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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사정으로 룽의 EX를 쓰지 못 했습니다. 영화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로 대신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싸움의 시작
- 필사즉생 필생즉사
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어떤 싸움들을 기록한다. 놀랍게도 이 싸움들은 나의 학창시절 교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누구도 단지 어린 날의 싸움이라며 쉬이 넘기진 못 하리라. 이것은 어느 전쟁보다도 뜨거웠던 자리싸움의 기록이다.
2인용 책상 전쟁
미식축구에선 ‘영토확장’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저 상대를 밀어내고 전선(戰線)을 조금씩 앞으로 끌고 나가 결국 터치다운을 하는 것이다. 영토확장의 신(神)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은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지는 결코 승리했다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저 상대를 쓰러뜨리고 밀어내는 것. 영토확장은 나에게도 징기스칸의 고민을 안겨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개인책상이 아니라 기다란 2인용 책상을 두 명이 함께 썼는데 이것이 또 문제였다. 내 필통과 팔꿈치가 짝꿍을 찔렀고, 짝꿍의 노트와 무릎이 나를 밀었다. 뻔하게도 우리는 네 자리니 내 자리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책상 중간에 연필로 선을 그었다. 서로 선을 넘지 않기로, 넘어오는 건 다 상대가 갖기로 협약을 맺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경계선이 생기자 왠지 나는 그 너머로 더욱 넘어가고 싶었다. 짝꿍의 책상이 젖과 꿀이 흐르는 책상으로 보였다. 나는 슬쩍슬쩍 짝꿍의 영토를 침범하다가 이내 가위바위보니 딱지치기니 지우개 따먹기를 해서 승리하면 영토를 더 갖자고 제안했다. 서로 밀어내고 또 밀리며 싸움은 계속 되었다.
표면적으로 싸운 건 나와 짝꿍이었지만 실제 전장에서 싸운 건 애꿎은 학용품들이었다. 지우개 상병과 연필 동무가 싸웠고 커터칼 장군과 노트 대령이 싸웠다. 내 변신로봇필통은 외팔이가 되었으며 짝꿍의 잠자리 지우개는 애꾸눈이가 되었다. 그들은 책상 위 경계선 따위 알지도 못 했을 텐데 열심히 싸웠다. 게다가 그들은 한 문방구에서 온 형제들이 아니던가! 철없던 우리를 부디 용서해주길.
나와 짝꿍은 책상전쟁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미식축구가 뭔지도 몰랐는데. 징기스칸의 피가 끓고 있었을까.
그때 나는 9살이었고 얼핏 세상이라는 거인의 '구멍 난 양말'을 본 듯 했다. 지구는 사실 거대한 책상이 아닐까. 우리는 거대한 책상 위의 연필과 지우개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책상 설계자와 개인 책상이 없는 학교시스템을 원망했다. 2인용 책상을 만들 때부터 분명 이 싸움은 예견된 것이었다.
에어컨디셔너의 난
축구에서는 ‘위치선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골을 넣거나 골을 막아낼 수 있다. 위치선정의 신(神)이라 불리는 축구선수 인자기는 그저 빈틈에 서 있다가 너무도 쉽게 골을 넣는다. 그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것. 인자기처럼 나에겐 좋은 자리를 찾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여름이었다. 중학교 때까진 못 보던 물건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에어컨. 조금 낡아 보였지만 그건 신세계였다. 에어컨은 창가 쪽에 있었는데 이것이 파국의 원인이었다. 이 오래된 에어컨은 용케 창가 쪽 아이들을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워냉방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도 반대 쪽 아이들을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교실엔 3개의 분단이 있었다. 에어컨 쪽에서 코를 닦던 ‘콧물나 분단’, 반대 쪽에서 땀을 닦던 ‘땀띠나 분단’ 그리고 적당한 시원함 속에 졸면서 침을 닦던 ‘중간분단’.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희망온도 18℃의 냉혹한 추위를 참다못한 콧물나 분단의 과격파가 에어컨을 꺼버렸다. 주축은 매서운 눈매의 복싱부와 그의 무리들. 이에 땀띠나 분단의 급진파는 곧바로 에어컨을 파워냉방으로 다시 가동시켰다. 이쪽은 떡 벌어진 어깨의 시내 중학교 짱 출신과 그의 무리들. 아직 우리 반 짱이 가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 신경전은 급속도로 불이 붙었다. 결국, 쉬는 시간마다 에어컨을 둘러싸고 언쟁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협상시도도 있었으나, 번번이 메울 수 없는 서로의 입장차만을 확인한 채 진전이 없었다. 끄면 켰고 켜면 껐다. 그렇게 종일 냉온탕을 오가며 치열하게 전투하던 아이들은 감기와 땀띠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나는 어디 있었냐고? 행운의 위치선정으로 중간분단에서 몽롱하게 싸움구경을 하며 정신없이 침을 닦고 있었다.
우리(나는 아니니까 정확히는 그들)끼리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평화주의자인 반장의 신고로 담임선생님의 결정에 맡겨졌다. 고민 끝에 선생님이 내리신 결정은 자리를 좌우반전 시키는 것. 중간분단은 그대로 두고 이쪽과 저쪽만 바꾸는 식이었다. 역지사지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보길 원했던 선생님의 참으로 교육자다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웬걸. 선생님의 바람과 달리 입장만 바꿔 아이들은 또 싸우게 되었다. '역지사지'는커녕 '역시 싸우지'
콧물나 분단은 이제 ‘땀띠 나는 콧물나 분단’이 되었고, 땀띠나 분단은 ‘콧물 나는 땀띠나 분단’이 되었다. 에어컨 이쪽과 저쪽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누구도 춥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덥고 싶지 않았다. 이건 이해와 공감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한 실존의 문제. 즉, 콧물과 땀띠의 문제였다. 복싱부와 일진의 자존심 대결이 아니었더라면 문제는 더 쉽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다. 각 분단의 대장이던 그들은 어떻게든 상대를 무릎 꿇리려했다. 그 속에서 다른 아이들은 추위와 더위보다도 무서움에 떨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17살이었고 언뜻 세상이라는 거인의 '헤진 팬티'를 본 듯 했다. 세상사람 모두 사실 에어컨과 자리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닐까. 누가 나빠서도 착해서도 아니고 그냥 그 순간 그 자리에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교실 설계자와 에어컨은 두 대 설치할 수 없는 학교재정을 원망했다. 에어컨을 설치할 때부터 이건 예상된 싸움이 아니었을까!
모든 싸움의 결말
- 나의 자리를 알리지 마라.
에어컨 전쟁의 결말은 이러하다. 복싱부와 일진의 맞짱 외엔 답이 없을 것 같던 에어컨 전쟁은 그들의 긴급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거대연합이 된 그들은 담임선생님의 눈을 피해 중간자리 아이들을 쫓아내고 그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중간자리에 있던 나 역시 쫓겨나 교실 속 난민이 되었다. 에어컨 앞에서 외투를 입고 코를 흘렸고, 반대쪽에서 난닝구를 펄럭거리며 땀을 닦았다. 세상만사 이럴 수가!
책상 전쟁의 결말은 이러하다. 치열한 전쟁에서 계속해서 밀린 나는 결국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같은 모습의 책상을 갖게 되었다. 내 책상서랍도 눈치 보며 쓰는 신세가 되었다. 소중한 나의 학용품 전우들의 넋을 무엇으로 기릴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나. 세상만사 이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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