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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랑과 사랑 틈새
줄 리 에 게 박 수 를
안녕하세요, 당신. 저 빙구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벌써 2월 중순이에요. 곧 3월이 오구요. 산등성이에는 아직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당신과 저는 어느새 겨울과 봄의 틈새에 서 있어요. 바람은 아직 날카롭고 며칠 새 기온이 좀 더 내려간다지만, 봄이 온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 봄인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져요. 비록 같은 공간에 있진 않지만, 겨울이 지나가는 이 밤, 봄을 기다리는 이 밤을 함께하고 있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큼. 이런 어중간한 순간을 당신도 사랑하나요? 이를테면 계절과 계절의 사이, 사랑과 사랑의 틈새, 당신과 저의 사이같은 것 말이에요. 오늘 들고 온 당신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거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그래서 누구에게도 박수받지 못하는 어중간한 이들.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저와, 그리고...... [줄리에게 박수를].
햄릿, 그리고, 줄리엣
햄릿 : 누구요, 햄릿이요? 당신이라믄 (사이) 나요, 나? 정종복이?
오필리어 : (피식 웃는다)
햄릿 : 어, 어, 왜 웃어요.
오필리어 : 아뇨. 햄릿, 그러믄 햄릿 같잖아요 그죠? 근데 정종복이 – 이러믄 햄릿 안 같잖아요. 정종복이와 햄릿 사이엔 천만 광년만큼의 거리가 있는 거라.
그는 햄릿입니다. 가난한 연극배우 정종복이와는 천만 광년쯤 떨어져있는 햄릿이요. 이 남자 아주 지금 속이 뒤집어집니다. 아니 글쎄 어젯밤에 술에 이렇게 꼴아 갖구 한 돈짜리 순금 반지 주면서 고백까지 했는데, 이 여자는 들은 척 만 척 천만 광년이네 어쩌네 남의 이름 갖고 자지러지게 웃으며 어물쩡 넘어가려 그럽니다. 그 반지를 연극 소품으로 주섬주섬 챙겨 온 이 눈치없는 여자는, 죽은 전 애인이 준 반지를 참기름 들기름 식용유로도 못 빼고 끼고 다니는 이 여자는 바로 햄릿이 사랑하는 여자, 햄릿이 몇 발자국 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는 여자, 오필리어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사실 오필리어가 아닙니다. 오필리어 배역을 맡은, 마찬가지로 가난한 연극배우 김은옥이죠. 근데 사실 가만보면 또 이 여자는 김은옥도 아닙니다. 뭘 해도 어중간한 이 여자는 사실…… 줄리엣입니다. 죽은 로미오의 연인, 줄리엣. 햄릿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막을 내렸고 <햄릿>이라는 새로운 공연이 올라갈 차례인데, 오필리어는 줄리엣도 오필리어도 아닌 채로 여전히 로미오를 보낸 그 가을 속에 서 있거든요. 연극 [줄리에게 박수를]은 이런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을과 봄의 사이, 지구와 달의 사이, 햄릿과 줄리엣의 사이에 있는 이들 말입니다.
계절과 계절 사이, 햄릿과 줄리엣의 사이
로미오, 오필리어 : 이 세상에서가 아니어도 좋아 다음 세상 그 다음 세상에서라도,
첫 번에 못 만나고 두 번에 못 만나서 그렇게 백 번, 천 번, 만 번이 거듭되서 백 번 천 번 만 번의 그리움만 쌓인대도 좋아.
합창 : 그렇게 못 만나던 어느 날 당신이 밥을 먹다 이유 없이 괜히 눈물이 흐를 때 그때 꼭 그렇게 생각해 거기 못 간 내가 당신 눈을 간지럽힌 거라고 거기 못간 내가 바람이 돼서 슬쩍 당신 한 번 만진 거라고 아무래도 좋아 어떡해도 좋아 지금 여기 이렇게……
(……)
오필리어, 김밥을 꾸역꾸역 말없이 구겨 넣고 씹다가는 설핏 눈물을 흘린다.
햄릿, 무대 한쪽에 서서 오필리어를 바라본다. (……)
로미오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필리어는 아직도 그와 함께 했었던 구석진 벤치에 쪼그려 앉아 로미오를 추억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햄릿이 있죠. 햄릿의 말마따나 조금 어려운 말을 쓰자면, 이건 결국 기표와 기의의 문제입니다. 오필리어의 세상이 온통 로미오와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는 거죠. 하늘, 바다, 아이들, 하다못해 불어오는 봄바람 한 자락까지 모두, 햄릿이 독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되어 있거든요. 그녀가 여전히 줄리엣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미오가 죽은 순간부터 그녀의 세상에는 다시는 해가 뜨지 않은 채 찬바람만 불고 있으니까요. 오직 오늘만 살겠노라는 연인들의 노래를 부르던 그녀에게 봄빛 내일들은 그저 무의미할 뿐이어서, 이어지는 나날들을 아무리 꾸역꾸역 삼켜도 언제나 그녀는 소화불량입니다. 당신이 없는 오늘, 오필리어가 트는 텔레비전에는 당신과의 어제들만 계속 재방송되고 있는……그녀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목련꽃이 피는 봄도 없습니다.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고 헤매는 오필리어는 그래서, 아픕니다.
