하도록 한다. 이로써 남성들의 폭력은 정당화되고 체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카프가의 소설 <성>에서 권력의 요구를 거절한 아말리아를 같은 피지배자인 마을 사람들이 아말리아를 외면하고 처벌한다. 이처럼 무도에서는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방적으로 권력자가 피지배자들에게 가학을 가하는 영화(이른바 ‘위로부터의 권력’)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차이점이다. 모든 폭력은 묵인되고 그 가장 아래에 복남이 자리한다. 그렇기에 복남은 모든 아래로부터의 권력(혹은 폭력)의 희생자들의 상징이 된다. 복남의 유일한 동지가 되는 성매매 여성은 아마도 같은 아래로부터의 권력의 희생자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남처럼 성매매 여성 또한 같은 여성들에게도 천대받고 외면받는 처지이다.
2. 살인사건
복남은 필사적으로 무도에서 탈출하려한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서울에 사는 친구 해원과 그녀의 딸이다. 복남은 자신이 안 된다면 딸이라고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딸과의 무도 탈출이 허무하게 실패하고 남편의 폭력은 극에 달하고 남편에 의해 딸은 죽는다. 복남에게 대리해방의 대상이자 마지막 희망인 딸이 죽고 난 뒤, 복남은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복남의 복수는 영화가 아래로부터의 폭력에 눈을 맞추었기에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남자들이 잠시 섬을 비운 사이 복남은 가차없이 동조자인 할머니들부터 처단한다. 이는 마치 영화 <도그빌>에서 직접적 학대자가 아닌 마을 사람 모두를 학살하는 장면과 닮아있다. 정서의 폭발과 광기라는 점에서 복남의 살해는 눈보다 마음으로 들어온다.
남자들에게까지 복수의 칼날이 향하면서 영화는 가속패달을 밟는다. 특히 남편을 살해하는 장면은 남성성에 대한 상징적 메타포로 가득하다. 남편이 복남에게 들이미는 칼날은 상징적 남근이며, 권위와 폭력 그 자체다. 이 칼날을 복남은 오럴섹스하듯 위무하다가 이내 남편의 손가락을 핥는 등 남편이 원하는 순종적 여성성을 보인다. 그러다 이내 손가락을 깨물어 잘라내는 것은 상징적 거세행위다. 또 떨어진 칼을 입으로 물고 남편을 찔러 죽이는 행위는 폭력적 남근을 되돌려줌으로써 복수를 완성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그녀의 난도질과 시체 위로 욕설과 함께 뿌려지는 된장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정서적 폭력의 최고치다.
3. 전말
영화에서 중요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는 바로 해원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인 해원의 이야기로 복남의 이야기는 액자처럼 싸여있다. 사실 영화적 쾌감과 서사적 완결성 측면에서 해원은 필수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해원이 중요하게 제시되는 데에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해원은 복남에게 가해지는 학대의 외부자이다. 그러면서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있는 목격자이다. 해원은 그래서 복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함구하고 복남을 외면한다. 딸의 죽음과 연이어 이어진 해원의 외면은 복남이 복수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인다.
해원은 총 세 번의 외면을 한다. 영화 처음에 나오는 거리 청년들에 의해 한 여성이 폭행을 당했던 것을 목격하고도 이를 외면한다. 다음으로는 영화 중간 과거 플래시백으로 보여진다. 어린시절 해원은 복남이 남자아이들에게 성추행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다. 마지막 외면은 복남의 딸이 살해된 전말을 보고도 경찰에게 진술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는 목격자에게까지 향한다. 이것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가진 방향성이며, 이 방향성이 곧 영화의 가장 큰 힘이다. 침묵의 목격자는 곧 관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원의 옷으로 갈아입고 섬을 나온 복남은 도망쳐 나온 해원마저 죽이려 한다. 해원의 옷을 입은 복남은 또 다른 해원 곧 해원의 죄의식의 현현으로 보인다. 그간의 외면으로 인해 커진 자신의 죄의식이 해원 스스로를 심판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복남에게 쫓기다가 철창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해원의 모습에서 이는 명확해진다. 그러나 이내 철창문은 열린다. 해원은 반사적으로 복남의 목을 찌르고, 복남은 해원의 무릎에서 죽어간다. 그제야 해원은 복남의 손을 잡는다. 해원의 죄의식은 해소된 것인지 부정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해원은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처음 외면했던 진술에 범인을 목격했음을 다시 진술한다. 그리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한다. 이는 정화와 씻김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바닥에 누운 해원의 모습이 무도의 모습과 절묘하게 디졸브된다. 이렇게 끝나는 결말은 다소의 찝찝함을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이것으로 폭력과 죄의식이 모두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날의 방향을 흐리지 않고 견지한 이 영화가 남기는 새김은 꽤 깊다. 전말을 아는 우리는 이제 무얼 해야 하는가 생각해본다.
※ 장철수 감독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3년 6월 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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