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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점을 들러 책을 구경하던 도중, 『2014 이상문학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표지에서 편혜영 작가의 얼굴과 그녀의 소설 제목인 ‘몬순’을 보았다. ‘아, 결국’ 혹은 ‘아, 드디어’라는 생각과 함께 조만간 구입하서 읽겠노라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집에 와 며칠 뒤 그녀의 전작 『저녁의 구애』를 펼쳐들었다. 지난날의 그녀를 약간 엿본 뒤, 지금의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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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과 수업을 듣던 때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가 나의 쪽지시험 대상이었고, 나는 그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쪽지시험이라 책을 가볍게 읽고 대략의 줄거리와 핵심어들을 외우고 들어갔건만, 문제는 이러했다. ‘책에서 가장 좋은 단편 3개를 고르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쓰시오.’ 나는 집중해서 읽었던 맨 앞의 세 편을 꼽았고, 정말 형편없는 시험지를 제출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수업, 교수님은 잘 쓴 학생 몇 명의 시험지를 나눠주면서, 이 쪽지시험의 출제의도를 말했다. 나이 든 자신의 ‘좋은 작품’과 요새 젊은이들의 ‘좋은 작품’ 사이의 괴리를 알아보고 싶었다는 게 교수님의 의도였다. 교수님은 자신이 꼽은 ‘좋은 단편’과 우리들이 뽑은 ‘좋은 단편’이 대체로 비슷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도 운 좋게 얼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교수님은 이어 말했다. 편혜영, 이 친구가 글을 잘 쓴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아마 조만간 이 친구가 큰 상을 하나 받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나는 서점에서 그 교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서점에서 이상문학상 책을 보았을 때, 책장을 펼쳐 심사위원 명단에서 그 교수님의 성함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진 않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편혜영을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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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단편모음집 『저녁의 구애』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꼽자면 ‘반복’과 ‘섬뜩함’을 들 수 있겠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을 이야기하고, 그 반복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섬뜩함’ 또는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편혜영을 수식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그리면서 섬뜩함을 이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책의 제일 처음에 위치한 「토끼의 묘」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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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였다’라는 문장으로 글은 시작한다. 파견지에 나간 주인공은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를 발견한다. 그는 자신의 충혈 된 눈처럼 빨간 눈을 가진 토끼에게 연민을 느끼고 집에 데려온다. 그리고 그는 파견나간 6개월간 하루하루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그리고 파견근무가 끝나는 날, 그는 주워온 곳에 다시 토끼를 버리고선 파견지를 떠난다.
이야기는 계속하여 반복되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을 다룬 이야기가 지루하기 보다는 섬뜩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소설의 구성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평평한 평지를 끊임없이 걸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보다 더 지루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그 길에 끝에는 그 남자의 생명을 앗아갈 살인범이 있다고 해보자. 그 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도시에서 그의 생활은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퇴근길에 무단결근 중인 선배의 집에 들러 습관처럼 문을 두드려보고, 집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며 다행히 괴상한 냄새도 풍겨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오는 게 전부였다. (23)
편혜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소멸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모두가 반복되는 일을 한다면,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삶 속에서 대화를 지워나간다. 이 이야기는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이자, 의사소통이 부재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어느 틈에 말없이 홀로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도시로 온 후 그가 나눈 가장 긴 말은, 담당자와의 대화를 제외하면, 상점 주인에게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정미된 쌀의 가격을 물은 게 다였다. (26)
대화라는 것은 적어도 두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목소리로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대화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해도 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혼자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은 점차 소멸되어 간다.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이 소멸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는 무단결근으로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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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삶의 끝에는 결국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한 주체의 소멸이라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소멸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한층 더 섬뜩하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면 아침에 등교해서 저녁에 하교하고, 회사원이라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생활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하는가. 소설에는 그 답변도 살짝 보여주고 있다. 편혜영은 그 답변을 사냥개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주어진 것과 시키는 것만 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냥개. 이 사냥개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비유이자, 우리에게 건네는 작가의 충고가 아닐까.
도대체 어떤 정보를 모아야 하는 겁니까? 그가 선배에게 물었다. (중략) 어떤 정보라도 괜찮아. 뜻밖에도 선배는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보를 선택하고 유용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라 다른 담당자 몫이니까. 자네는 단지 수집만 하면 돼. 말하자면, 선배가 덧붙였다, 일종의 사냥개라고 생각하면 돼. 어떻게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시하는 사냥감을 단지 잡아오기만 하면 되거든. 무엇을 잡을지, 잡은 후에 구울지 삶을지 버릴지 박제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숲을 달리는 사냥개가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서서 구경하는 주인이지. 그러니까 개는 잡을 때까지 죽도록 초원을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뭐, 듣기 좋은 비유는 아니군요. 그가 선배에게 대꾸했다. 하하하, 그렇겠군. 미안하네, 사실 자네가 아니라 내가 그런 심정이라서 말이야. 선배가 쑥스러운 듯 사과했다. 그는 이해했다. 그 비유를 따르자면 어차피 선배도 사냥개의 주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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