햄릿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분들 그거 해 보셨습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확 돌아서면 저는 언제나 거기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저기 저 나비같이 춤추는 저 여인이 보이십니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때 보게 된 겁니까, 하필이면 왜 지금에서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리엣, 그 이름을 버려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햄릿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필리어만 바라보며 걸어 왔지만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녀와 그 사이의 몇 발자국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가 않습니다. 그가 걷는 길의 이정표는 언제나 오필리어의 그 뒷모습이었다는 걸, 그녀가 거기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표처럼 떠도는 청춘도 길을 잃어버린 사랑도, 그 무엇도 되지 못한 그 어딘가의 길목에서 햄릿은 좌초해 있습니다. 그녀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햄릿도 마찬가지로, 아픕니다.
햄릿 : 오필리어가 죽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햄릿의 광증에 맞춰서 비참하게 죽어줘야죠. 그래야 비극이 되지요. 그래야 극이 끝나지요. 로미오는 없어요. 죽었어요, 줄리엣도 없어요. 죽어야 된다구요. 근데 안 죽었어…
(……)
오필리어 : 금 밟지 말아요. 내 자리로 넘어오지 말라구요.
햄릿 : (사이) 안 넘어가요. 누가 넘어가요? 내가 왜 넘어가요 거길.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목숨이 경각에 달렸소 나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요. 그것이 문제인 것만으로도 머리통이 바스라질라 그래서, 힘들어서… 나도 그 자리로 안 넘어가. 못 가.
오필리어를 향한 애틋한 햄릿의 마음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눈물겨우리만큼 무력합니다. 마음먹고 술기운을 빌려 고백도 해 보고, 때로는 제풀에 지쳐 무기력하게 무너져 봐도, 오필리어와 햄릿의 떨어진 몇 발자국은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아요.
왜, 있잖아요…… 사랑을 하다 보면, 아무리 사랑해도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실감하는 그런 순간이. 그래서 지구가 돌고, 계절이 돈다는 것마저 원망스러운 순간. 지구와 달이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의 봄과 나의 가을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는 걸 깨닫는 사이. 봄과 가을, 겨울과 여름 사이에는 천만 광년만큼의 거리가 있는 거라…… 뭐 그런 말이죠. 사랑하는 이의 과거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에 여전히 갇혀있음을 볼 때 사랑은 무척이나, 무력해집니다.
이 안쓰러운 햄릿 이야기의 끝을 살짝 보자면, 그는 끝내 오필리어를 줄리엣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합니다. 극이 끝날 때까지도 오필리어는 줄리엣과 오필리어와 김은옥 사이의 그 무엇으로 남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안타까운 햄릿의 사랑을 그저 흔한 짝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봄과 가을 사이의 천만 광년이, 햄릿이 기어코 좁히지 못하는 오필리어와의 몇 발자국이, 당신과 나를 영영 분절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건 왜일까요?
아프지 말라는 말에 아파할 줄 안다면
햄릿 : 오, 오필리어. 어제 길을 지나던 중이었소. 길가 담벼락 너머로 막 피어나던 목련꽃이 내게 말을 걸었소.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내가 아팠던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오. 다만 목련이 날 보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뿐. 햇살에 눈을 찌푸린 내가 찌푸린 얼굴로 목련을 올려다보았을 때,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목련은 막 꽃봉오리를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소. 세상에 이 세상에 꽃을 피워내려 안간힘을 쓰는 목련보다 더 아픈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근데 날더러는 아프지 마라 하더이다. 자기가 더 아프면서. 목련이 내게 주는게 그게 무엇이오. 그 아픈 목련이 내게 하는 걱정의 말이 그게 도대체 무엇이건대 내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지더냔 말이오. (사이) 오, 오필리어, 숲의 여신이여. (사이)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아프지 말아요.
지구와 달이 닿지 못할 거리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달이 없어진다면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게 되고, 기후도 계절도 엉망이 된다고 하지요.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빛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 정도의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같은 역학관계로 서로의 궤도를 교차하고 있습니다. 달이 그 거리에 그 정도의 힘으로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안정적으로 자신의 궤도를 돌 수 있다는 거죠.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봄과 가을은 어떻게 해도 만날 수가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가을이 없으면 겨울도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없으면 봄도 오지 않구요. 우리는 늘 어느 계절에 서서 맞은편의 계절을 그리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햄릿의 봄이 혼자만의 봄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밥을 먹다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군가의 아픔이 바람마다 묻어있어서, 백번 천번 만번 쌓인 그리움이 당신을 만지고 있어서입니다. 나를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아플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좌표는 사실 그런 겁니다. 다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면 나도 나의 좌표를 상실하고 마는. 그렇기 때문에 햄릿과 오필리어는 설사 몇 발자국의 거리가 아니라 천만 광년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 말라는 그 말이 아프다고 오필리어가 느낀다면, 그건 햄릿의 아픈 그 말이 천만 광년을 건너온 그리움으로 그녀를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오필리어의 시간은 겨울의 어느 밤을 지나고 있고, 그녀는 얼어붙은 스스로의 아픔으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지 말라고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가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아차렸다면, 그래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이미 살며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지요. 차갑게 얼어붙어있던 달빛에 살얼음이 부서지고, 그곳으로 슬며시 아침이 드는 그런 겨울과 봄의 사이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녀가 봄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몇 발자국 뒤의 햄릿 역시 같은 봄의 시간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햄릿의 사랑이 가엾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이유입니다. 옆에 있지 않아도,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첫번에 못 만나고 두 번에 못 만나서 백 번 천 번 만 번의 그리움만 쌓인대도 좋은 이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박수를 쳐 줍시다. 그 모든 사이에 있는 아픈 이들에게. 가을과 봄에게, 지구와 달에게, 햄릿과 줄리엣에게, 그리고 저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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