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7. 송해성의 <파이란>
- '만약'이라는 두 글자
 
 

 
  어떤 단어들은 문득 굴러들어와 마음에 콕 박혀버리곤 한다. 사랑, 상처, 청춘 따위의 말들. 그러나 언제나 내 맘에 아프도록 꽉 박혀 한동안 빼내지 못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바로 '만약'이라는 단어다. 언제 어떻게 박혔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무릎이 꺾이고 왈칵 뜨거워지는 순간. '만약'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비오는 봄밤에 술집은 '만약'으로 앓는 사람들로 꽉 찬다. 
 
  만약에 우리 집이 부자였다면, 만약에 네 맘을 알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이라는 단어엔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무망한 바람 그리고 아픈 오늘에 대한 한탄이 있다. 그러니 어디 이만한 안주가 또 있을까. 찰랑찰랑 술잔을 가득 채우고, 찬란찬란 생을 쓰게 들이키는 것. 우리가 '만약'을 마음에서 빼내는 분투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들을 때마다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콕 박혀 빠지지 않는 영화. '만약'이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무너지는 남자의 영화. 송해성 감독, 최민식·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 '만약'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굴러가게 만드는 연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만약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같은 질문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만약'의 장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리 그려보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 조각을 맞춰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삶 역시 굴러가려면 '만약'은 필수다. 영화 <파이란>은 그러나 '만약'이라는 희망의 연료도 가져보지 못했던 남녀의 빗나간 사랑이야기다.
 
  강재(최민식)는 비디오방에서 동네 학생들에게 불법포르노를 유통하는 삼류 건달이다. 강재의 유일한 낙은 오락실에서 동전을 뜯어내 하는 오락이 전부다. 친구이자 건달 동기인 보스 용식(손병호)에게 무시당하고, 심지어 건달 후배들에게도 대우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강재는 불법포르노 유통으로 열흘 간 구류를 살다가 돌아오는데, 용식이 상대 조직보스를 살해하는 현장에 휘말리게 된다. 용식은 강재에게 배 한 척 사서 고향으로 돌아갈 돈을 줄 테니, 대신 감옥에 들어가 달라고 부탁한다. 삶에 어떤 희망도 없었던 강재는 용식의 부탁을 승낙한다. 
 
  그때 마침 1년 전 서류로 결혼을 해줬던 중국 여자 파이란(장백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던 강재지만, 남편 자격으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를 찾아간다. 
 

 

 
  되는대로 살아온 강재에게 삶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에겐 '만약'이라는 단어가 들어와 박힐 수가 없다. '만약'은 가능성의 단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상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만약'이라는 단어가 굴러들어와 콕 박히게 된 것은 죽기 전 파이란이 남긴 편지 때문이다. 
 
  파이란은 순수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곁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강재 외에 아무도 없다. 그녀는 직접 얼굴도 보지 못한 강재에게 위안을 얻고 조금씩 사랑하게 된다. 암흑 같던 그녀의 삶에 희미하지만 새로운 빛을 준 것이 강재의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파이란 역시 강재 때문에 '만약'을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툰 한국어로 '당신이 가장 친절하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파이란의 편지는 강재에겐 처음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다. 그 순간,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순간. '만약'이라는 단어가 강재의 마음에 박히게 된다. 그때부터 삶은 전과 다르게 나아간다. 만약 내가 건달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파이란과 만나서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만약 편지를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었더라면,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강재의 삶을 변화시킨 마법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뒤였다. 무도회가 끝난 뒤에 나타난 마법사처럼 그것은 아픈 마법이 된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뻘쭘히 선 그의 모습이, 시체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편지를 읽으며 떨리는 어깨가 그래서 더 슬프다. 파이란의 장례식을 통해 강재는 비로소 진짜 그녀의 남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강재는 용식의 제안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의 삶이 가능성을 향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재는 용식의 복수로 고향으로 떠나기 직전에 죽음을 맞는다. 꿈처럼 봄바다에 선 파이란의 모습을 보며. 
 
  영화에서 강재와 파이란은 끝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파이란이 강재를 찾아왔을 때 강재는 경찰에 끌려갔고, 강재가 파이란을 찾아왔을 땐 파이란은 차갑게 식은 뒤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더더욱 '만약'이라는 단어를 품게 된다. 그들이 만났더라면, 파이란이 살았더라면, 강재가 살아서 고향에 갔더라면, 그랬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며칠 술을 마셨다. 마음 속 돌멩이를 빼내는데 한참이 걸렸다.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강재의 짧은 답장을 대신 전해보기로 한다. 강재와 파이란이 봄바다에서 만날 수 있길.
 
 
파이란에게,
 
당신은 나를 몰라요. 나는 친절한 사람도 사랑할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나도 당신을 몰라요.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어떻게 웃는지 나는 몰라요. 
 
그래도 파이란. 
나를 알아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가장 친절한 사람이에요. 
 
'안다'는 것이 정보를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라면, 
나는 당신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당신이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알아요. 다 알아요. 
알아요. 다 알아요.
 
만약 당신을 본다면 안아줘도 될까요?
만약 당신이 봄바다에 여전히 서있다면, 그리로 갈게요.
만약, 만약에….
 
 
 




 
※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가족> 2013년 5월 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