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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민음사, 1998, 38쇄)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삶과 정신, 그 사이의 예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는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은 북부 독일의 상업도시 뤼벡의 유서 깊은 만(Mann)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문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설 속 크뢰거 가문도 명문이지만, 아버지 대에서 허물어지고 와해되는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또한 소설 속 토니오 크뢰거와 동일하게 토마스 만도 아버지는 냉정한 북부 독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감수성이 풍부한 남미 출신이었다. 토마스 만은 소설 속에서와 같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이 소설은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답게 삶과 예술 사이의 고민이 나타나있다. 토니오는 삶과 예술 사이에 놓인 중간자이다. 이는 토니오 크뢰거의 이름과 외양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씨는 명문가인 크뢰거이지만, 이름은 “이국적으로 들리는” 토니오이다. 생김새는 “아주 남국적으로 날카로운 윤곽을 하고 있는 갈색빛이 도는 얼굴”이다. 삶과 예술 사이에서의 갈등을 소설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통해 해결을 향해 나아간다.
9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소설은 구성에 따라 크게 세부분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1-3장으로 삶을 쫓는 것에 번번이 실패하는 토니오의 유년시절이다. 두 번째 부분은 4-5장으로 인간적인 삶을 떠나 예술의 삶을 살면서 점점 지쳐가는 시기이다. 마지막 6-9장은 덴마크로의 여정을 떠나면서 그 사이의 합(合)을 추출해내는 과정이다.
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삶’과 ‘예술’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토니오 크뢰거」는 190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의 경우 삶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는 데카당스의 예술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의 예술은 삶의 정반대 지점에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삶으로부터,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소설은 이를 토대로 철저하게 ‘예술’을 대변하는 인물로 아달베르트를 등장시킨다. 아달베르트는 인간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봄을 욕하면서 등장한다.
봄은 가장 추악한 계절임에 틀림없습니다! 크뢰거 씨, 당신의 피 속에서 무엇인가가 점잖지 못하게 곰지락거리고 가당치도 않은 선정이 요동을 치며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데도, 당신은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나요? 그런데도 침착성을 유지한 채 아주 미세한 핵심적 효과를 위해 작품을 다듬을 수 있단 말입니까? (중략) 그래서 나로 말하자면 이제 카페로 갑니다. 거기는 계절의 변화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지역이니까요. 아시겠어요? 말하자면 그곳은 문학적인 것을 위한 선경이며, 고귀한 착상들만을 떠올릴 수 있는 고상한 영역이란 말입니다. (42)
아달베르트는 삶과 동떨어진 예술의 기질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카페로 향하게 된다. ‘카페’는 인간외적이고 비인간적인 예술의 공간이나, 토니오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자친구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를 찾아간다.
리자베타를 찾아간 토니오는 결국 자신이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백”한다.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어야 할 예술가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유죄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토니오는 “이것은 자백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토니오의 자백을 받은 리자베타는 그에게 예술가가 아닌 시민, 다시 말하자면,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유년기 시절에 ‘삶’에 속하지 못하고, 작가로 성공하였지만 ‘예술’에 속하지 못하자, 그는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 이 여정은 그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들러 덴마크를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는 고향은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토니오가 13년 만에 고향을 향하는 것은 시작점으로의 ‘회귀’일 수 있으나, 고향을 경유해서 가는 그의 여정은 ‘회귀’보다는 ‘또 다른 출발’이라 생각하는 편이 더 적당한 비유일 것이다.
고향에 들른 토니오는 옛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옛집은 그가 기억하는 삶의 흔적이 사라지고 시민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으로 가득 채워진 집은 정신에 의해 삶이 축출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선 떠날 채비를 하는 토니오는 경찰에게 붙들려 범죄자로 의심받는 수모를 당한다. 예술가에게 시민이라고 선고받고, 시민에게는 범죄자로 의심받는 중간자인 토니오는 착잡한 심경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휴양지 알스가르트의 호텔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토니오는 호텔에서 유년시절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한스 한젠과 잉에보르크 홀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달베르트가 ‘예술’을 상징한다면, 한스와 잉에는 ‘삶’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밝고 강철같이 파란 눈과 금발을 한”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한스의 파란 눈과 잉에의 금발은 ‘삶’을, ‘어머니’의 검은 머리와 ‘리자베타’의 갈색 머리와 검은 눈은 ‘예술’을 나타낸다.) 이들을 다시 마주한 토니오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너무도 인간적인 그들을 여전히 강렬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가 가진 ‘시민적 사랑’에 기반한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조금은 길지만, 그가 삶을 배재한 예술, 예술을 배재한 삶 사이에서 깨달은 바가 나온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본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리켜 냉정하다거나 동경이 없다고 말하는 당신들 미의 숭배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애초부터, 운명적으로 타고난 모종의 예술가 기질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동경보다도 일상성의 환희에 대한 동경을 가장 달콤하고 가장 느낄 만한 동경으로 여기는 그런 심각한 예술가 기질 말입니다.
나는 위대하고도 마성적인 미의 오솔길 위에서 모험을 일삼으면서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냉철한 자들에게 경탄을 불금합니다. 그러나 난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 문사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 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106-107)
그동안 그가 겪었던, 그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었던 예술은 삶과 괴리된, 정신만을 표현한 예술이었다. 그동안의 예술이 정신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제 토니오는 전혀 새로운 예술, 삶과 정신을 이어주는 예술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은 삶과 정신 사이의 중간자였던 그만이 깨달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다.
앞부분에서 말했다시피 이 소설은 토니오 크뢰거의 자전적 소설이다. 당시의 삶과 유리된 데카당스 문학의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꽤 많은 고민을 기울인 듯하다. 그리고 그는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린 듯하다. 토마스 만이 처음에 생각한 이 소설의 제목은 ‘문학’이었다고 한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더 명확히 드러나는 제목이다. 현실에서 한발짝 물러나있던 토마스 만의 초기의 문학관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함께 생각한다면 소설을 한결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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