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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11.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 정의의 역사
얼마 전 친구로부터 고민상담요청을 받았다. 내용인 즉 3달 전 사귄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거였다. 이상하긴 대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나는 고민인 척 실은 자랑질인 그것들을 많이 겪어봤기에 상담요청을 거절하려했으나, 친구의 목소리는 정말 심상치 않았다. 맥주500을 원샷하곤 탁자에 쾅 내려놓으며 심각한 얼굴로 하는 말. "내 여자친구 아무래도 학교 다닐 때 노는 애였던 거 같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마피아든 간첩이든 누구든 사귀고 싶은 내 앞에서 그게 할 소리란 말인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군.'이라며 심드렁하게 닭다리를 뜯었다. 친구가 말을 이었다. "그냥 놀았던 게 아니라 좀 세게 놀았던 것 같아. 여자친구가 술자리에서 다른 여자 분이랑 싸움이 붙었거든, 근데 그 육두문자며, 조인트 까기, 가드 올리기까지…." 이쯤 듣고 나니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헤어지려고?" "모르겠어. 정말 화낼만한 상황이긴 했거든. 그래도…. 알고 보니까 학교도 자퇴했더라고…이젠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르게 보여 나 어떡하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여자의 숨겨진 과거를, 그것도 폭력적 과거를 보았다면 뭐가 달라질까. 그것만으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에서 포악한 괴물로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과거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눈앞의 현실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우리에겐 '역사'라는 것이 있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섬뜩한 과거를 가진 선량한 남자가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다시 섬뜩한 일을 행하고 마는 영화, 내 친구에게 추천하고픈 영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다.
<폭력의 역사>는 인문학도서 같은 영화제목처럼 집요하게 '폭력'에 대해 물고 늘어진다. 특히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한 남자의 잠재된 폭력성의 부활과 그 폭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총구는 결국 '폭력은 어떻게 판단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영화를 보는 우리는 폭력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으로 향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가정적이고 친절한 남자 ‘톰’(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사람을 구한 일로 마을의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대서특필된다. 그러나 며칠 후, 거대 갱단의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와 그가 ‘톰’이 아닌 자신의 적 ‘킬러 조이’라며 그와 그의 가족을 위협한다. 톰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아이들 역시 그에게서 ‘조이’의 모습을 보고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마침내 포가티 일당마저 죽이는 톰의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그가 실은 과거에 잔혹한 킬러 조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뒤 톰은 자신의 형 리치로부터 전화를 받고 갱의 두목인 형의 저택을 찾아간다. 형이 자신을 죽이려하자 그는 갱단 모두를 살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에 행해진 톰의 폭력은 사람들을 구한 영웅적 행위였다. 위협적인 강도들을 죽인 그의 행위는 분명 식당의 사람들을 구했다. 게다가 그의 액션은 상당히 유려하고 간결한 멋이 있다. 관객은 분명 그의 호쾌한 액션을 즐겼고 그를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보면 답할 수 있을까. 톰은 정말 강도들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을까? 물론 위급한 상황이었다.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를 겁탈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미 제압된 강도에게도 톰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겨 살해했다. 이 행위는 아주 약간이지만 과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건 고려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죽어도 싼 녀석들이라고 말하고, 언론은 시민영웅으로 그를 추앙한다. 이때 톰이 행한 폭력은 '정의'이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감독은 관객이 톰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만들기 위해 영화의 시작에 이상하리만큼 중요하게 두 명의 강도의 행위를 보여준다. 이로써 관객은 그들을 죽어도 싼 놈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묻는다. 강도의 폭력과 톰의 폭력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또 묻는다. 그 잔혹한 폭력에서 쾌감을 느끼지 않았냐고.
이 정의로운 폭력은 슬프게도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 포가티 일당의 위협이 찾아온다. 이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먼저 위협을 했지만 결국에 그들 모두를 톰은 살해한다. 그리고 가족들마저 톰의 실체를 알아챈다. 그리곤 톰의 폭력에 대한 인식이 180도 뒤바뀐다. 아내는 그를 거부하고 아들은 그를 조롱한다. 톰은 강도를 죽였을 때와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번엔 시민영웅이 아니라, 살인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달라진 건 숨겨져 있던 그의 역사가 드러났다는 것뿐이다. 친구의 고민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는 여자친구의 당찬 모습과 정의감 같은 것에 반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여자친구를 일진 양아치로 보고 있다. 그녀의 밝혀진 역사 때문이리라.
톰은 이후에도 폭력을 멈추지 못한다. 더 큰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다시금 더 큰 폭력을 행한다. 이쯤 되면 영화는 한 번 그랬던 놈들은 결국 다시 그러게 돼있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또한 맞다. 폭력성이라는 괴물은 죽지 않고 숨어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영화가 겨냥하는 더 중요한 과녁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당신은 어떠하냐는 것. 당신도 이 폭력을 충분히 즐겼다면 응원했다면 당신 안엔 그 괴물이 없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 질문의 방아쇠는 영화의 엔딩장면에서 당겨진다.
톰이 자신의 형과 갱단마저 살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은 조용히 숨죽여 식사를 하고 있다. 천천히 톰이 빈자리로 간다. 눈치를 보던 막내딸은 톰의 접시와 식기를 내어온다. 아들이 빵을 권하고, 톰은 아내와 오래도록 눈을 맞춘다. 그들은 이제 그의 폭력성을 인정한다. 그를 다시 받아들인다. 톰이 가진 폭력성은 전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그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또 그 폭력이 그들의 행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에 대한 아주 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다.
폭력은 그렇게 정당화된다. 미국은 악의 축을 정해놓고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의 핵은 문제지만 자신들의 핵은 평화다. 경찰은 정의의 이름으로 강압수사와 고문을 하기도 하고, 국정원은 정의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사찰하며, 교사는 정의의 이름으로 학생들을 체벌하고, 부모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식을 벌한다. 어디 이런 것들뿐이겠는가. 무엇은 정당화될 수 있고 무엇은 정당화될 수 없는가.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거기엔 결국 이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행하는 폭력, 내 편이 행하는 폭력은 정의다 라는 인식. 맞을만하니까 맞는 거다 라는 인식. 그것이 생략하고 감추는 것들이 무엇일까.
한참을 내 앞에서 넋두리하던 친구는 결국 여자친구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 친구가 말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랑 같이 정의의 역사를 만들어 가면 되는 거지. 어쩐지 더 섹시하기도 하고…." 섹시라니. 그래, 역시는 역시나 역시군. 친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폭력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정의의 역사를 의심해보려 한다. 그들은 정말 정의이고 영웅일까.
※ 데이빗 크로넨버그 <코스모폴리스> 2013년 6월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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