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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고리오 영감』(민음사, 1999)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어떤 순간에 문득, “이제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이 ‘문득’ 찾아오는 이유는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는 순간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한 자신을 보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한 번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는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이와 어른을 구분짓는 것일까?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이 질문에 한 가지 대답을 들려준다.
발자크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짓는 것은 ‘순수’ 또는 '순수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그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아이의 순수한 시각은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다. 아이의 눈과 아이가 바라보는 대상을 그대로 바라본다. 그러나 ‘순수’를 잃어버린 어른의 시각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어른의 눈과 시선의 대상 사이에는 많은 장애물이 존재하여, 대상은 굴절되고 왜곡된 형상으로 망막에 맺힌다. 어른은 더 이상 벗을 수 없는 안경을 쓰게 된 존재인 것이다.
『고리오 영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으젠 드 라스티냐크’는 아이임에도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으젠은 아이의 영역인 그의 고향 앙굴렘에서 벗어나, 어른의 영역인 파리 사교계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상류층의 문법을 터득하고 사교계의 법률을 배우며, 계략에 당하고 술수를 펼치면서 서서히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고리오 영감』의 줄거리는 앙굴렘의 아이가 파리의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으젠’인데, 왜 소설의 제목을 차지한 건 ‘고리오 영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리오 영감은 작가가 강조하고픈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논리 – 특히 팽배한 자본주의의 논리 – 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딸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보잘 것 없고 귀찮은 것이고 그의 돈만이 중요한 것이 되고 만다. 그의 사랑은 뭉개지고 짓밟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딸들을 위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의 사랑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되고, 고리오 영감의 기괴할 정도의 사랑은 숭고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앞선 질문을 뒤집은 질문,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이 왜 ‘으젠’이어야 하는가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 심지어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두 딸들까지 – 고리오 영감을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가치로만 판단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직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으젠’과 정말 어린아이인 심부름꾼 ‘크리스토프’ 뿐이다. 빈털터리가 된 그의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으젠과 크리스토프 뿐이다.
고리오 영감은 차가운 땅 속에 묻히고 이제 ‘순수’는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으젠은 이제 자신이 어른이 되는 길 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그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는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 그곳에 묻었다. 이 눈물을 순결한 마음의 성스러운 감동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떨어뜨렸던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튀어오는 것 같은 눈물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젠의 이런 모습을 보고 크리스토프마저 가버렸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꼭대기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는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불치병자 병원의 둥근 지붕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들어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있었다. 그는 벌들이 윙윙거리는 벌집에서 꿀을 미리 빨아먹은 것 같은 시선을 던지면서 우렁차게 말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사회에 도전하려는 첫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396)
으젠은 고리오 영감과 함께 그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순수’마저도 땅에 묻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묘지 꼭대기에 올라서서 –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밟고 올라서서 - 자신이 들어가려고 애썼던, 그리하여 마침내 들어갔던,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파리의 사교계를 바라본다. 으젠은 이제 어른이 되었으며, 어른의 방식으로 어른의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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