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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14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스윙보트>
-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
그러니까 내 키가 아직 자라던 시절, 나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적어도 덩크슛을 할 정도의 키는 될 줄 알았고, 적어도 윤동주와 비슷한 나이엔 시집 한 권 내겠거니 생각했고, 적어도 나는 군대에 끌려가진 않을 줄 알았고, 적어도 20대 중반쯤엔 아름다운 예비신부와 괜찮은 직장이 있을 줄 알았다. 이제와 보니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없다.
성장판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무렵,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덩크슛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시집도, 군면제도, 예비신부도, 괜찮은 직장도 남아있을 시절이었다. 덩크슛 대신 새로 생긴 꿈은 치기어린 것이었다. 세상을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 이건 성장판 처럼 닫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게 덩크슛만큼이나 힘든 꿈이었다는 걸.
오늘 룽의 Ex-MovieFriend는 세상 모든 가능성의 성장판이 닫힌 것처럼 사는 한 남자의 영화, 우연히 세상 모든 가능성의 열쇠를 갖게 된 한 남자의 영화. <스윙보트>다.
'스윙보터'는 선거에서 어떤 후보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인 <스윙보트>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투표'를 뜻한다. 고루한 얘기지만,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세상은 정말로 뭐가 됐든 바뀐다. 또는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스윙보터는 어떻게 보면 세상을 바꾸는 키를 쥔 사람인 것이다. 또는 전혀 의미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냐고? 이거야 말로 믿기 나름, 선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 버드 존슨은 별다른 직업 없이, 낚시와 맥주를 즐기며 빈둥거리며 중년의 싱글대디로 산다. 그러다보니, 12살 딸 몰리가 이런 아빠를 대신하여 집을 돌본다. 이들의 운명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바로 대통령 선거일. 선거시스템기계의 오작동이 생기고, 선거법에 따라 버드에게만 10일안에 재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공교롭게도 선거는 초박빙이고, 버드에게 주어진 이 한 표가 차기 대통령을 결정하게 된다. 전 세계의 매스컴이 버드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양측 대선캠프는 버드만을 위한 대선캠페인을 펼친다. 낚시를 좋아하는 버드의 마음을 잡기 위해 공화당은 도시 개발 계획을 버리고 강을 살린다며 친환경정책을 내놓고, 낙태를 인정하던 민주당은 버드가 생명 존중론자라고 짐작한 다음 갑자기 낙태반대운동 광고에 열을 올린다.
선거 때마다 당신의 한 표 한 표가 소중하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영화는 이를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문제는 버드가 표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딸 몰리는 아빠의 한 표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온 더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들 때문이다. 뻔한 얘기지만 막상 보면 찡하다. 성장판에 대한 희망처럼 접어버린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능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닫으며 그나마 열린 문이 무엇일까를 필사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되는 게 없었다. 사랑도, 사람도, 상황도, 세상도 그랬다. 하물며 내 삶조차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품어야 할 게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르겠는 하루하루. 그것이 성장판이 닫힌 이후의 성장통이었다.
버드는 아마 자신의 모든 성장판이 닫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대로 멈추든지 썩어갈 거라고 자신의 인생이 손에 쥔 휴지조각 같았으리라. 그래서 우연한 사고로 그의 성장판이 열리는 순간은 감동적이다. 전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투표용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은 세상의 앞날을 꿈꾸게 하고, 그의 앞날을 새롭게 만든다.
누군가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말했던가. 그런데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게 어른이라면 되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다. 버드가 그랬듯, 멈춰버리는 것이 어른이라면, 어른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오히려 좋은 어른은 멈추지 않고 흔들리는 사람인 것 아닐까. 실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자라며 느껴지는 성장통도 아팠지만, 자라지 못해 느끼는 성장통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영화는 버드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버드는 이후부터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지 않을까. 흔들리는 건 각자의 의지의 문제다. 누구나 흔들리며 살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생각해본다. 문을 닫은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고.
※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잡스> 2013년 8월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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