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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김애란의 단편모음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 25쇄) 속의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문단의 인용은 들여쓰기 후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상대방을 대면하는 첫걸음, 노크
‘노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이러한 장면이 떠오른다. 문 앞에 누군가 서있고, 그 누군가는 ‘노크’를 한다. 약간의 부스럭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 열리고, 문 건너편의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문을 사이에 두고 눈동자와 눈동자가 대면한다. 이러한 상상 속에서 노크는 문 건너편 사람에게 다가가는 첫 발자국 같은 것이다. 나의 상상이 김애란 작가에게도 어느 정도 공감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보고나서 든 생각이다.
주인공은 한 층에 5개의 방이 있는 집에 세를 들게 된다. 그녀는 ‘1번방 여자’가 된다. 얼마가지 않아 그녀는 이 곳에 사는 여자들은 서로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같이 사는 여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이름을 모르기에 주인공은 소설 내내 이들을 몇 번 방의 여자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점차 같이 사는 여자들을 알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들의 습관이나 물건들을 통해 추측한 모습이기 때문에, 알아간다는 것보다는 추정해간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가끔 나는 내 앞방에 사는 거구의 여자가 널어놓은 헐렁한 면팬티를 보고, 일곱시면 일어나 출근을 하는 옆방 여자가 방문 앞에 묶어놓은 쓰레기봉투를 보고, 자정이 지나면 각각의 방문 앞에 놓이는 슬리퍼들을 본다. 끝방 여자의 슬리퍼는 안창이 볼록볼록한 지압용 슬리퍼라는 것은, 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3번방 여자는 지나치게 이불을 잘 빠는 것 같고, 5번방 아가씨는 빨래를 세탁기에 담가놓고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225)
주인공의 추정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추정은 여자들에 대한 나름의 선입견으로 굳어지게 된다. 각 방의 여자들은 주인공에 의해 점점 구체화된 모습을 띠게 된다.
그녀들의 얼굴을 본 적은 없어도 나는 선입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고 있었다. 가만 보면 씻은 후 머리카락을 치워놓는 사람은 언제나 그랬고, 안하는 사람은 죽어도 안하는 것 같았다. 남들 출근시간에 욕실에 들어가 한시간은 족히 씻고 나오는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인 것 같았고, 샤워 후 좌변기를 젖게 만들어 앉을 때 불편을 주는 사람도 항상 그 사람인 것 같았다. (229)
밤마다 자기 방에서 엠티라도 여는 듯한 4번방 여자의 소음. 내가 보일러 온도를 내릴 때마다 다투듯 온도를 다시 올려놓는 3번방 여자의 이기심. 빨래를 걷어주는 것을 싫어하면서, 자기가 걷는 것도 아닌 2번방 여자의 게으름.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너무 커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5번방 여자의 덜렁댐. (230)
그러던 순간 사건은 일어난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주인공의 속옷 몇 개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신발도 도난당한다. 그녀는 같이 사는 여자들 중 도둑이 있는 건 아닐지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며칠 뒤 사라졌던 신발이 ‘자신의 방’ 한가운데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부의 소행이라 확신한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모두 나간 사이에 각 방을 몰래 확인해보기로 한다. 열쇠가게에 연락해 5번방 문을 딴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만다. 생리중에 흘린 피가 까맣게 말라 있는 아이보리색 요 한 채의 모습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방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놀란 주인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방 열쇠로 나머지 방들을 열어본다. 너무 자연스럽게 방들이 열리고 그 방들도 자신의 방과 완전히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녀는 방 안에서 공포감에 떨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맨 앞에서 밝혔듯이 노크는 어찌보면 상대방을 대면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직접 대면한다는 것, 혹은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조금은 과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이를 인정한다면 노크는 한 사람의 존재를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노크가 없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물건들로 추정할 뿐이다. 추정은 단단한 모양을 갖추어 선입견이 되고, 그 선입견을 통해서 주인공은 다른 여자들을 규정한다. 하지만 타인을 규정한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규정되는 대상이다. 존재가 제거된 대상들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보여진다. 타인이 나와 같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5층이라는 어중간한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묻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또 하나 살펴볼 점은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5개의 방의 주인들은 포스트잇을 사용하여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이다. ‘ 내 옷에 손대지 마시오.’ 또는 ‘방에서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조심합시다. 우리 모두를 위해.’ 또는 ‘나갈 때 꼭 문을 잠그고 나갑시다. 신발 도둑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밤 열시 넘어서는 세탁기를 돌리지 맙시다.’ 사회적 규범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문장들이다. 이러한 문장들을 통해 곳곳에 붙어있는 사회적 규범과 이를 통해 규범화 된 개인을 보여준다. 규범에 맞춘 개인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책장에 꽂힌 음반의 목록에서도 나타난다. "서태지, 김현철, 이승환, 너바나, 비틀즈 등"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취미나 취향에서도 그들은 개성이 사라진 대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자.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다만 주의력이 좋은 여자였다면 누군가 한 명은 아침에 내가 화장실 앞에 처음으로 붙여놓은 ‘미안해요. 무서워서 그랬습니다’라는 포스트잇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순간 하고 있었다는 기억뿐이다.'(244)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포스트잇에는 사회적 규범이 아닌 개인의 감정이 담기고, 노크는 아닐지라도 소통의 의지가 나타난다. 그에 따라 주인공 역시 규범화된 대중에서 자신의 감정을 가진 개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아마 주의력이 좋은 여자가 있다면 그 포스트잇을 읽고 1번방 여자의 문을 두드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몇 번방 여자로 불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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