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주의사항 ※

① 이 글은 책을 읽으신 분들에 맞춰 쓰여졌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② 이 글은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승옥 소설전집1 무진기행을 참고했습니다.

③ 문장 일부의 직접 인용은 큰따옴표 표시를, 문장 전체 인용이나 간접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했습니다.




선택으로부터의 도피




   
무진기행에 대한 이 글은 소설의 끝 문장에서 시작하려 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희중은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웠을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함


   서울에 사는 윤희중은 아내의 부드러운 강요로 무진에 내려오게 된다. 서울과 무진. 이 둘은 많은 측면에서 대립 관계를 갖는다. 현재 사는 곳과 과거에 살던 곳, 세속적 삶과 소박한 삶 등등. 따라서 도시와 시골이라는 대립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답변이다. 무진은 도시의 정반대 축에 놓인 시골이 아니다. 이는 버스 안 시찰원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무진에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구도 오륙만 명으로 6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나 많다. 도시는 전혀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무진이다.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안개’와 ‘반수면상태’는 이러한 무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무진의 명물인 ‘안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하는 모호성을 띤다. 또한 ‘안개’는 일반적으로 잘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의 흐릿한 시야를 만들어낸다. ‘반수면상태’도 마찬가지다. 글자 그대로 수면에 든 상태도, 들지 않은 상태도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르면 무진을 도시의 대립항인 시골로 보는 것보다, 도시에도 시골에도 속하지 못하는 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윤희중은 왜 무진으로 온 것일까? 간단하다. 그가 무진을 닮았기 때문이다. 무진처럼, 윤희중 역시 서울에서의 삶과 무진에서의 삶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 서울의 삶을 동경하여 무진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지만, 그는 서울의 세속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장인영감이 그를 세속적인 삶에 편입시키려는 장면(182)을 떠올릴 때, 그는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무진을 닮았고, 무진도 그를 닮았다. 그렇기에 새출발이 필요할 때, 다시 말하자면 어딘가에 속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 무진으로 가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제 그 짧은 시간에 윤희중이 하인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윤희중은 하인숙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의 세무서에 처음 간 날, 윤희중은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 사이에 있는 하인숙을 보게 된다.(173-174) 또한 시간이 더 지나면서 순수한 ‘박’과 세속적인 ‘조’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하인숙을 발견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두 남녀는 서로를 알아보고 이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으로부터의 도피


   이제 윤희중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보자. 그는 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자신이 어느 곳에 속할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택으로부터 도피하였다. 소설 속에 나오는 첫 번째 선택 도피는 6·25전쟁 참여다. 중학교 상급반 학생들까지 전장에 나갈 때, 그는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있었다. 윤희중은 괴로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모든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넘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학생인 그는 충분히 어머니의 감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추측해 본다면, 폐병을 가진 자신이 전쟁에 나가면 죽을 확률이 크다는 것과 어머니를 홀로 두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 불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윤희중은 어머니의 감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감금이 미칠 지경에 이르도록 부당하다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기에 고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선택으로부터의 도피는 세속적인 삶과 관련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세속적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희’와 헤어진 후, 부유한 집안의 과부와 결혼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부유한 집안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을 전무로 만들려는 장인어른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는 책임을 져야하는 선택은 회피하면서, 책임을 탓 할 사람들 - 어머니, 아내, 장인어른 - 을 만들어놓고 그들에게 회의적인 시선만 보낸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175) 그는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속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어쩌면 이것이 윤희중이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윤희중은 선택으로부터 도피하며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전보의 눈을 피하여”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193-194)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하고 책임 질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권유나 강제가 아닌 오롯이 스스로 하는 선택. 그는 편지를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그리곤 결국 버리고 만다. 갈등 끝에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다. 그는 한 번 더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유나 강요에 의한 선택이 가져온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하지만 그는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내의 급한 전보로 인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제 윤희중의 부끄러움에 대해서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부끄럽다.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서 갖게 되는 무책임 때문에, 선택으로부터의 도피로 점철된 자신의 삶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젊은 날의 김승옥 (출처 :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