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구의, 당신의 이야기]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가라




바람이 분다, 가라

저자
한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0-02-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날 새벽 폭설이 그 모든 흔적을 덮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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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당신. 빙구에요.


 오늘 빙구는 조금 특별한 글을 쓰려고 해요. 단 한명의 당신을 위한 글을 쓰려고요. 맞아요, 당신이요.


 왜 당신같은 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당신은 제게 여러 번 말했지요. 하지만 이건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수많은 당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이건 수많은 교점에서 제가 마주친 무수한 당신들에게 쓰는 글이에요. 당신은 내가 마주친 그 많은 당신 중의 하나인 거고,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이 글들은 사실 모두 당신을 향해 있는 거에요. 그러니 누구보다도 당신이 이걸 읽어줬으면 해요. 습관처럼 나같은 것, 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창밖에는 막막한 안개비가 내리는데, 당신은 지금 이 시간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습도만큼의 생각에 젖어 있는지. 소리도 없이 이렇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데, 오늘은 우산을 챙겼을는지, 비를 맞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갔을는지. 당신이 좋았다고 해서 읽어봤어요. 좋더라구요.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에요.




바람이 분다




삼촌의 책장에서 빌려간 딱딱한 책들을 건빵처럼 입속에서 불려 읽던 그 가을, 때로 나는 막막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내가 굳건히 딛고 걸어가는 땅이, 실은 전속력으로 회전하는 전자들이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핵과 전자들 사이의 공간은 소금 알갱이들이 흩어진 커다란 성당만큼이나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삼촌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적,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부터 이미 나는 더 믿을 수 없었다. 0이 변한 텅 빈 무한 속에서 0을 딛고 걸어가는 0, 그것이 바로 나라니. 그 몸속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붉고 더운 피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다니.



 이 책은 주인공인 정희가 친구 인주의 죽음을 재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각으로 기록한 것들을 생생히 담고 있어요 그녀는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였던 인주의 자살을 부인하고,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절박하게 인주의 흔적을 따라 헤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이 이미 인주를 자살한 비운의 예술가로 세상에 드러내놓고 진실로부터 유리시키죠. 정희는 인주가 누구보다도 생에 절실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 편이 되어주지는 못해요.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날카롭게 살아 움직이면서 인주를, 인주였던 것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그녀가 중간중간 토하는 것은 위와 같은 절망스러운 고백입니다. 인주와 인주의 삼촌, 셋이서 함께 했던 순간들이 꿈처럼 덧없는 것이었다는 잔인한 깨달음. 예민하게 기억하면 할수록 견고하게 꿈이 되어 현실과 분리되는 지난날들을. 그러나 그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에 자신의 심장이 가장 더웠음을, 


 그 새벽 제가 뱉었던 숨들이 그랬을지도 몰라요. 경찰이 던지는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하기 시작할 때에서야 이것들은 다 제 것이 아닌 것들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요. 부옇게 밝아오는 거리에서 당신의 언어들을 다시 엮을수록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어슬렁거리며 하품을 하는 그들과 함께 거리로 밤이 가시는 것을 지켜보는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나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에게 장난이 아니라고 더듬거리고 있는 것이 어느 때보다 낯설고 이상했어요. 저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이름과 나이와 당신이 남긴 글이 제가 아는 모든 것이었지만 당신의 글에서 본 섬뜩한 예감만으로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러나 당신의 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분명했어요.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제겐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때로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단 한번도 믿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것을. 격렬히 고동치던 그 심장들이 실은 텅 빈 것이었다는 것을. 마른 입술, 두려워하는 손, 갓 꺼낸 밀빵 껍질같이 달아오른 네 개의 뺨조차, 어두운 꿈의 마지막 순간처럼 영원히 없는 것, 사라지기 전에 이미 없던 것, 없던 것이었다는 것을.



 정희가 이처럼 담담히 독백하는 것처럼, 당신의 존재감은 그런 것, 이를테면 없는 것 같은 감각이었어요. 그 새벽 저를 혼란에 빠뜨린 건 그런 가벼움이었죠. 그건 바람을 느끼는 것과 비슷했어요. 저를 스쳐가는 바람결을 선명하게 느껴도 사실 그건 대기의 기압차에 불과해서, 저는 그것을 잡지도 만지지도 못했고 실체를 요구하는 저들에게 보여주지도 못했어요. 그 시간, 그 밤과 새벽 사이의 틈으로 엇갈린 직감들이 숭숭 드나들었지만, 경찰에서 당신이 무사함을 확인했다고 연락이 올 때까지 저는 제가 재구성한 그 모든 생각들을 믿지 못했어요.


 그렇게 바람같이 그 밤이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나쁜 마음을 먹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던 아찔한 시간들, 그 소동, 제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던 그 밤이 전부 다. 다행히 당신은 살아있었어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싯구처럼 말이에요. 그걸 믿을 수 있나요. 그 자연스럽고 당연하면서도 기적같았던 새벽과,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당신의 울음마저 기뻤던 당신과 저의 아침. 
 



