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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출판사, 2004)를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는 것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사진의 이중성
사진은 틀을 가지고 있다. 보통 당신의 앨범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네모난 틀 말이다. 그렇기에 사진을 찍으면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틀 안에 있는 세상, 다른 하나는 틀 밖에 세상. 틀 안에 있는 세상은 객관적인 세계이다. 조작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틀 안에 묘사된 모든 것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 그 곳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객관적인 자료이지만, 또 그렇기에 사진은 명백히 주관적인 자료이다. 틀 밖의 세상을 배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전부를 볼 수 없다.(물론 사진이 아니더라도 ‘전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사진작가가 의도한 때와 장소를 사진작가가 의도한 각도로 바라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진을 볼 때에는, 사진의 틀을 자세히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의 틀 바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오늘 글의 소재인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도 이러한 맥락에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어떤 대상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사진은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가장 흔한 분류를 생각해보자. 당신의 디지털 카메라를 보라. 그곳에 상세히 적혀있을 것이다. 인물 사진이나 풍경 사진과 같이 찍히는 대상에 따라서 사진을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조금 특이하게 사진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따라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사진,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쓸쓸함을 자아내는 사진 등등. 조금 추상적이고 모호한 기준이지만, 이것 나름대로 좋다. 방금 우리가 지어낸 분류대로 이야기하자면 오늘 볼 사진의 종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되겠다.
연루되지 않음에서 나오는 연민
당신도 연민을 일으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왜냐하면 그러한 사진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얼마 전에 지하철역에서 그러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지하철역 한 켠에 아프리카 기아를 위한 서명과 모금 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었고, 그들이 전시한 사진 속에는 등에 상처자국이 자욱한 아이, 살이 모두 빠진 채 배만 불룩한 아이 등이 찍혀있었다. 그러한 사진을 맞닥뜨린다면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일지라도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꽤나 자주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 사진 속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서 나는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연민의 감정을 느껴 서명을 하고 기부를 하는 것도 사진 감상의 좋은 방법이자 세계를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의 틀 안을 바라본 경우이다. 그러한 감상을 마쳤으면, 이제는 사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이 사진이 보여주지 않은 것을 생각해볼 시간이다. 수잔 손택은 이러한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진 1 : <학살된 투치족의 시체>, 사진 2 : <시에라리온 내전의 희생자>(곧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10)
수잔 손택은 이러한 설명과 함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연민’을 공격한다. 연민은 자신이 이미지 속의 고통에서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연민을, 착한 의도에서 나오지만 “어느 정도 뻔뻔한 혹은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동의할 수 있는가? 만약 동의가 어렵다면 조금 더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보자. 당신이 보는 TV에서 내전으로 인하여 팔이 잘린 아이가 배고파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다. 당신은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집어 먹으면서 그 고통스러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마를 한껏 찡그린 채 말이다. 이미지 속의 대상(팔이 잘린 아이)과 이미지의 감상자(감자칩을 먹는 당신) 사이에 숨어있는 모종의 권력관계가 보이는가? 수잔 손택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연민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말해준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54)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동안 많이 궁금했다. 저 멀리에 있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우리가 관음증과 같이 염탐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저 나만의 착각이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었고, 이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시 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진에 나타난 틀 안에 세상이 있다면, 당연히 사진에 드러나지 않는 틀 밖에 세상이 있다. 수잔 손택은 이야기한다.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연민만을 베푸는 것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혼자만의 위안이라고. 이미지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은 이미지 속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자신하지 말자. 틀 밖에 세상을 한 번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한 틀 밖의 세상은 조금씩 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 글에서 『타인의 고통』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 아니다. 책에는 본 글에서 말한 이야기 말고도 더 많은 이야기(가령, 전쟁에서의 사진이 어떻게 쓰이는지, 대중에게 공개되는 사진의 적정 수준에 대한 논의, 사진 속에서 이름이 아닌 대표 이미지로 사용된 사례 등등)가 나와 있다. 책에 쓰여진 많은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이 글이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는 하나의 짐검다리가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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