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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13 왕가위, 양조위의 <화양연화>
- 인생이라는 그래프 위의 어떤 점
얼마 전 프러포즈를 도와달라는 아는 선배의 부탁을 받았다. 썩 가고 싶진 않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알겠노라 답했다(실은 거하게 술을 사겠다는 말에 혹했지만). 거기엔 대학동기 한 놈도 같이 동원되었다. 프러포즈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예비형수님은 눈물을 폭포처럼 쏟았고, 선배는 휴 그랜트처럼 등장해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줄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기 놈이 말을 꺼냈다. “있잖아. 방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하루를 맞은 여자 분을 보았잖아.” 피곤한 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응, 왜? 부럽냐?”, “아니, 왠지 오늘이 행복의 정점일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슬퍼졌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방금 본 그 순간이 정말 그 분 인생의 정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정점은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에 관한 영화, 너무나 아름다워서 오히려 처연해지는 한 시절에 관한 영화. <화양연화>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뜻한다. 그렇지만 영화 <화양연화>가 그런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저 통속적인 불륜이야기이고,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냐는 것이다.
홍콩의 한 아파트에 리첸 부부와 차우 부부는 나란히 세 들어 살게 된다. 리첸(장만옥)의 남편은 출장이 잦고, 차우(양조위)의 부인도 야근이 많아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둘은 서로 스치거나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어느 날, 자신의 배우자들끼리 불륜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러다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 사랑에 빠진다. 서로 다가설 듯 끝내 다가서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망설이다가 사랑은 떠난다.
이들의 스치는 사랑이 정말 그들의 인생그래프에 정점이었을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까. 글쎄. 그랬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화양연화’에 대해 다시 물어볼 것이 있다. 대체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아닌 어떤 순간이 어떻게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그래프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x축으로 행복과 고통의 정도를 y축으로 놓자. 아마 일렁이는 삶의 파랑을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화양연화는 각각의 그래프에서 가장 정점의 순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참 재밌게도.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소중한 순간은 다르다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저승으로 넘어갈 때, 그들은 이승에서의 기억 중 단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 가장 소중한 순간을 선택하고 그 기억을 가져가는 것이다. 나는 술자리에 가면 종종 사람들에게 영화 속 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어떤 기억을 가져가고 싶어?”
대답은 다양했다. 또 참 신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꿈을 찾아, 부모님의 반대를 피해 울며불며 도망치듯 가출했던 순간의 기억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언니와 함께 신림동을 떠나 일산으로 이사를 가던 날 밤의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트럭 안에서의 기억을, 다른 누군가는 어린 시절 하굣길에 저 멀리서 마중 나온 어머니가 보이는 그 순간을 말했다. 이것들을 인생그래프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하나의 기억을 남긴다면 그 기억들을 남기겠다고 했다. 그게 바로 ‘화양연화’ 아닐까.
이런 질문과 답변은 인생을 아주 다르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은 행복이나 성공과는 전혀 별개의 어떤 것이라는 것. 그건 오로지 행복의 정상을 향해 마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듯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우리의 화양연화가 그곳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는가.
리첸과 차우의 사랑은 참 볼품없다. 그들은 스쳐가고, 엇갈리고, 에두르고, 억누른다. 만남의 순간에도 서로를 안아 보지 못하고, 이별의 순간에도 애꿎은 자신의 팔만 휘감고 꾹꾹 눌러볼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그들 인생의 정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단 하나의 기억을 남기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때를 가져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랑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소중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행복의 부분집합인 것처럼 확신한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그러한가. 사랑은 행복하지만 그만큼 아프다. 그러니 사랑은 행복과 고통의 교집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랑뿐이 아니라 인생의 무엇이든 이와 같을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바로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차우는 앙코르와트로 간다. 그곳의 돌벽 틈에 무언가를 속삭이곤 흙을 덮는다. 그 작은 틈에 아마 차우는 자신의 ‘화양연화’를 ‘원더풀 라이프’를 담아두었을 것이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틈을 만들고 입에 가져다 대어본다. 속삭여본다. 나의 화양연화를. 단 하나의 남기고픈 기억을. 당신에게도 물어본다.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입니까?”, “어떤 기억을 가져가고 싶습니까?”
(P.S. 영화 <화양연화>의 화양연화를 꼽으라면 단연 나는 장만옥의 치파오를 꼽을 것이다.)
※ 왕가위, 양조위의 <일대종사> 2013년 8월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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