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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을 독자로 하기에 다량의 스포일러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의 인용 쪽수는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창비, 2007) 속의 중편소설 「몽고반점」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만을, 문장 전체 인용은 작은따옴표 표시와 함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했습니다.
현대사회 그리고 원시성
한강의 중편소설 『몽고반점』은 인위적이고 이성적인 현대사회에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원시성을 동경하는 주인공이 파멸을 겪는 과정을 적어놓은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조금 특이한 점은 현대사회와 원시성이 등장인물이 되어 등장했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현대사회를 대표하고, 주인공의 처제 ‘영혜’는 원시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주인공의 처제인 ‘영혜’는 어른이 되어서도 엉덩이에 푸른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 자연스레 사라지는 몽고반점은 순수했던 시절의 징표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몽고반점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혜가 문명의 시대를 살면서도 아직 원시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몽고반점뿐만이 아니다. 예술가인 주인공은 영혜를 처음 본 순간에서도 어떤 원시성을 감지한다.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78)
그런가 하면 주인공의 아내와 장인은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내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굉장히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내는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솔직한 감정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아내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갑갑함을 느끼며 비인간적이라 생각한다. 아내가 현대사회의 이성적인 면을 보여준다면, 장인은 현대사회에 감춰진 폭력성을 나타낸다. 장인은 소설을 통틀어 몇 줄의 분량만을 차지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이다. 가장 이성적이라는 현대사회의 폭력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이 소설의 독특한 면은 원시성이 동물적인 모습이 아니라 식물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강 작가 특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시성을 나타내는 영혜는 채식주의자의 모습으로, 꽃을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원시를 떠올렸을 때, 우리는 야생의 동물과 같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만큼은 원시를 야만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것으로, 폭력적인 모습이 아닌 평화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현대사회를 나타내는 장인의 모습이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우리에게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본 원시가 아닌, 새로운 원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난 부분 중 하나는 현대사회가 원시성과 맞닥뜨렸을 때의 모습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는 현대사회가 원시성을 다루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매끄럽게 보기 위하여 소설 속 순서와는 다른 배열로 장면들을 살펴보겠다. 처음으로 볼 장면은 주인공이 온몸에 꽃을 그린 뒤에 영혜와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
그는 섹스 도중 "어디선가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을 계속하여 듣게 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것이 자신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지금까지 섹스할 때 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교성은 여자들만 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8) 이 장면은 현대사회가 원시성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영혜와의 섹스를 통해 그동안의 섹스는 이성의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섹스의 순간은 한 개인이 가장 본능적이고 원시적으로 변하는 때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섹스는 어떠해야 한다’와 같은 이성의 통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볼 장면은 원시성을 맞닥뜨린 아내의 반응이다. 며칠 전 영혜의 집을 다녀온 주인공은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아내와 격렬하게 섹스를 하게 된다. 평소와는 다르게 격정적인 섹스가 끝난 후 그는 돌아누운 아내의 중얼거림을 듣는다. ‘무서워요.’ 아내는 조금 흐느끼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원시의 모습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만다. 원시의 모습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잊혀진 모습, 이성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한다.
첫 번째 대응방법은 원시의 모습을 자신과 같이 문명화된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지만, 주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해진다. 소설은 채식 문제로 처제와 다투는 장인의 모습을 통해 이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처가 식구들은 고기를 유난히 즐기는 편인데, 처제가 어느 날부턴가 채식을 한다면서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장인을 비롯한 모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처제가 딱할 만큼 말라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녀를 심하게 나무란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의 장인이 반항하는 처제의 뺨을 때리고, 우격다짐으로 입 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은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81)
한강의 소설에서 육식은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장치이다. 오로지 먹기 위한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하고 포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상징인 듯하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멈추지만 장인은 이를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는 원시성을 마주한 현대사회가 힘의 우세를 통하여 원시의 대상을 문명화하려는 모습이다.
또 다른 대응방법은 원시의 모습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내의 행동은 이러한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내는 자신의 동생과 자신의 남편이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남편에게 침착하게 말한다. “구급대를 불러놨어요.”,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소설은 그 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은 베란다에서 햇빛과 교접하려는 듯 서있는 영혜를 묘사하며 끝난다. 그러나 그 후에 앰뷸런스가 도착하여 그들을 태울 것이고, 그들은 정신병원에 감금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보낼 것이고, 원시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격리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잿빛 도시에서 우리는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낀다. 갑갑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시의 자연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길가를 따라 빼곡이 가로수를 심고, 비싼 땅 한 가운데 넓은 공원을 만든다. 아름다운 색을 머금은 꽃과 높이 뻗은 나무를 보며 갑갑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트인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들이 자연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일렬로 수놓은 가로수와 계획적으로 조성된 공원은 그야말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 누군가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날 것의 원시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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