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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김연수 소설집『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 속의 중편소설「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세계의 끝을 넘어선다는 것
‘우일월정과설산(又一月程過雪山).’ 왕오천축국전 70행에서 71행에 걸쳐있는 말이자 지금 이야기 할 소설의 제목이다. 김연수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우일월정과설산’을 한글로 풀어 쓴 제목이다. 제목에서부터 이 글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이 설산의 이름은 낭가파르바트이다. 파키스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해발 8,125m의 봉우리로, 전 세계 8,000m급 고봉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다.(『시사상식사전』, pmg지식엔진연구소, 2012 참조 및 변형) 낭가파르바트를 이야기하려면 이 설산이 위치한 길기트 지역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다음 두 문단은 소설에 나온 길기트 지역에 대한 설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발률은 대발률과 소발률, 두 개의 나라로 나뉜다. 대발률은 지금의 인도 북부 발티스탄 지역에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인도에 속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 지역에 있던 소발률은 세계의 경계였다. 동서남북 어디서 바라보든 이 지역은 그들이 아는 세계의 끝이었다. 소발률은 서쪽으로 아라비아인 대식국, 남쪽으로 인도인 천축국, 동쪽으로 티베트인 토번국, 북쪽으로 중국인 당에 접해있었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온 알렉산드로스가 마침내 도달한 세계의 끝도,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고선지가 결국 이르게 된 세계의 끝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 혜초에게도, 이븐 바투타에게도 소발률은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109)
“(전략)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이 소발률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소발률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아랍과 인도와 중국과 티베트의 문화가 혼재했다.’ 모든 나라에게 소발률 너머는 이방의 땅이었다. 거기가 바로 지금 내가 가는 곳이다. 모든 게 혼재하는 곳, 수령과 백성을 버려두고 왕 혼자서 도망간 곳.” (113)
설산은 단지 눈 덮인 산이 아니다. 모든 것이 혼재되어있는 소발률, 그 곳에서 우뚝 솟아있는 세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 게다가 세계의 끝이라 함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제목을 더듬어보자.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소설의 주인공 격인 ‘그’는 실종되기 직전 제4캠프에서 등반일지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쓰고 정상을 향해 나선다.
8,125m나 되는 고봉을 오르는 사람들의 목표는 모두 같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출발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목표 역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넘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의 끝인 설산을 넘어 그는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그는 어느 곳에 도달하여 무엇을 보게 될까.
설산을 넘어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소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소설의 표현을 빌자면, 설산 너머에 대해 문장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이 없는 자리에는 주석만이, 기억이 없는 자리에는 추측만이 대신할 뿐이다. 그가 등반일지를 다른 사람의 배낭에 밀어넣고 떠난 것에 대하여, 원정대의 소식을 실은 유일한 신문은 짤막하게,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나’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힘껏 추측해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나름의 추측을 덧붙여 본다.
추측을 위해 살펴볼 것은 ‘그’가 새 공책을 사면 뒷면에 언제나 적어 넣었다던 릴케의 글이다. 이는 다음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 이런 면에서 인류가 비겁해진 결과, 삶에 끼친 피해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환상’이라고 하는 경험, 이른바 ‘영적 세계’라는 것, 죽음 등과 같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들이, 예사로 얼버무리는 사이에 우리 삶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는 사이 그런 것들을 느끼는 데 필요한 감각들은 모두 퇴화되고만 것이다. 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111-112)
‘환상’, ‘영적 세계’, ‘죽음’은 인간이 얼버무리는 사이 인간이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환상’을 느낄 수 없었고, 다만 환상과 현실이 섞여있는 곳에서 문득문득 그 존재를 인식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에 매료되었다. 그가 모든 것이 혼재되어있는 길기트 지역, 즉, 소발률로 떠난 것은 분명 그 혼재되어있음 때문일 것이다. 그 곳에서 그는 세계의 끝인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는 것이다. 이 세계의 끝, 다시 말하자면 진실의 끝이자 현실의 끝, 그리고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나는 추측해본다. 그는 제4캠프를 지나 진실의 끝, 현실의 끝, 삶의 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라고. 그리고 거기서 내 추측은 더 나아가본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인 세계의 끝에서 조금 더 밀고나갔을 것이라고. 진실을 넘어 거짓으로, 현실을 넘어 환상으로, 삶을 넘어 죽음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조심스레 덧붙여본다. 설산을 넘은 그는 거짓 속에서 사실로는 알 수 없던 진실을, 환상 속에서 현실 너머의 현실을, 죽음 속에서 진정한 삶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설산』에 대한 또 다른 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 http://seesunblog.tistory.com/28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낭가파르바트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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