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8.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선셋>

- 순간의 영원성

 

 

 

 

  '사랑해, 영원히'.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했을 말이리라. 하지만 나처럼 이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족속들도 있을 거다. 그건 '영원'에 대한 약속 때문이다. 그게 부질없는 일임을, 또 부메랑처럼 아픔으로 다가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껏 써본 적이 없다. 정말 '영원'과 '사랑'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젠가 '영원히 사랑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듣고서야 나는 그 말을 수긍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사랑해'에서 '영원'은 시간의 무한한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강도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마법 같은 사랑의 시간에 대한 강도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영원'이라는 것. 실제로 어떤 1초는 어떤 10년보다 깊고 넓고 중요하기도 하다. 그런 순간들은 영원에 닿아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거대한 시간의 강도를 체험한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신앙고백인 것.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순간의 사랑을 영원으로 잇는 영화 <비포 선셋>이다.

 

 

  2004년 개봉한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9년 만의 속편이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로맨스 영화임에도 속편이 만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많은 관객들이 주인공 제시와 셀린의 뒷이야기를 너무나 궁금해 했던 것.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속편을 만드는데 우려도 많았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기어코 만들었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의견도 적극 반영되었다. 제시와 셀린에 대한 세 사람의 애착과 궁금증이 관객만큼 컸던 모양이다.

 

  <비포 선셋>은 9년 전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비엔나에서 황홀한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 제시와 셀린이 파리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껄렁하고 제멋대로지만 소년 같던 제시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우수에 젖어있고 지적이며 통통 튀던 셀린은 환경운동가가 되어있었다. 9년의 세월은 많은 걸 바꿀 시간이었다. 제시는 결혼을 해 아들이 생겼고, 셀린은 종군기자인 남자친구가 있다. 메일 것 없어 자유로웠고 그만큼 흔들리던 청춘들은 이제 어딘가에 살짝은 메인 어른이 되었다.

 

  '그들은 6개월 뒤에 만났을까?'.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난 뒤에 남는 질문이다. <비포 선셋>은 그에 답해준다.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현실주의자들은 수긍할 수도 낭만주의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정확히는 제시와 셀린은 현실과 낭만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비포 선라이즈>가 밤의 낭만과 사랑이 출렁이는 영화라면, <비포 선셋>은 낮의 이성이 간밤의 꿈을 곱씹는 영화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거리로 나서 9년 전처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늘어난 주름만큼 삶의 곡절도 늘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여름밤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어 반갑다. 9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 상대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마법 같은 사랑인지를 에둘러 확인하고픈 순간의 머뭇거림이 있다는 것이다. 그 머뭇거림 뒤에 터져 나오는 순간, 참을 수 없게 울컥해진다.

 

  "결혼 날짜를 잡고도 네 생각뿐이었어. 결혼식장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네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어. 우산을 접으며 소시지 가게에 들어가더군. 내가 미쳐가는구나 싶었지. 브로드웨이 13번가였어.”와 같은 제시의 고백이나, “너와 보낸 그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 부어,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라는 셀린의 토로는 그래서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다. '지나간 나의 그녀들도 혹시 그런 생각을 가끔은 할까'하는 생각과 함께.

 

 

 

  연애의 목적은 결국 섹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는 아마 인간이 만든 것들 중 목적으로 가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답답한 절차일 것이다.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여기로 당겼다 저기로 밀었다 하는 세상에서 가장 먼 우회로이다. 섹스까지 닿기 전 연애의 도구는 '말'이다. <비포 선셋>은 쉴 세 없는 대화가 오간다. 그들의 말에 깔린 의미들과 그들이 침묵하는 순간들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의 대화는 몸의 섹스를 하기 전의 전희로 보일만큼 매순간 매혹적이다.

 

  특히 9년 전 그날과 서로에 대한 원망의 대화들은 '살'이라기 보단 '뼈'의 대화다. 어떤 경험 후의 인간은 절대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중의 또 어떤 것들은 삶의 체인 전체를 흔들고 강력한 인력으로 생의 모든 순간을 수렴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그 사람의 생의 뼈가 되는 것이다. 제시와 셀린에게 9년 전의 하룻밤은 그들 생의 척추이다. 그래서 척추를 건드리는 대화들은 제시와 셀린을 무너지게 한다. 물론 그와 같은 생의 척추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우리들도.

 

 

 

 

  <비포 선셋>은 제시와 셀린이 셀린의 집에 들어가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듣는 아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 갑자기 끝이 난다. 또 다시 둘이 어떻게 되었을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미완의 엔딩이 둘의 사랑의 완성처럼 보인다. 어쩐 일인지 <비포 선라이즈>와 다르게 이후의 둘이 궁금하지 않다. 영원히 니나 시몬의 노래가 나오고, 셀린은 춤을 추고, 제기는 소파에서 미소 짓는 순간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원히. 그 순간의 시간의 강도가 나에게도 다가왔나 보다.

 

  어떤 하루는 어떤 9년보다 절대로 길 순 없지만, 비교할 수 없도록 밀도가 클 수도 있다. 순간은 끝없이 찬란하게 되살아나는 것으로 영원에 닿는다. 이 영화가 준 순간들은 아마 내 마음 속에서도 영원히 되살아날 것이다.

 

※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미드나잇> 2013년 5월 22일 개봉

 

 

 

<비포 미드나잇> 스틸컷

 

그들은 이번엔 그리스에서 말하고, 걷고, 사랑한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