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이야기 책 속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엔 이야기가 가득하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본 광고 속에도, 당신이 나눈 대화 속에도, 그리고 당신의 삶 속에도. [이야기를 이야기]에서는 삶 곳곳에 놓여있는 이야기를 꺼내어 진열할 예정이다. 좀 더 구석진 곳에서 좀 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그런데 이번엔 책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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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읽어야지 했었던 편혜영의 몬순을 드디어 읽었다.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3500만원짜리 소설이라 그런지 술술 잘 읽혔다. 상금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편혜영이 지금껏 받은 상금이 13500만원이다. 큰 것만 보면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동인문학상에 이번에 이상문학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적어보자면 동인문학상 5000만원, 이상문학상 3500만원, 이효석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 2000만원,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1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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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접한 편혜영의 작품은 단편집 저녁의 구애이다. 이때에 편혜영은 죽음이나 죽음에 다를 바 없는 삶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단편들 속 인물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며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을 편혜영과 함께 건조한 시선으로 살피고 있으면, 삶이 죽음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아마 이 부분에서 그 이전의 작품들의 기괴함과는 차이점을 가졌을 것이다. 이전의 작품들(아이오가든이나 사육장 쪽으로)에서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기괴함을 가져왔다면, 저녁의 구애에서는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는 기괴함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괴함만으로 그녀를 수식하는 것은 어려운 듯하다. 이번 작품 몬순에서는 기괴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녀가 애용한 기괴함은 불안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수단은 바뀌었지만 불안에 대한 그녀의 끊임없는 탐구는 계속되고 있었다. 편혜영 소설의 변화를 짧게 요약하기 어렵겠지만, 감히 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의 편혜영이 불안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지금의 편혜영은 삶 속 깊숙이에 내재해있는 불안을 보여주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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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에는 대상 한 편과 우수작 여러 편이 묶여 나온다. 대상은 확실한 대우를 받는다. 작품이 실리는 건 물론이고, 작가의 수상소감과 작가론과 작품론이 뒤이어 실리기 때문이다. 이번 편혜영의 작가론은 편혜영의 절친인 김애란이 썼고, 작품론은 장두영 문학평론가가 썼다.

 

 

작품론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으며 왠만치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궁금증을 품지도 못했던 것에 대한 답변까지 들을 수 있었다. 간단히 요약을 해보자면 이렇다.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면, 아파트 이웃사람들이 태오를 창문을 깬 범인으로 의심하는 이유는 태오의 아기가 죽었을 때 의사의 멱살을 잡으며 난리쳤던 소동 때문이라든지, ‘태오가 과학관 관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아내 유진의 내연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든지, 또 아기가 죽은 날 유진이 아기를 버려두고 관장을 만나러 바에 갔다고 태오가 의심한다는 것까지.

 

 

장두영 문학평론가는 소설 기법에 대한 분석도 빠뜨리지 않았다. 접속사를 비롯한 군더더기가 없는 건조한 문장이 글의 속도를 살리면서 불안감을 조성한다든지, 또는 태오를 창문을 깬 범인으로 의심하는 이유아기가 죽게 된 원인이나 태오의 유진에 대한 의심과 같은 사실들을 바로 알려주기보다는 그 단서들을 조각조각 나누어 배치하여 긴장의 끈을 계속 유지한다든지 등등등. 이외에도 작품의 의미와 중요한 표현들까지 자세히 분석을 해놓았다. 문학평론가가 괜히 문학평론으로 돈버는 게 아닌가 싶었다.

 

 

쨌든 그렇게 작품론을 다 읽고 나서, 한 번 더 소설을 읽었다.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영화를 다시 보는 것과 굉장히 흡사하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궁금해 하면서 본다. 하지만 다시 볼 때는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기에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 깊이 따라간다든지 내용 이외의 것에 집중하면서 보게 된다. 두 번째로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바로 태오의 두려움이었다.

 

 

처음 읽을 때도 태오의 두려움을 보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아이를 잃고 난 후에 유진과 자신 간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유진이 관장과 바람을 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았을 때는 그보다 더 깊은 두려움을 보았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태오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오해와 오해에 대한 확신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이러한 태오의 태도는 글의 초반에서부터 드러난다.

 

 

글의 초반부에서 태오유진의 대화가 나온다. 이 대화는 계속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태오는 그것을 의사소통을 피하는 유진의 탓으로 돌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대화의 어긋남은 태오의 오해와 그 오해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태오의 오해와 오해에 대한 확신은 유진의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림과 동시에 의사소통의 실패의 원인을 유진으로 만든다.

