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롱바오의 영화 냠냠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영혼이 깃든 역사의 땅, 제주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2013)

Jiseul 
9.1
감독
오멸
출연
이경준, 홍상표, 문석범, 양정원, 박순동
정보
드라마 | 한국 | 108 분 | 201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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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드디어 돌아온 샤오롱바오입니다. 저는 2014년의 시작을 제주도에서 맞았는데요, 그 기념으로 오늘은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2012)(이하 <지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 우리는 섬의 동쪽 끝 성산 일출봉 즉 새벽 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의 축제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48925(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19484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잃은 시인 강중훈씨 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 9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200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프랑스) J.M G. Le Clezio, 유럽최대잡지 <GEO> 20093월호 제주기행문중에서.

 

제주도는 두말할 것 없이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4.3항쟁이라는 역사를 품고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제주도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4.3항쟁의 기억이 유산으로 남아 제주 곳곳에 깃들어있지요. 샤오롱바오도 <지슬>을 본 이후로 4.3항쟁에 대한 관심이 더욱 늘어난 터라, 제주에 있는 동안 4.3항쟁의 흔적들을 눈 여겨 보았답니다. 이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 곳은 성산일출봉 앞에 있는 터진목 4.3유적지에요. 이곳이 4.3유적지가 된 이유는 성산읍 관내 주민들이 총살된 장소이기 때문이고 2010년에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이곳 경치는 제가 가보았던 장소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정말 멋진데, 이렇게 멋진 광경과 쓸쓸한 위령탑의 매치는 어쩐지 황량하고 씁쓸합니다.

 

, 오늘의 영화 <지슬>은 제주 4.3항쟁에 대한 영화입니다. 제주 4·3사건은 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4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됩니다(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지슬>은 그 중에서 큰 넓궤 동굴에서 두 달여간 숨어 지내다 19481224일 정방폭포 앞에서 총살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슬?

 


영화의 제목인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를 뜻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왜 제목이 지슬일까 궁금했는데, 영화에는 지슬 그러니까 감자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겨울의 섬에서 배를 채울 가장 흔하고 편한 음식인 것이죠. 지슬은 군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는 아들 가족에게 어머니가, ‘폭도를 한 명도 사살하지 못해 굶고 있는 박 상병에게 동료가, 군인들에게 잡혀와 유린당하는 순덕을 위해 박 상병이 챙겨주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동굴 안에서 다 같이 오순도순 나눠먹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렇게 착한 사람들의 착한 마음이 담긴 지슬이라는 매개는 비극의 역사 속에서 마냥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그리고 모두의 죽음을 담고 있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도입부. 흑백의 화면에 나무문이 보이고 그 문을 열면 연기가 자욱합니다. 따라 들어가면 군홧발 아래 흩어져있는 제사 식기들. 시체 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 남자와 그 칼로 배를 깎아 먹는 남자, 이어지는 배 씹어 먹는 소리. 너무도 조용하게 그러나 너무도 소름끼치는 비인간적 장면이 지나가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한 간략한 자막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나 역사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지도, 과장된 픽션으로 감정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영화는 참혹한 과거의 사건을 제사에 빗대어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을 선택합니다. 영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소제목 - ‘신묘’, ‘음복’, ‘소지가 그것입니다.

 

 

신묘: 영혼이 머무는 곳

 


신묘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합니다. 영화 <지슬>은 신묘에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정의를 붙여주었네요. ‘신묘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는 순간, 눈 덮인 들판에 한 여인-순덕-이 서 있고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한 명의 군인-박 상병-이 있습니다. 겨울바람이 휘날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누구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곧 다른 군인들이 몰려와 그녀를 끌고 가고 순덕은 부대의 공공재가 되어 성적 유린을 당합니다. 영화 내내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순덕, 그녀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흐느낌만이 그녀가 느꼈을 공포와 응축된 분노를 전달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박 상병은 순덕을 죽이지 않은 것에 미안함을 느낄 지경이고요. 순덕이 박 상병을 직접적으로 원망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 대가를 받게 되나요? 결국 박 상병은 순덕의 손에 죽고, 순덕 역시 죽고, 박 상병이 순덕에게 건네주려던 감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순덕을 마음에 품고 있던 마을 청년 만철은 사라진 순덕을 찾으러 마을에 내려갔다가 순덕이 군인들에 의해 죽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말 못할 충격과 말 못한 슬픔에 빠진 만철은 언덕배기를 따라 날이 저물도록 달리고 또 달립니다. 만철이 달리는 언덕의 능선은 이내 놀랍도록 순덕의 몸-유린당하던 순덕의 몸과 유사한 모습으로 겹쳐집니다. 이제 이 땅은 순덕의 혼이 머무는 대지가 됩니다. 신묘: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타이틀이 슬프도록 와닿는 순간이지요.

 

 


음복: 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많이들 알고 계실 음복은 제사를 마치고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제수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지슬>에서는 단연코 감자가 그 음식이 되겠죠. 거동이 불편해 짐이 될까 아들 가족만을 피난 보내던 무동의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에게 지슬을 챙겨가라고 말합니다. 어떻게든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었던 아들은 답답함에 화를 내며 감자들을 내던져버리죠. 결국 집에 혼자 남아 군인들의 손에 죽게 된 무동 어머니는 불타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 가족을 생각하며 지슬을 품에 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잘 익은 지슬. 하얀 연기와 기둥만 남은 집터, 불에 타 죽어간 어머니의 품속에서 감자를 발견한 무동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따뜻하고 달게 잘 익은 감자를 맛있게 먹을 뿐. 진정한 음복의 순간입니다.

 

 


소지: 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소지는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행위 또는 그 종이를 말합니다. 영화에서는 마른 고추가 소지가 됩니다. 피신해 있던 동굴을 추적해 군인들이 쳐들어오려고 하자 주민들을 마른 고추에 불을 붙여 매운 연기를 피어 올립니다. 군인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올려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소지의 과정과 닮아있지요. 사람들은 마른 고추를 태우며 살고 싶다는 염원을 절박하게 올려 드립니다. 비록 그 연기로 인해 자신들도 숨이 막히고 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검은 화면에 울려 퍼지는 총성, 그 염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영혼을 영화에 담을 수 있을까


어찌보면 영화 <지슬>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4.3사건이라는 역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우리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어쩐지 사건의 전말 같은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이것이 바로 현실이자 역사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언제고 알 수 없을 제주의 언어와 제주의 역사. 그 당시 그 곳에 있던 사람들도 자신이 왜 죽는 지 이해할 수 없었을 절망감들. 하지만 그 때 그 사람들의 저항과 염원과 영혼이 제주 땅에 스며들어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냈겠죠.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짚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어요. 너무 명확하지도 너무 모호하지도 않아서 왠지 더 와닿고 같이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혹시 제주에 가게 된다면, 제주 곳곳 역사의 흔적에 좀 더 귀 기울여 보세요. 분명히 더 풍부한 여행이 될 거에요! 





. 영화 <지슬>, 정말 추천합니다. 오늘은 영화의 전반적인 내러티브 얘기를 워낙 많이 하게 됐지만, 영화 형식적인 요소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감각적이고 멋진 작품이거든요. 인물들이라든가 화면 구성, 사운드 등, 제가 글에서 포괄하지 못한 부분도 많아서 사실 좀 아쉽기도 한데 여러분이 영화 보시고 얘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 런지요! 다시 보니 더욱 감회가 새롭고 가치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였어요. 당신에게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