달의 뒷면




달은 기계적으로 반듯하게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지 않는다. 수없이 흔들리며 뒷면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때문에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은 50퍼센트가 아니라 59퍼센트다. 흔들리며 드러난 약간의 뒷모습을 따라 9퍼센트의 불완전한 지도를 그려갈 수 있다.



 당신은 가늠하지 못할 깊이의 상처로 화끈거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어요. 그 환부에 불그스름하게 피던 온기가 제 시선을 붙잡았던 거에요. 그 체온이 말이에요. 누군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기던 온점 없는 당신의 단어들, 아득하게 먼 곳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느라고 당신의 호흡은 급했고 매일 같은 낱말들을 다르게 배열하기 일쑤였죠. 그래요. 매일 그런 글을 찍어내는 저는 당신이 조금 신기했어요. 타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가장 살아있는 것 같은 당신이.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이 공전하는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환부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물론 내게도, 당신은 달처럼 흔들리면서, 지구에게는 늘 절반의 얼굴만 보여줬어요. 늘 같은 당신의 얼굴에,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글들을 읽지 않는 나날들이 이어졌어요.


 그 새벽, 당신이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을 때까지 방에 혼자 앉아 당신이 그간 썼던 글들을 기억하려고 애썼어요. 확장되어가는 우주공간처럼 시간이 하염없이 부풀던 것을 기억해요. 어른어른 흐려지며 멀어지는 별빛이 정말로 당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봐, 저는 그동안 무심코 당신의 글들을 넘긴 것들을 후회했습니다. 기억나는 당신의 글들은 어느 것이나 형체가 불분명했고, 그 이후의 긴긴 통화들과 무수한 문자메시지에서도 당신은 그 일에 대해서 결코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 거기 앉아 마치 달의 흔들리는 뒷면을 그리는 것처럼 저는 어렴풋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들의 윤곽을 가늠했어요. 제가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당신의 모습을 어림잡는 것은 제 자리를 어림잡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인주가 숨겨놓은 자신의 상처, 그 달의 뒷면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정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인주보다 훨씬 죽음에 가깝게 있었다고. 그러나 인주의 죽음에 대해 찾아 헤매는 순간순간 그녀는 분명한 실체로 살아숨쉽니다. 차가운 불안과 혼란과 분노로. 그녀의 생이 아닌 기억들로. 때로 타인의 호흡을 빌려 누군가 숨을 쉬고 피를 움직이는 것처럼요. 그녀를 살아있게 했던 것이 있는 것들이건 없는 것들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불어넣은 숨들로, 가장 차가운 기온이 누군가의 심장을 얼리는 계절에 그녀가 뜨겁게 살아있었다는 것을 당신도 읽어냈나요?


 그렇지만 제가, 혹은 소설 속의 정희가 남겨진 흔적들에서 읽지 못하고 놓쳤던 것이 있다면 바로 이거였어요. 인주의 흔적에 베이고 데이며 정희가 살아있음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끝까지 인주를 괴롭힌 숨겨진 실체를 온전히 정희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당신을 괴롭히던 문제는 당신의 숨겨진 뒷면을 재구성하느라 내가 함께 흔들리며 여기 서있었던 것과는 별개의 것이었어요. 제가 불완전하게나마 9퍼센트의 흔들리는 뒷면을 포착했다고 해도, 나머지 41퍼센트의 뒷모습은 오로지 당신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화기 너머로 당신의 울음을 또다시 들었을 때 나의 당혹감은 사실 아주 뒤늦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신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거든요. 그마저도 흔들리고 부정확해 어림으로 짚어보았을 뿐인 나머지 9퍼센트, 그 부질없는 흉터의 면적을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수화기 너머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인데.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금, 당신은 내게는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말만 하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우리의 궤도는 자주 어그러지고 달은 여전히 흔들리며 뜨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다




고래들은 초음파로 말을 한대. 아주아주 낮은 음파를 보내면, 지구 반대쪽 바다에 있는 고래한테까지 말할 수 있대. 음, 그러니까 고래들은 핸드폰이 필요 없어. 엄마 고래랑 아이 고래랑 헤어져도 걱정 없어. 평생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 이렇게 맨날.
잘 있니? 예, 잘 있어요. 점심은 먹었니? 그쪽 바다는 너무 차갑지 않니? 참을 만해요, 맛있는 물고기가 많거든요. 언제 돌아올 거니? 음, 정어리 백마리만 더 잡아먹구요.



 그녀를 둘러싼 모든 불리한 정황,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실들과 예기치 않은 순간에 상황을 뒤집는 작은 진실들이 뒤엉켜, 소설의 후반부는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흩어진 우주복사의 점들에서 최초의 우주가 가진 형상을 재조립하는 것처럼 그 과정은 방대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번번이 실패와 절망, 몰이해를 양산하는 속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진실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지 않고 바다 건너로 초음파를 보내는 엄마 고래처럼 가장 낮은 음파로. 양초의 가장 낮은 곳에 남은 심지를 태우며, 푸르스름하지만 아주 뜨겁게. 인주와 인주의 하나뿐인 아이를 위해, 그녀가 사랑했던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사물의 운동속도는 예외없이 정지한 사물조차도 빛의 속도와 일치한다고 나는 읽었다.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와 시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합하면 일정하게 빛의 속도가 된다. 즉, 공간 속에서 빠르게 운동할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광속에 가깝게 비행하는 우주선을 탄 사람은 늙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 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따금,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와 똑같이 멈춰 있는 보도블록들, 나무와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흐르는 시간 속을 날아가고 있구나. 순수한 시간의 속력을 견디고 있구나.



