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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5. 황정민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 행복과 항복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만난 친구의 말이다. 술잔을 내려놓더니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친구의 사연은 이렇다. 재수를 해서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점수에 맞춰 들어갔던 학과에서의 생활이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결국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행복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후 친구는 여행도 다녔고, 책도 읽었고, 사랑도 했고, 일도 했다. 어쩌다보니 그게 4년이나 되었다. 내 딴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산다고 내심 부러워하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니.
나라고 답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삶은 ‘살아지는 것’이라지만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답이 있다.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입에 올려 식상한 단어, 손에 넣으려 하면 슥 빠져나가고 마는 단어. 생각해보니 ‘행복’이 들어간 영화 제목도 수두룩하다. 영화는 결국에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한 각각의 대답이다. 그러니 많을 수밖에.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행복>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황정민의 영화다. 행복의 섬 하와이의 휴양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4인조 밴드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출장밴드와 나이트클럽 연주를 하는 삼류밴드이다. 떠돌던 그들은 리더인 '성우'의 고향에 있는 와이키키 호텔에 일을 받아 내려간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성우는 고교시절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을 만난다. 순수했던 친구들은 각각 돈 밝히는 약사, 직장이 괴로운 시청 공무원, 투철한 환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성우를 부러워한다. 성우가 음악을 배웠던 학원의 원장은 이제는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성우의 첫사랑이었던 인희는 억척스러운 야채장수가 되어있었다. 누구도 행복해보이진 않았다. 색소폰을 부는 '현구'는 밴드를 접고 고향으로 가 일을 하겠다며 나간다. 키보드를 치는 '정석'은 여기저기서 여자를 꼬시며 문제를 일으킨다. 드러머인 '강수'는 도박과 대마초에 빠져 밴드를 탈퇴한 뒤 버스기사가 된다. 멤버들이 바뀌면서도 성우는 밴드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다. 삼류더라도 더럽고 추하더라도 꿈꾸던 삶에서 너무 멀어져왔더라도 그는 무대에 선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성우를 중심으로 멤버들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행복은 너무나 멀다.
나는 가끔 누군가 '행복'이라고 말하면, '항복'이라고 잘못 듣는 경우가 있다. 안 좋은 나의 청력 때문이 아니라도 행복과 항복은 종종 혼동된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한다. 각종 책과 티비에서는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고 앞다투어 말한다. 그걸 보면 나는 질식할 것만 같다. 행복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잘나야 하고, 집도 사야하고, 차도 좋아야 하며, 결혼도 잘 해야한다. 건강해야 하며, 꿈도 이뤄야 하고, 봉사도 해야한다. 행복의 조건들은 마치 나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것 같다. '행복'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을 위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 어떻든 행복의 조건을 받아들여 열심히 살아간다 해도, 삶은 우리에게 번번히 항복을 요구한다. 행복의 뒤통수만 좇다가 죽을 것만 같다. 꿈 많고 순수하던 고교밴드는 각자에게 놓인 삶을 따라갔다. 누군가는 돈의 행복을 좇았고, 누군가는 안정의 행복을 좇았고, 누군가는 이상의 행복을 좇았다. 성우는 남아 꿈의 행복을 좇았다. 시청 공무원이 된 성우의 친구는 성우에게 묻는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넌 행복하니?" 성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멤버는 꿈의 행복을 좇은 사람들이다. 남들 보기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도 행복하지 않았다. 퀸과 비틀즈를 꿈꿨던 그들의 무대는 나훈아 대신 너훈아가, 이영자 대신 이엉자가 서는 무대였다. 와이키키를 꿈꿨지만 현실은 와이키키 호텔에서마저 그들을 내쳤다. 누군가는 고향에서 일을 하러 갔고, 누군가는 버스기사가 되었다. 그들 역시 행복에 항복했다. 행복의 조건은 '행복하지 않음'을 기어코 말하게 하는 형사였고, 그건 '항복의 조건'이었다. 웃기게도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걸까.
밴드 멤버와 일자리를 잃은 성우는 가라오케에서 반주를 한다. 돈 많은 사장님들과 아가씨들은 벌거벗고 놀고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노래를 하고 있는 성우에게도 옷을 벗으라 한다. 참담한 표정으로 벌거벗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성우의 옆으로 와이키키 해변이, 그리고 고교시절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슬프고 처연한 장면이다. 꿈과 현실은 그렇게도 멀다. 이를 영화는 냉정하게 꿋꿋하게 보여준다. 행복한 사람들보다 항복한 사람들이 세상에 더 많으리라. 그 차가운 진실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있다. 첫사랑 인희가 밴드에 합류해서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영화의 엔딩신보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사실상 전혀 나아지지 않은 현실임에도 인희의 노래와 밴드의 연주는 묘한 울림과 위안을 준다. 인생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는 것이 아프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들은 이제 행복을 놓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항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느껴졌던 것 아닐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도 나는 동의하지 못 하겠다. 내 생각에 인생은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해가는 것이다.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돈이 많던 적던, 꿈을 이뤘던 못 이뤘던,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럴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확인한 삶의 진실이 섭섭하지만 위로를 주는 이유다. 그러니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우리 항복하지 않고 살다보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p. s. 황정민, 류승범, 박해일의 풋풋한 모습들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영화라는 꿈을 위해 달려가던 그들이었기에 이 영화가 그들에게도 더 울림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 황정민 <끝과 시작> 2013년 4월 4일 개봉 ※ 황정민 <전설의 주먹> 2013년 4월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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