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지 : [오까마의 책장을 덮고나서]의 작가 집중 탐구는 준비 기간이 걸려 그 동안은 독서에세이로 대신합니다.

 

 

 

 

감기약, 그리고 타임스키퍼

 김언수의 캐비닛』

 

 

 

 

 

   몸이 으스스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감기가 올 모양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닐 말씀이었다. 한층 추워진 날씨에 대비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진짜 원인은 면역력이 약해진 몸이라 생각했다. 요근래 잠도 몇 시간 자지 못했고, 깨어있을 때면 피로로 온몸이 짓눌리곤 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결국 감기가 들고야 말리라. 평소에 틈틈이 체력이나 키워둘 걸, 또 혼잣말로 지난 내 행동을 자책한다. 어차피 시간을 돌린다하더라도 내가 운동을 틈틈이할리 없겠지만, 궁시렁대는 건 이제 고칠 수 없는 나의 버릇이다.


   두 개의 선택지가 존재했다. 해야 할 것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두툼한 이불 속에서 빈둥거리거나, 해야 할 것들을 하나둘씩 열심히 해치우고 훈장처럼 감기를 받아들이는 것. 기로에서 고민하던 중 감기약이 눈에 들어왔다. 감기도 걸리지 않고 과제도 끝낼 수 있는 만능열쇠. 감기약을 먹으면 아픈 것이 낫기보다는 아프다는 느낌만 손쉽게 지워버리는 것 같아 꺼려졌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컵에 냉수 반 온수 반을 담고 있던 그 순간 타임스키퍼가 생각났다. "타임스키퍼"는 말 그대로 시간을 이동하는 사람들인데,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시간 이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에게는 시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김언수의 소설 캐비닛』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러나 허구라고 쉽게 생각할 거리는 아니었다. 가끔씩 어떤 허구는 진실보다 더 진실할 때가 있으니까. 책에는 타임스키퍼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와있다. "타임스키퍼들이 모두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정확한 삶을 선호하는 사람들이고 시간에 대해 강박적일 만큼 철저한 사람들이다."


   타임스키퍼들은 자신의 삶에서 시간을 도둑맞은 사람들이다.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에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존재의 부재를 느껴 자살을 했고, 어떤 이는 도시 속 일벌레에서 남태평양 산호섬의 주민이 되었고, 어떤 이는 자신이 없어도 사회가 잘 굴러가는 것을 보고는 일을 때려쳤고, 어떤 이는 워커홀릭에서 조금은 헐렁해진 사람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뜬금없는 허구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단락을 꼭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182)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이 이렇게 말했단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김언수는 "타임스키퍼"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당신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각기 다른 수많은 일들이 쌓여있겠지만, 멀리서 보면 그저 똑같은 하루하루일지도 모른다.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날들을 제거해버린다면, 당신의 삶에는 과연 며칠이 남아있을 것인가. 물론 김언수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실제로 그런 날들을 통째로 없애버리는 상상력으로 자신의 뜻을 어필한다.

 

 

 


 

   나는 결국 감기약을 먹지 않았다. 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만 시원하게 원샷했다. 어쩌면 갑자기 타이밍 좋게 "타임스키퍼"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쉬고 싶을 때조차도 그럴싸한 핑계가 없으면 쉬지 못하는 겁쟁이라 핑계를 지어낸 건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보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또 내 몸조차 마음대로 하기 힘든 이 세상이 얼마나 척박한지 생각하곤 한다.


   두꺼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 책 한 권을 챙겨들어갔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김언수의 캐비닛』 혹은 김언수의 또 다른 책 설계자들』을 들고 들어갔으리라 예상하겠지만, 아니될 말씀이다. 나는 수업 교재를 들고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쓰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교재를 펼칠 때의 패기는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스마트폰을 부여잡다 잠들어버렸다. 오래간만에 푹 잤다. 자고나니 감기 기운도 자취를 감추었다. 글 말미에 고맙다는 인사는 꼭 적어야겠다. 나에게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준 김언수 작가에게 모든 감사를 전한다!


 

 


 

by 오까마  

높디높은 열정과 낮디낮은 능력 사이에서 방황 중  

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