 당신과 내가 고래들처럼 초음파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이 모든 몰이해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당신과 나의 거리는 때로 너무나도 멀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빛을 왜곡시켜 건네곤 했어요. 그러나 왜곡된 상이었을지라도 내가 받은 당신의 별빛이 선명한 빛을 띠고 있을 때 제가 내심 안도했던 것을 알고 있나요.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 당신의 글을 본 게 후회되기도 했습니다. 며칠간 당신의 글들을 지나치다가, 깊은 밤에 문득 당신의 글을 보아야겠다는 기이한 생각을 했던 게. 당신과 통화를 할 때마다, 문자를 주고받고 긴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당신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의 실체를 말하지 않을 때마다 더욱 그러했습니다. 맞아요. 저는 당신을 넉넉히 품을 만큼 좋지도 성숙하지도 똑똑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어요. 다만 서로 스쳐가던 그때 그 시간에, 저의 질량만큼 휘어진 제 공간으로 타인이었던 당신의 파동이 흘러들어왔던 거에요. 우리가 떨어져있던 거리만큼, 얼마간의 시간차를 두고. 희미하게 깜박이는 별빛으로. 겨우 그정도였던 주제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내가 우습지는 않던가요. 하지만 내 힘으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람이 불었던 것이 제 힘으로 되었던 게 아니듯, 바람이 불지 않는다 해도, 당신과 함께 회전하는 것밖에는요. 당신도 저도 멈춰 있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의 표면으로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타는 듯한 속력으로 당신과 내가 불타고 있음을, 흩뿌려진 이 거리 너머로 그 빛을 보내고 있음을 아나요.




그래도 살아야겠다




 빗발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차체가 거세게 흔들린다. 나는 숨을 토한다. 쒜엑 쒜엑, 거친 숨이 허파를 찢으며 울린다.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이 책의 저 마지막 문장들까지 읽고 난다면,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거에요. 이 책은 인주의 죽음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요. 인주나 인주의 삼촌에 대한 기록에 비해서 정희가 자신에 관해 기록한 것은 아주 적지만, 이 책은 인주가 아니라 죽은 인주를 써내려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던, 살아있었던, 앞으로도 살아있을 정희에 대한 책이라고요. 이 책은 허물처럼 잡히지도 않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바람에 대해서, 그 실재에 대해서 쓰고자 한 책이 아니라고요. 그 바람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고 살아가는, 거짓말같고도 자연스러운 기적같은 생에 대해서 쓴,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부니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생,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살아가야겠다고 말하는 생,들리지 않는 음파와 보이지 않는 별빛을 위해서 이 순간 번득이는 생의 불꽃에 대해서 쓴 책이라고요. 불완전하게 그려진 달의 뒷면의 지도에 대해서 절망하는 책이 아니라고, 없을 것 같고 거짓말같은, 그러나 기적같이 환히 빛나는 희망에 관한 책이라고요.


 당신이 가진 절반의 뒷면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흔적이 남았는지, 당신의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는지 저는 몰라요.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지난날, 당신의 생까지 저당잡고 끊임없이 재구성하던 타인의 죽음, 그 흉터, 아물지 못해 달아오른 상처의 깊이를 모릅니다. 단지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당신도 나도 그 무엇도 아니라 당신과 내가 마주친 그 자리에요. 정희가 고백했듯 때로는 그 부질없음에 대하여 믿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는 단지 당신과 내가 만났다가 헤어진 자리, 그 교점, 영원히 없거나, 있었거나, 지금 있더라도 앞으로 없어질 그런 점을 늘 부질없이 그리워할 뿐이에요. 바람이 불어서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설령 없었거나 없어질 자리더라도 그것이 저와 당신이 거기 있다고 알려줍니다. 바람이 분다고, 살아 있다고, 그러니 당신의 자리를 찾아서 가라고. 


 마치 그 새벽처럼 이 밤이 아주 고요하네요. 내일은 당신에게 전화를 걸 거에요. 어설프게 적어놓은 당신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당신을 위해 썼다고. 많이 다가가지도, 도움이 되는 말들을 하지도,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끌어오지도 못했지만, 여기 이렇게 서서 당신과 함께 시간의 속력을 견뎠다고.


 그러니 다 읽고 난다면, 그리고 바람이 분다면, 살아야겠다고 당신이 말해주길 바라요. 다시는 그런 새벽을 지나지 않겠다고.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해도, 이 모든 말들이 쓸모없다고 해도, 막막한 수신음이 흩어지던 그 새벽과 내 목소리와 당신의 울음이 모두 사라질 꿈처럼 없어질 것이라고 해도, 그래도 살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