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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이야기] 책 속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엔 이야기가 가득하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본 광고 속에도, 당신이 나눈 대화 속에도, 그리고 당신의 삶 속에도. [이야기를 이야기]에서는 삶 곳곳에 놓여있는 이야기를 꺼내어 진열할 예정이다. 좀 더 구석진 곳에서 좀 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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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을 좋아한다. 예능인으로서도 좋아하고 작곡가로서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가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윤종신이 단연 좋다. 그의 가사는 자칫하면 그대로 지나칠 만한, 그런 감정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이상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이러하다. 사자를 주제로 노래를 만든다면, 그는 사자의 용맹함을 노래하기 보다는 사자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뽑아내 그것을 가사로 만든다.(너무 이상한가?)
박정현이 새 노래를 냈다. 집을 나서며,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꽂고, 습관적으로 벅스뮤직에 들어가, 습관적으로 실시간차트를 보았는데, 박정현의 신곡이 보였다. 바로 들어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 전체적인 느낌은 그저 그랬다. 박정현의 노래가 그저 그랬다는 건 나에게 굉장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한 가지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노랫말. 노랫말이 와 닿았다. 일반적으로 사랑에 관한 노래를 만든다면 두 가지 방향이 있다. 긍정과 부정. 다른 말로는 ‘사랑의 기쁨’ 혹은 ‘이별의 슬픔’. 하지만 <그 다음해>의 노래가사는 사랑의 또 다른 부분을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깊어지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 어디 한 번 확인해보자.
널 처음 볼 때쯤
난 세상이 우스워
되려면 뭐든 될 것 같아
그런 표정으로
너에게 빠져들 때만 해도
니가 내게 빠진 줄만
소리 없이 빠져든 나
Oh Oh Oh Oh Oh...
그 다음해 쯤 무서워졌어
사라져 버릴까봐 환상이 될까봐
내 모든 걸 너에게 말했어
내 초라한 기분
그 순간까지 네게 고백해 버렸지
너의 일부가 되길 바랬어
너의 착한 귀 자상한 눈처럼
밝은 날 좋아했지만 슬픈 나 또한 안아준
그 넓은 가슴이 좋아 너에게 안겼어
다음해쯤 그래도 지겹지 않았어
오래된 우리를 배려한 더 깊어진 너
Oh Oh Oh Oh Oh...
그 다음해 또 무서워졌어
사라져 버릴까봐 환상이 될까봐
내 모든 걸 너에게 말했어
내 초라한 기분
그 순간까지 네게 고백해 버렸지
너의 일부가 되길 바랬어
너의 착한 귀 자상한 눈처럼
지쳤었던 싫어했었던
그 흔한 오래된 연인의 사랑은
너 없는 두려움이 이겨버렸어
그 다음해가 이제 올해야
최소한 그댄 나의 일부가 됐죠
일을 잠시 쉴 때 그댈 생각해
그때마다 그댄
어디론가 나를 저 멀리 보내줘
이젠 일부가 아닌 하나 되고 싶어
우리 결국 같이 살 수 있을까?
다음 그 다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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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며 삶을 즐기고 있는 여자. 가끔 주변에서 왜 연애를 하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기에 연애에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여자의 주위를 맴돌았고, 자연스럽게 둘은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고백했고 둘은 연인이 되었다.
꿈같은 시간이 흘렀고 새해가 다가왔다.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정동진 일출에 마냥 행복했던 여자는, 새해가 다가오고 며칠이 지나자 문득 두려워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무너진 혼자만의 삶과 남자가 자신의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사랑이 떠났을 때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무서워했다.
데이트가 있던 날, 남자는 너무도 다정하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여자는 펑펑 울어버렸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과 깊어지는 사랑 때문에 느꼈던 두려움을 말했다. 쌓여있던 말들이 모두 터져 나온 뒤 여자는 너무 창피했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또 일 년이 지나 또 다음해가 되었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적어도 그의 사랑만은 믿을 수 있었다. 여자는 이제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영원한 사랑’에도 약간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여자는 그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다보면 그것이 영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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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혼자서 사는 것이지만,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두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나’의 삶이 ‘우리’의 사랑으로 변할 때.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커진다.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혼자만의 삶’을 버리고 그 사람에게 가도 되는 것일까? 언젠가 이 사랑이 끝나면 다시 힘겹게 ‘혼자만의 삶’을 쌓아올려야 하는 건 아닐까?
<그 다음해>는 사랑의 두려움을 갖고 있던 한 사람이 그것을 이겨내고 더 큰 희망을 찾아나서는 멋진 사랑의 서사를 보여주었다. 다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지막 부분에 ‘이젠 일부가 아닌 하나 되고 싶어’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완전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동안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꿈꾸기에는 너무 큰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박정현의 <그 다음해>를 시간이 날 때마다 듣고 있다. 가사가 마음에 들어 자꾸 듣다보니, 어느새 멜로디에도 애착이 생겨버린 듯. <그 다음해>가 박정현의 이번 앨범 중 선공개곡이라는데 그녀의 다음 노래들이 궁금하고, 또 다음에는 사랑의 어떤 단면을 포착해줄는지 작사가 윤종신의 행보에도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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