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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오늘은 전경린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이 소설 중 제가 가장 인상깊게 남은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다’.
참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사랑한 사람의 얼굴을 가진다는 거요. 왜,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어쩌면 지금의 당신과 저는 정말로 그 이전 생의 어딘가에서 평생 가장 사랑한 것들의 얼굴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지금 생에서 우리는 또 평생에 걸쳐 어떤 얼굴들을 사랑하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긴긴 생은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을 닮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르게 생각하면 조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 몸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자리로 영원히 수렴해갈 뿐, 결국 이 생에서는 결코 그 자리에 다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랑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곧 내 얼굴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얼굴을 가졌다가, 다시 잃어버리곤 하면서 서로를 향해 뻗은 길 위를 평생 떠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수련이라는 인물이 보내는 스무살의 여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막 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친 수련에게 삶은 불투명하고 추상적입니다. 악취나는 병든 할머니와 말이 안 통하는 부모님을 피해 즉흥적으로 연극판에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녀를 스쳐가는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불안정하게 서성이면서, 스무살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열정을 쥐어짜는 데에 젊음을 소모해야 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지요. 많은 것들이 그녀의 맘대로 흘러가지 않고 그렇게 흘러가게 할 힘도 그녀에게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수련에게는 그녀 자신이 없습니다. 얼굴이 없는 배우처럼, 서로 다른 대본을 갖고 무대에 선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소통하려들기보다는 그저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녀는, ‘수련’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참 많이 닮아 있어요. 수련은 자신을 단단히 받쳐 줄 뿌리도 땅도 줄기도 없이 못 위에 떠 있죠. 그래서 수면에 이는 바람도 그에 일렁이는 물결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떠맡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나라서 나라기보다는 ‘그저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고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인 것’만 같은, 그런 모호한 자기경계를 겹겹이 두르고 그녀는 뿌리 없이 수면 위에 있습니다.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어린 솜털로 자의식의 보호막을 치고, 못의 물방울을 튕겨내면서. 그 떨림 하나에도 예민하게 흔들리며 물결을 빚고 삶의 질곡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녀가 온몸을 떠밀어 만들어내는 물길은 언제 있었냐는 듯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등이 뜯어져 나간 매미의 빈 허물, 모기장 안에서 아사한 고양이의 파삭파삭한 시체, 오래도록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시신 등, 이 소설에는 허물이나 빈 껍데기를 형상화하는 이미지들이 여러 번 겹치며 변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때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의 죽음을 의미하지요. 한때 나였던 것, 내 자리이고 내 껍질이며 내 얼굴이라고 믿었던 것이 산채로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대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몇 번이고 산채로 등이 터지는 아픔을 겪게 되겠지.
다른 여자와 택시에 오르던 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으로 평온과 활기를 되찾던 수련의 가족, 아버지의 거짓된 위로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모두 허물을 쓴 것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산 채로 등이 터질 허물, 자기 자리라고 생각했던,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자기 자리는 없는 그런 삶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로부터 한걸음 비껴 서 있습니다. 그녀의 젊음은 그런 빈 껍질같은 얼굴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 결과 생각에도 없던 무대 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극 준비가 수월히 굴러가지 않는 가운데 연출가인 해경은 사랑하지 않는 처를 피해 수련에게 마음을 기대 오고, 우연인지 장난인지 모를 여러 순간을 지나오면서 그녀는 그의 품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 밤을 계기로 그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멀어지고 맙니다. 그 이후 그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생을 살아가기를 택합니다. 시간에 존재의 얼굴을 새기지 않는 삶의 방식, 수면 위의 물자욱이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책망하지도 않는 그런 삶을요. 해경과 보냈던 스무살의 그 밤을 자신의 생 한가운데 팬 웅덩이처럼 남겨두고요. 그녀는 그와의 밤에 대해서, 그녀의 첫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합니다.
그건 소통이었어. 이 단절된 세계의 틈에 머리를 들이민 밀통이었다구.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소통이었는지, 소통이었다면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는 왜 그것을 소통이라고 부르면서 사랑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하는지. 그들은 그 밤 서로의 얼굴에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이 그녀와 해경의 존재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등을 찢고 살갗을 벗겨내어야 했으며 자신의 삶을 벗고 다른 이의 자리로 또다시 뿌리없이 흘러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 강렬한 사건이었음에도, 그녀는 그 하루를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의도와 악의가 개입된 장난인지, 우연과 필연을 나눌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 무엇은 의무였고 무엇은 욕망이었는지, 그 순간이 혼란이었는지 구원이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자신의 살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살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서로를 닮아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가져가고 또 내어주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죠. 자기자신을 얼마쯤 경멸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바람과 물결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던 수련, 늘 흐릿한 얼굴로 타인을 응시하는 그녀가, 기꺼이 누군가에게로 가 그의 얼굴이 되어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무살 수련의 사랑은 그 하룻밤으로 짧고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이미 스무살에 그녀는 그녀의 길 위에서, 생의 많은 질문들이 미처 답해지기 전에 시간 너머로 가라앉을 것임을 직감했고, 그런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온몸으로 수면을 흔들어 못의 다른 어딘가로 도달해도 사실은 그 어디든 자신의 자리가 될 수 없음을 시인했고, ‘결국 누구나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허무한 깨달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초월과도 같은 담대함’의 시선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련은 인생의 한 점으로 섣불리 삶의 질곡을 통찰하려 들지 않고, 스무살의 사랑을 함부로 사랑이라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그런 시선에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에도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그녀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을지 쉽게 상상되지 않았어요.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다’, 그녀가 그 말을 좀 더 다르게 생각했더라면, 그녀의 이후 삶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결국 사랑이란 서로의 얼굴을 가져가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남기고 가는 것… 저의 얼굴은 당신의 얼굴이 되고 당신의 얼굴은 저의 얼굴이 되는 것이 사랑인 거라고, 저 문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얼굴을 갖는다는 건 다시 말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얼굴을, 다른 아이덴티티를, 전혀 새로운 삶을 갖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생을 얻는 일과 같습니다. 사랑은 그런 일입니다. 또 하나의 생을 얻는 것과 같은 일, 생의 길이만큼 길고 멀고 깊은 그리움을 나누어가지는 일.
저는 당신의 사랑이 궁금해요. 당신이 누구의 얼굴을 어떤 얼굴로 어떻게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군가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하는 만큼이나 당신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했을는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보여졌을지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아꼈나요? 제가 저의 얼굴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을 찢어놓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나요? 우리는 결국 서로 이토록 닮아있는 걸요.
수련의 생각이 맞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평생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존재, 물자욱의 자취도 남지 않는 수면 위에서 길을 헤매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 있는 길이 어떻게든 저와 무수한 당신을 향해, 서로를 향해 뻗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헤매면서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고, 당신의 얼굴을 기꺼이 내 것으로 만들리라는 거에요. 설사 그 소중한 얼굴을 잃게 된다고 해도, 언젠가 결국 또 어딘가의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말이죠. 저는 당신의 얼굴을 닮아갈 것이고 우리가 함께하는 날들에 무수한 표정을 새겨넣을 것이며 당신의 얼굴을 가진 순간만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삶의 조각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당신, 그렇게 그 사람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는 당신, 혹은 이제 막 누군가의 얼굴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제 작은 말들이 위로가 되길 바라요. 안녕,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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