 

 

태오는 아내 유진과의 한마디 상의 없이 좋은 회사를 때려치고 이직해버렸다. 이직 전에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태오는 상의할 수 있는 기회를 유진이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태오가 집에 돌아오면 유진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태오는 이것을 자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태오는 이것을 유진에게 확인해보지도 않았고 먼저 다가갈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그렇게 여길 뿐이었다.

 

 

둘의 대화에서도 태오의 오해는 드러난다. 둘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유진은 묻고, ‘태오는 대답과 동시에 대화를 끝낸다. 하지만 태오는 대화를 끝내는 것이 유진이라고 생각한다. 유진의 질문들은 모두 대화를 더 이상 잇기 싫어 부러 화제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첫 질문인 천만 원짜리 소파인 걸 어떻게 알아?”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해도, 두 번째 질문인 그런데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둔 거야?”는 화제를 돌리는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태오는 자신의 오해에 대한 확신과 함께 대답 대신 웃음으로 대화를 종결시킨다.

 

 

태오의 오해는 계속된다. ‘유진은 원래 아파트가 단전되는 동안 약속을 나갈 참이었지만, 갑작스레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 있을 것이라 말한다. ‘유진은 약속이 취소됐다는 말을 하고 물끄러미 태오를 보다가 덧붙인다.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나 태오는 이 말을 유진자신이 집에 혼자 있고 싶다는 이야기로 알아듣고, 자신은 집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나갈 채비를 하는 태오에게 유진은 묻는다. “당신은 나가려는 거야?” 유진이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한 질문을, ‘태오는 자신을 붙잡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쫓아내는 질문으로 생각한다. ‘태오가 밖으로 나오며 둘의 대화는 단절된다.

 

 

어쩌다 둘 사이는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아니, ‘태오는 왜 유진을 오해하게 된 것일까? 그 답은 서서히 드러난다. ‘태오는 아파트를 내려가는 길에 소아과를 소개시켜준 앞집 여자를 만난다. 앞집 여자와의 만남에서 태오유진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과 아이가 죽었을 때 태오가 벌인 소동 때문에 그가 아파트 창문 돌팔매질의 범인으로 의심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태오유진사이가 틀어진 이유에 아이의 죽음이라는 단서가 주어진 것이다.

 

 

태오가 아파트를 나와 아파트 근처의 바를 찾아가고, 거기서 유진의 직장 상사인 박물관 관장을 만난다. 둘의 대화와 태오의 독백 속에서 또 다른 단서가 드러난다. ‘태오유진이 박물관 관장과 바람을 피고 있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꽤나 젊은 관장이 유진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태오는 자신의 의심을 점점 더 확신한다. ‘아이의 죽음유진의 바람은 따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태오의 의심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태오는 아이가 죽은 날, ‘유진이 관장을 만나러 아이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은 평소와 같이 팩스를 보내러 비즈니스 센터를 갔다고 몇 번이나 해명했고, ‘태오역시 그저 유진을 닮은 익숙한 뒷모습이 바(bar)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태오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연히 유진을 닮은 여자의 뒷모습을 본 것이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유진이 딴 남자를 만나느라 아이를 소홀히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심을 믿고 분노하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태오가 의심을 확신하고, ‘유진의 행동을 멋대로 해석하며 자신의 의심을 더 확고히 하는 것은 태오의 자기방어이다. ‘태오는 진실을 마주하기가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태오가 어디론가 급히 가는 유진을 찾다 포기하고 집에 왔을 때 아이는 살아있었다. 그러나 태오는 바(bar)에 내려간 것이 유진일 것이라는 의심을 확인하고 싶었고, 이내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자신의 아이가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자신의 의심 때문에 태오는 아이가 죽게 방치한 것이고, 자신의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결국 자신이 아이를 죽게 만든 것이다.

 

 

다시 한 번 몬순을 읽으면서 이건 한 겁쟁이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자신의 의심을 끝까지 고수할 수밖에 없는 한 겁쟁이의 이야기. ‘태오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의 의심이 맞다면 아이를 죽인 범인은 아이의 엄마인 유진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의심이 틀리다면 아이를 죽인 범인은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태오는 단전 속 어둠의 힘을 빌려 진실을 마주하고자 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의심을 유진에게 진실하게 말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의심을 들은 유진의 반응을 볼 수 없을 것이고, 적어도 적나라하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위안 때문이다. 하지만 태오가 입을 떼려는 순간, 진실을 당당하게 마주하라는 듯 불이 켜진다. ‘태오는 벌린 입을 다시 다문다. 전기불은 태오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몇 번이고 불이 켜졌다 꺼졌다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