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근의 시네마 폴리티카: Aestheticá Politica

 

변덕 많고 참을 성 없는 김근근이 또 다시 새로운 코너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치와 영화를 연결해 본다고 하는데요, 기대가 많이 되지는 않겠지만 한 번 지켜봐 줍시다용.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쓸 수 있을지.

 

 

예술은 사회적 가치의 감성적 배분이다.”- 김근근

 

인간 활동의 근본적 목적은 희소한 사회적 가치의 배분이다. 사회 현상은 제한된 수의 가치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이동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행위들의 지속적 흐름이다. 이 때 사회적 가치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대상인데, 그러한 가치물은 돈이나 옷, 집과 같은 구체적인 물체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 심지어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것도 포함한다. 그러한 가치물의 분배 과정을 둘러싸고 경제, 정치, 문화, 심지어 예술이라는 인간 활동의 기본적인 양식이 출현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희소한 자원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출현한다. 개인들의 일차적 관심은 가치를 전유(專有)하고 향수(享受)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타인보다 먼저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가치를 빼앗기 위해 경쟁한다. 약탈과 야만, 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배 과정이 구조화되어 상대적인 안정성과 예측성을 갖게 만드는 대안적 방식이 필요하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인간적 제도들이다.

 

첫 번째는 관습이다. 한 사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관습에 따라 가치물을 적절히 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신분제 질서, 장자상속 등 직접적으로 가치배분과 연관되는 관습들 뿐 아니라 노인 공경, 효도, 종교 제례 등도 넓은 의미에서 가치 배분의 한 방식이다. 다시 말해 관습이란 가치 있는 또는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물들이 어떤 사람 혹은 지위에 올바르게 귀속되도록 하는 일련의 공유된 규칙들이다. 이러한 관습의 총체를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교환이다. 한 개인이 가진 가치를 다른 개인에게 양도하고 새로운 가치물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교환의 두 당사자가 교환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교환은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치의 배분 방식일 것인데, 이러한 교환의 총체를 우리는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세 번째는 명령이다. 누군가 강제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분배 메커니즘이다. 관습이 참여자들의 일반적 합의를 반영하고, 교환이 형식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명령은 필연적으로 강제력에 기반한 지배와 복종을 수반한다. 이러한 명령의 총체인 정치는 아마도 정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일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표현에 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정치는 관습이나 교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시급한 공동체의 문제에 관여함으로써 두 제도의 경직성을 보충한다.

 

그런데 결코 관습적이지도, 교환에 따르지도, 누군가가 명령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인간의 내적 동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치배분이 있다. 나는 이 것을 가치의 감성적 배분sensible allocation of values’, 다시 말해 예술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다른 세 방식에 비해 간접적으로만 가치 배분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은 오히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가치의 배분뿐 아니라 재정의와 전복까지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예술이란 다른 어떤 제도화된 규칙에도 따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가치배분에 개입하는 것이다. 좋은 시장경제가 교환의 방식을 통해 합리적인 가치의 배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좋은 정치가 공동체에 필요한 부분에 명령을 통해 가치를 배분하는 것이라면, 당연하게도 좋은 예술은 감성을 동원해 사회적 가치를 배분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 것이 기존의 가치체계를 전복하는 것이든, 관습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든, 시장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이든,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든, 예술은 (예술가가 의도하였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감성을 매개로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

 

 

 

 

정치적 예술은 정치적 위기의 대리적 표현이다.” - 김근근

 

잠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인용해 보자.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 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강조는 김근근)

 

일반화하면 정치적 예술은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으로 등장한다. 정치가 시각적 스펙터클에 몰두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예술은 정치를 발언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도덕적 책임에서 해방되어 순수한것이 될 때, 예술은 권위를 상실하고 탐미적 사소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정치적 예술에 주목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위기를 메타적으로 읽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가 감각적인 것이 되어 쇠퇴하는 동안, 예술은 정치적 장소로 귀환해 깃발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문학은 아니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 것은 근대문학이 표현해 온 근대적 정치성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소설로 혁명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기도 했다. 근대문학의 무덤 위에 등장한 것은 미적 언어의 기만이었다. 문학이 정치적/윤리적/지적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던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 그 잔영과 흔적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빈자리는 이제 탐미적 언어가 차지한다.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하고, 사소한 불행을 미화하고, 공허를 치장하고,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하는 새로운 문학! 이들에게 근대문학의 죽음은 별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데, 혁명 대신 위스키가 있으며, 브래지어 위를 흐르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예술의 귀환을 바라며, 시네마 폴리티카” - 김근근

 

근대문학의 죽음은 근대적 정치성의 해소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것은 해소가 아니라 봉합과 지연일 뿐이었다. 오히려 정치적 위기는 화려하게 부활해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근대적 정치성의 재림으로 보든, 탈근대적 정치성의 기획으로 보든 상관없이 말이다.

 

시네마 폴리티카는 바로 그러한 조망 아래 펼쳐진다. 희소가치와 예술의 전복성. 정치적 위기와 정치적 예술의 귀환. 활자의 죽음과 스크린 시대의 도래. 공동체에 대한 메타 비평. 역사, 진보, 변혁,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 영화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파시스트들이 영상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전쟁의 참혹성을 미화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정치의 예술화에 맞선 예술의 정치화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시네마 폴리티카는 벤야민의 테제에 따라 일련의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다. 나아가 영화가 그리는 사회에 대한 메타적 비평을 통해 영화와 정치를 이어보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시네마 폴리티카! 에스테티카 폴리티카! 휘바휘바! 개봉 쑨!!

 

 

 

, 끈기 있게 써나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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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근히 살아서 김근근인 역사/정치학도.

작품을 감상할 때면 주제보다도 시대와 맥락에 과도한 흥미를 느끼는 변태.

치킨과 두부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